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번쩍했던 순간들
글 오수연_소설가. 1964년생
소설 『빈집』 『부엌』 『황금지붕』 『난쟁이 나라의 국경일』 『돌의 말』, 보고문집 『아부 알리 죽지마』, 기획번역서 『팔레스타인의 눈물』『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대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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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
나는 경찰에 점령된 대학을 본 마지막 학번이다. 교정의 잔디밭을 잔디대신 전경들이 뒤덮고, 잔디와는 달리 계절이 바뀌어도 시들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그들은 사철 야외에서 도시락을 까먹었다. ‘백골단(사복체 포조)’은 평소에는 운동장에서 족구를 하다가도 시위가 벌어지면 붕 떠서 상당히 긴 거리를 날아 주동자에게 발차기를 적중시켰다. 그들은 모두 무술유단자들이라고 했다.
시위를 주동하는 학생은 “학우여!”를 채 외치기도 전에 흰색 벙거지 모자의 백골단한테 덮이고 검은 전경들한테 거듭 덮여 실은 주동할 틈이 없었다. 시위는 메뚜기 떼처럼 한꺼번에 튀어 오르는 전경들로, 백골단의 이소룡 못잖은 액션과 구타와 욕설로 보이고 들렸다. 메시지는 강렬했다.
모이지 말라, 흩어져라. 내준 길로 다니고, 있으라는 데 있고, 할 일 없으면 집에 가라. 학생이 있어도 되는 곳은 날카로운 발톱과 발톱 사이였다. 그런 데 있으면 발가락 틈의 때가 된 기분이었다.
시위 주동자들은 구호를 외치고 인쇄물을 뿌릴 몇 분을 얻기 위해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했다. 군사독재를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장소는 허공밖에 없었다. 1983년 11월 8일, 황정하 열사는 학교 도서관 6층 난간에 매달려 시위하다 추락하여 운명했다
발밑
이듬해 봄, 학교가 텅 비었다. 그렇게 보였다. 정부가 구속학생을 석방하고 대학에서 경찰을 철수시켰다. 이른바 ‘학원 자율화 조치’이다.
예전 같으면 사전에 진압되었을 대중 집회가 학교 중심에서 열렸다. 2000명이 한목소리로 열댓 개 구호를 각기 삼창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결의하여 학교측이 집회 방지용으로 도서관 주변에 심어놓은 장미를 뽑고, 교문으로 밀려 내려갔다. “적들의 간악한 계략에 속지 말아야” 했다. “사회 민주화 없이는 학원 민주화도 있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물러간 저들은 교문 밖에 고스란히 포진하고 있었다. 시위대는 짱돌과 화염병을 날리며 교문을 돌파했다. 나는 그때 해방구를 처음 보았다. 시위대에 밀려 경찰이 물러난 공간, 주어진 것이 아니라 빼앗은 약 50미터. 페퍼포그 차에서 ‘지랄탄’을 다발로 쏘아대어 우리가 디디고 서있던 해방구는 금세 사라졌다. 그러나 각지의 시위 현장과 농성장에서 피고 지고, 다시 피고 있었다.
가리봉, 부천, 목동 등지에서 ‘민중 지원 가두 투쟁’이 벌어졌다. 가리봉 5거리(지금 가산디지털 단지)에서는 경찰이 학생들의 시위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위대가 20분간이나 도로를 점거했다고 한다. 학교에 나타나지 않는 선배들이 늘어갔다. 그들은 공장으로 ‘존재 이전’을 했거나 준비 중이었다.
자취방
한 선배의 자취방에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사회과학세미나를 했다. 우리는 그 방을 ‘팀방’이라고 불렀다.
혹시 ‘짭새’가 따라붙을까 봐 버스는 한 정류장 이전이나 이후에 내려야 했다. 그리고도 다른 골목으로 우회했다.
가파른 아스팔트길을 거의 끝까지 올라 나지막한 판잣집, 집 옆으로 황토가 부스러져 내리는 축대 밑을 지나, 재래식 화장실도 지나, 지붕 뒤로 산꼭대기가 같은 높이로 보이는 뒤채였다. 방 한 칸에 부엌에는 연탄아궁이와 낮게 달린 수도꼭지가 있었다.
다들 여자인 덕분인지 우리는 여름방학 중에 합숙훈련도 그 방에서 했다. 작은 방은 일동이 나란히 누우면 꽉 차고, 재래식 화장실에 오가는 다른 셋방 입주자들의 눈을 피해 문까지 처닫고 있어서 푹푹 쪘다.
선배들의 정성과 노력은 눈물겨웠다. 두 명이 지도를 전담하고, 나머지 선배들은 번갈아 와서 우리가 학습하는 동안 부엌에서 소리 죽여 밥을 해댔다. 냉장고도 없이 맛있는 것을 해먹이려고 뵙기 힘든 4학년 선배까지 식재료를 이고지고 나타났다. 우리가 할 일이라곤 해방의 역군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뿐이었다.
