대산문화

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디지털 현실 속에서 구원과 신성을 성찰하다

라이따이한에 관한 거짓 혹은 진실

삶의 주인이 되는 길

선택과 배제를 넘어서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책상은, 책상이다?

운명, 미워하지 않는다

폭설 속에 새긴 궁핍한 시절의 꿈 하나

빈자리

신촌, 유령이 떠도는 거리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詩샘

판의 미로 데자뷰

밤에 듣는 밤 이야기

뻐끔담배 우산을 꽃이라 불러보는 오후 새들은 어디서 날아오나 시간을 담는 용기 흔해빠진 자살 여행

글밭단상

새들은 어디서 날아오나

글 김경인_시인,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 기초융합교육원 교수. 1972년생
시집 『한밤의 퀼트』『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등

세 번째 3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이 세상에서 나는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그 덕택에 살아남은 것이라는 걸.

그날, 나는 강의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 환히 트인 유리창 밖 나무들의 목덜미가 제법 초록에 가까워지던 봄날이었다. 엘리베이터 안 모니터 화면 위로 “진도 앞바다,” “전원 구조” 등등의 자막이 떠올랐다. 꾸물거릴 여유가 없었으므로, 서둘러 강의실로 들어갔다. 큰일 날 뻔 했군. 그래도 다행이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러나 두 시간 후 강의가 끝나자,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물의 비유에 기대어 시를 써왔다. 물속에서 나는 요람 속 아이이며, 맨발의 소녀, 늙은 여자였다가 이윽고 눈알이 사라진 시체가 되기도 했다. 물은 광포하면서도 따듯한 내 불안의 안식처. 기묘한 몽상과 상상의 어머니인 물을 나는 맘껏 가지고 놀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내가 사랑하던 물의 비유들이 나는 몹시 무서워졌다. 비유의 세계는 산산이 깨어졌다.

시를 못 쓰는 날이 길어진다. 물론 물의 비유 탓은 아니다. 시를 못 쓰는 날들이 길어지면서 나는 점점 비루해진다. 정작 내가 무엇에 비겁해지는지도 모르는 채 언어가 아름다워지는 건 슬픈일이다. 웃으며 집을 나선 누군가의 아이가, 부모가, 형제가, 애인이, 물속에 갇혀 죽었다. 내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야, 라고 말하기엔 그 죽음은 턱없이 가까이 있다.

나는 모른다. 내가 태어나 처음 지은 표정이 어떠했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얼마나 큰 소리로 울었는지, 최초의 말은 무엇이었는지, 내가 제일 듣기 좋아하는 목소리는, 음악은, 동화는, 무엇이었는지……. 내가 기억하는 최초는 정작 다른 데 있다. 아이가 내게 온 처음 순간, 나는 느낌으로 알았다. 그것은 최초에는 미열 비슷한 어떤 기미였다가, 그 다음에는 내 내부를 톡톡 두드리는 새의 발자국 같은 것이었다가, 쑤욱 밀려왔다 밀려가는 물결 같은, 리듬 같은 것이다가, 마침내 나를 휩쓸고 가버리는 커다란 파도가 되었다. 어떤 고통은 축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출산을 통해 조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고통도 축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가령, 내가 기쁨으로 허용할 수 있었던 내 세계의 침입자들. 어느새 그 씨앗만하던 것이 자라나 참새의 혓바닥만한 작은 혀를 굴려 ‘엄마’라고 나를 불러줄 때, 인간의 언어가 가장 신비로운 힘으로 나를 흔들던 순간을 기억한다. 아이의 매끈거리는 살을 하염없이 매만질 때, 아이의 검은 눈동자 속에 내가 깃들 때,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곤 했다. 이 완벽한 평화로운 세계가 사라진다면, 나에게 기쁨을 준 이 자그마한 뼈와 살이 한순간 나로부터 사라진다면, 그리고 그 후에도 세상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면.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나는 너무 끔찍해져서 얼른 상상 속에서 빠져나오곤 했다. 그렇게 상상만으로 충분히 고통스러운 일들이 현실을 찢어내고 좀비처럼 돌아다닌다. 그날 죽은 것은 304명이 아니다.

해가 지고 있다. 뒷산으로 새떼들이 몰려올 시간. 산등성이에 백로들이 하나 둘 돌아와 앉았다. 산이 하얗게 드문드문 지워지고 있었다. 죽은 백로가 우는 소리 들리는 것만 같다. 새들은 어디서 날아오는 걸까? ‘새는 천상의 영혼과 육신의 세계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는 존재로서 고대인들은 새를 영혼의 운반자로 신성시했고……’ 비유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나는 그렇게 배웠던 적이 있다. 그래, 그러나 새들에게 영혼이 있을 리는 없겠지. 그렇지만 이 새들은 어디서 날아오는 걸까? 백로의 서식지인 학교 뒷산은 곧 새들로 가득찰 것이다. 여기는 안산. 백로들의 천국. 그래, 그래, 새들에게 왜 떠나지 않느냐고 물을 수는 없다. 아직 봄이군. 우리는 봄 안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아. 그래. 그래. 아무것도 잊어서는 안돼. 정말 봄이라며? 응. 우리는 여기에 있지? 그래, 여기에 있지. 산으로부터 어스름이 몰려온다. 누군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