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라이따이한에 관한 거짓 혹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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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14일에 기자라고 자칭하는 일본인이 필자의 소설 『하얀 전쟁』에 관한 취재를 하겠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1993년에 일본어 번역판 『하얀 전쟁(ホワイト·バツジ, 光文社)』이 나온 바가 있고 해서 아마도 한국군 참전 50주년에 임하여 베트남에 관한 무슨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줄 알고 일단 집으로 오라고 해서 만났는데, 알고 보니 참으로 고약한 언론인이었다.
명함을 내놓기는커녕 이름조차 안 밝히면서 우선 자기는 “우익 성향의 잡지에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름을 모르겠으니 일단 빠가야로(莫迦野郞)라고 해두자. 빠가야로 기자는 그가 쓸 기사가 실릴 잡지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다. 하는 행동을 보니, 좀 심하게 과장하자면, 언론인이 아니라 무슨 닌자 간첩이나 첩자 같았다.
무책임한 인터넷 매체나 SNS를 이용하여 선동에 앞장을 서는 부류를 연상시키는 그의 노골적인 언행이 시작되었다. 빠가야로는 다짜고짜 “한국군이 베트남에 가서 양민을 학살한 얘기, 그리고 한국 군인들이 낳은 라이따이한 얘기를 아는 대로 다 해달라”고 떨이로 몰아서 주문했다. 자신이 세상에 알리려는 결론을 미리 내놓고 그 결론에 맞춰서만 취재하고 글을 쓰는 사람의 말투였다.
비판적인 보도가 아니라 악의적인 목적에 따라 일방적으로 왜곡하려던 빠가야로 기자는 취재 대상의 얘기를 듣는 대신 자기가 듣기를 원하는 말을 취재원에게 억지로 시키려고 집요하게 강요하는 그런 태도를 보였고, 한때 기자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수법을 잘 알았던 나는 “한국군의 양민학살 사례라면 내가 아는 바로는 전혀 없었다”고 떨이로 잘라 대답했다.
베트남전은 정규전이 아니었던 까닭에 본디 살상 수행 양상이 복잡하여 적과 양민을 구별하기 힘든 전쟁이었다. 베트남 공산 세력(越南共産, Vietnamese Communist)의 줄임말인 ‘베트콩(越共, Viet Cong, VC)’은 북위 17도선 비무장지대 남쪽에서 활동하는 비정규군으로서,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빨치산과 비슷한 조직이었다. 지리산 빨치산이 남한 전역으로 세력을 확산하여 수많은 시골 마을로 침투해서 촌락 단위로 항전하는 형태가 곧 베트남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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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베트남의 지령을 받는 민족해방전선은 마오쩌둥이 수립한 물과 물고기 유격전 전략을 따랐다. 양민은 강물이요 베트콩 전사들은 그 물에 물고기처럼 섞여서 헤엄치고 돌아다니며 활동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래서 베트콩은 북쪽의 월맹 정규군(North Vietnamese Army, NVA)과는 옷차림부터가 달랐다. 베트콩은 농부처럼 검정 작업복(calico noir)에 자동차 타이어를 잘라 만든 호치민 샌들로 위장했고, 그래서 소를 몰고 논을 갈던 농부가 삽을 던져버리고 어딘가 숨겨두었던 총을 꺼내 들고 항전하면 당장 적으로 둔갑했다. 당연히 그런 전투 상황에서는 오인 사살이 빈번할 수밖에 없었다.
유격전에서는 기회를 노리며 도망을 다니는 게릴라가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유리한 시간과 장소를 임의로 선택하여 산발적으로 공격을 주도하였다. 베트콩은 지역 주민들을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거나 겁을 주어서 제압하여 흡수하고 장악하기 위해 온갖 잔악한 학살 행위를 자행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 일본이 식민지 한국 청년들을 동원하고,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이 ‘의용군’을 잡아가던 것과 똑같은 수법이었다. 그래서 베트남의 아군으로서는 함께 섞여 생활하고 활동하는 적과 양민을 분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마을에서 작전이 벌어지면 아군은 며칠에 걸쳐 심리전 방송을 통해 양민들을 철수시켜 난민수용소에 따로 보호하며 부락에 남아 저항하는 베트콩을 토벌했다. 베트콩의 보복과 후환이 두려워 마을을 나오지 않고 적과 함께 남는 주민들은 억지로 끌려 다니는 동조자여서 어쩔 수 없는 희생을 당해야 했다. 적이 보기에 아군의 적은 그들의 동지였고, 적과 동조하는 양민이라면 아군은 적으로 분류했다. 민간인과 베트콩의 식별이 전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오인사살은 내전의 엄연한 한 부분이었다.