아침 먹고 발제와 토론, 점심 먹고 발제와 토론, 저녁 먹고 발제와 토론. 일정은 밤 9시까지이지만 진지한 토론은 11시나 되어야 끝났다. 그러고도 책을 더 보고 싶은 사람은 자유로이 잠잘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나는 일주일을 다 채우지 못했다. 열이 벌겋게 오르고 머리가 빙빙 돌고, 구역질이 났다. 병원에 가겠다고 나왔는데 큰 길에 다다르기도 전에 거뜬했다. 그래도 나는 돌아가지 않고 내 단짝 친구의 자취방으로 갔다.
술 먹다가 왜 울었는지는 모르겠다. 주정까지 들어주고 친구는 나를 남겨두고 세미나 하러 갔다.
그들
대답이 없어 신발 벗고 들어가니 마룻바닥에 두 남자가 곯아떨어져 있었다. 둘 중에 안경을 끼고 조금 나이들어 보이는 쪽이 목사님이리라. 그의 흰색 남방셔츠는 불룩한 배 위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호리호리한 쪽이 후배가 분명했다.
누가 먼저 잠들었건 간에 처음에는 이런 자세가 아니었을 것이다. 두 남자는 각자 뒤척이다가 얽혔다. 목사님은 양팔과 양 다리를 편안히 벌리고 똑바로 누워있는데 한쪽 팔이 후배의 한 팔에 걸쳐져 있었다. 그리고 후배는 그를 향해 옆으로 돌아누웠고, 다리 하나를 기역자로 구부려 정강이를 목사님의 다리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둘은 머리를 맞붙이고 하체로 갈수록 서로 벌어져 시옷자를 만들고는, 중간의 간격을 팔과 다리로 잇고 있었다. 말로 하기는 쑥스러운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자면서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로변인데도 차 소리가 뜸했다. 선풍기만 혼자 열심히 돌아갔다. 나는 두 남자를 깨우지 못하고 한쪽에 앉아 있었다. 졸업 후에도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교회에도 노동자들의 연극을 잠시 도우려고 온 터였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촉발된 1987년 민주화 대투쟁은 직선제 개헌이라는 결실을 거두었으나, 직접선거의 결과는 또 다른 군인 출신의 독재자였다.
시위 주동자들은 이제 높은 데 올라갈 뿐 아니라 몸에 시너를 끼얹고 불 붙여 뚝뚝 떨어져 내렸다.
학생 시절 방황하는 후배를 끝내 포기하지 않고 해를 넘기면서까지 연락하던 팀방 선배가 떠올랐다. 그는 혁명과 해방이 임박했다고 확신했고, 거기 내가 끼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그런 것을 빼더라도 그를 오래 만났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나는 들었다.
순간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사회과학 세미나나 시위를 피해 다녔건만, 그는 결국은 공장으로 갔다. 그리고 동구권 몰락 이후 소속됐던 조직이 와해된 뒤에도 남았다.
자신마저 떠날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지금까지 그는 선반 기술자로 살고 있다. 학생 출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큰 공장에 취직하지도 못하고, 평생을 노동조합도 없는 소규모 하청 공장들을 전전했다.
하지만 이런 친구는 드물다. 여자임에도 남산 안기부 지하에서 지독한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대자보에 났던 두 명은, 한참 나중에 늦깎이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둘 중 하나를 내가 우연히 길에서 마주쳐 들은 소식이다. 이후로는 어찌 되었는지. 시골에서 그의 어머니가 부쳐주신 김치의 절반쯤을 내가 축냈던 단짝 친구는 공장에 다니다가 여러 직업을 거쳐 종교인이 되었다. 나를 비롯해서 대개들 갈팡질팡 하다가 엉뚱한데 가있다. 이 세대의 행로가 눈밭에 발자국으로 찍혔다면 눈은 골고루 다져졌을 것이다. 생각의 지도에서마저 출발 때와 정반대에 가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어쩌면 오래 전 우리를 우리로 묶어주었던 것은 눈앞의 전선이었는지도 모른다. 해방구의 경계는 억압의 경계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그 속에서 하나라고 느꼈던 짧은 순간은 눈부셨다. 섬광처럼 번쩍 한 그 순간이 역사에서 열렸던 해방구였다. 해방은 오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화인으로 찍힌 그 기억으로 산다. 어떻게 살아내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광주가 고향인 내 친구는 1980년 계엄군이 들이닥치기 전까지 광주가 해방구였다고 말한다. 당시 여고생이던 그는 휴교 중이라 시내를 하염없이 걸어 다녔는데, 매우 조용했다고 한다. 너 나 없이 비극을 예감하면서 말없이 스쳐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꿈만 같고, 깨기 싫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