나는 1992년에 “베트남 통일의 영웅”으로 존경을 받는 전설적인 전략가 보 응우엔 지압(Võ NguyênGiáp) 장군을 하노이에서 만나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통일된 베트남을 종단하는 길에 과거 맹호부대의 TAOR(전술책임지역)이었던 빈딩성 떠이딩에 들러 이른바 “한국군의 학살이 자행된 마을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베트남 당국이 “전쟁의 피해자”라고 소개한 농민 응우웬 떤 런은 아무리 봐도 학살의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와 형은 공산 정권으로부터 자랑스러운 표창장을 받은 전사였다. 런의 형과 아버지는 한국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베트콩이었는지는 몰라도, 무고하게 학살된 양민이 결코 아니었다.
그의 집에는 정부에서 수여한 두 개의 표창장이 나란히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 큼직하게 적힌 ‘Tô QuôcGhi Công’은 필시 “조국이 공을 기리다(祖國記功)”라는 뜻이겠다. 그러니까 런의 가족은 한국군을 ‘학살’한 공산주의 애국자였다. 전시에 14살이었던 런도 나이를 다섯 살만 더 먹었더라면 틀림없이 베트콩 전사가 되어 맹호부대에 총질을 했으리라.
이런 전시 현실을 대충 설명한 다음 나는 빠가야로에게 ‘학살’의 정의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어떤 고상한 이념을 앞세우더라도 전쟁은 결국 영토를 장악하기 위한 정치 및 경제 활동이고, 모든 전쟁에서는 목적을 달성하는 궁극적인 수단 자체가 살육 행위다.
역사가 C. 노드코트 파킨슨의 시각을 따르자면 십자군 전쟁이나 카이사르와 나폴레옹의 정복, 그리고 역사적인 영웅들이 남긴 대부분의 업적 또한 대형 학살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학살은 일본군이 자행한 난징 대학살이다”라고 나는 빠가야로에게 설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군이 벌인 온갖 만행을 희석시키려고 “학살과 강간을 일삼았던 한국의 파월 장병들” 얘기를 완충제로 동원하기 위해 작심하고 찾아온 빠가야로의 속셈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듣고 싶은 얘기를 거의 듣지 못하고 인용할만한 자료를 얻지 못해 별로 소득이 없이 돌아간 빠가야로가 이튿날 전화를 걸어왔다. “그렇다면 <하얀 전쟁>에 등장하는 민간인 살해 장면은 실제 상황이 아니었느냐”고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알고 보니 그는 소설은 읽어보지도 않았고, 영화로만 작품을 접하고는 한국의 ‘반전소설 작가’로부터 베트남 참전병들의 만행을 극렬히 비난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 만나러 왔던 모양이었다.
나는 소설에 그런 얘기를 쓴 적이 없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집어넣은 내용이라면서 양민학살 얘기는 더 이상 나한테 물어보지 말라고 했다.
빠가야로는 그 다음 날에도 전화를 걸어와서, 어느 진보 신문사에서 펴내는 주간지에 학살 얘기가 자세히 실렸던데, 그건 어떻게 된 얘기냐고 물었다. 나는 그 기사를 읽어본 적이 없지만, 필시 공식적으로 베트남 정부가 우리나라에 제시한 외교 자료가 아니라 민간 설화 같은 소문을 왜곡하여 “수십만 파월 장병이 마치 베트남에 가서 아무 일도 안하고 양민들을 일부러 찾아 학살만 하러 돌아다닌 듯” 교묘하게 포장한 내용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을 피력했다.
베트남은 공산군이 통일한 국가다. 그런데 한때는 적국이었던 그들이 제공한 자료나 증언을 인용해서 우발적인 전쟁의 피해자를 마치 의도적인 계획 학살의 희생자라고 선전하는 사람들은 베트콩 쪽에서 자행한 주민 학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수십만 사상자 가운데 실수로 죽은 10명이나 100명의 사례만 골라 강조하여 마치 한국군 연인원 312,853명이 베트남에 가서 베트콩은 쳐다보지도 않고 양민만 골라서 죽였다는 식으로 침소봉대하여 악의적으로 선동 보도를 하는 사람들은 북한이 KAL기를 폭파하거나 아웅산에서 남한의 대통령을 죽이려고 했던 사건이 터졌을 때 일언반구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바로 그 사람들의 시각에 맞춰서 한국의 현실을 일방적으로 해석한다.
라이따이한에 대한 일부 언론의 고발 내용은 훨씬 더 희한하다. 빠가야로 사건을 언젠가 운동권 출신의 어느 출판인에게 얘기했더니 이런 분석을 했다. “한국이 종군위안부 문제를 하도 물고 늘어지니까, 너희들도 베트남에서 똑같은 짓을 하지 않았느냐고 희석시키려는 목적이겠죠.
헌데 한국 군인들 월남에 가서 양민을 집단으로 학살하고 라이따이한 수두룩 깔기고 왔다는 건 사실 아닌가요?” 이것은 물론 몇몇의 편향된 시각이다.
“한국인의 튀기”라는 뜻인 ‘라이따이한’이라는 혐오스러운 말이 널리 알려진 것은 SBS-TV에서 2007년에 <라이따이한의 눈물>을 방영하면서부터였던 듯싶다. 역사적인 사실에 무지해서인지 아니면 제작진에게 어떤 숨은 의도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라이따이한의 눈물>은 한국 기술자들의 파월 사실을 제대로 밝히지 않아 큰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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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방송이 나갔을 때는 전쟁이 끝나 한국군이 철수한 지 이미 34년이 흐른 다음이었고, 라이따이한이라는 말 자체가 전후에 생겨난 표현이었다. 이런 식으로 일부 언론 매체들이 교묘하게 유도하는 바람에 인터넷을 뒤져보면 “라이따이한 버리고 온 우리나라 군인들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식의 악성 댓글이 떠오르고 『시사상식사전』에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인”이라는 지극히 비상식적인 표현이 나온다.
“참전했던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군인들을 연상한다. 베트남에는 한국에서 군인들만 전쟁터로 보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박정희 정권은 한국군 병력의 파월을 빌미로 막대한 외화벌이를 위해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각종 건설 용역을 미국으로부터 받아냈다.
이때 송출된 인력은 돈벌이를 하러 간 기술자들이었다. 돈벌이 파견은 전투참여(參戰)가 아니다.
베트남에 주둔한 전투 병력은 55,000명이었고, 파월 기술자는 16,000명 수준이었다가 60년대 후반에는 해마다 20,000명 이상이 베트남으로 들어갔다. 주월한국군 야전사령부와 십자성부대 군수사령부가 주둔했던 휴양지 냐짱(Nha Trang, 芽莊)에 당시에 유명했던 여가수가 냉면집을 열었었다. 전우들과 함께 나도 그 집에 가서 냉면을 사먹은 적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돈을 벌려고 베트남에 간 다양한 민간인과, 사이공 야간업소에서 벌거벗고 춤을 추는 여성 연예인과 노무자들과 건설 기술자들은 외화벌이와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됐을지 모르지만 결코 군인이 아니었다.
<라이따이한의 눈물>에 등장하는 주요 내용은 바로 그런 민간인이 낳은 혼혈아 얘기였지, “라이따이한 버리고 온 우리나라 군인들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 범인은 아니었다. 베트남 쪽에서 흘러나온 비공식 자료에서 라이따이한 가운데 한국 군인이 낳은 아이가 10퍼센트 가량 되지 않겠느냐고 막연하게 추측했던 적이 있었다. 이렇듯 불확실하게 어림짐작한 미확인 수치를 기정사실화하여 역사적 증거로 삼는 추측 보도는 무책임하다. 민중을 선동하는 자료로 동원하는 표현은 대부분 막연하고, 추측 보도는 정상적인 언론이 저질러서는 안 되는 악행이다.
뿐만이 아니라 얼핏 보기에 SBS 특집에서 비극의 주인공으로 소개한 청년 혼혈아는 나이가 30살 정도로 보였는데, 그렇다면 1973년에 한국 병력이 완전히 철수한 다음에 한국인 기술자나 사업가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분명했다. 전쟁 중이던 60년대에 태어났으면 지금은 50대 중늙은이여야 하니까 말이다.
전시의 한국 민간인 기술자들은 현지 여성들에게 접근하기 쉬운 도시 지역에 거주했지만 군인들은 1년 복무 기간 대부분을 인가와 멀리 떨어진 중대전술기지에서 보냈다. 베트남 전술지역에서 복무한 전투병들은 한국에서와는 달리 휴가는 고사하고 외박조차 없었다. 휴가를 줘도 베트콩들이 준동하는 지역이라 마음 놓고 갈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인근 마을들은 낮이면 월남 땅이고 밤이면 베트콩이 잠입하여 들어와 지배하는 나라였다.
대부분의 ‘라이따이한’은 도시 태생이다. 전투 병과의 군인들이 현지처를 두고 아이를 낳으려면 영외 거주가 필수적이다. 연대 본부 수준의 상급 부대에 근무하는 장병들은 그나마 인근 마을로 주간에 외출 정도는 가능했지만, 그런 호사는 전투병들에게라면 해당이 되지 않는 얘기였다. 나는 백마부대 사단사령부에서 근무했지만, 단 한 번도 1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인근 읍내 닝화(Ninh Hòa, 寧和)에조차 목숨을 건 저녁 외출을 나간 적이 없었다. 다른 전우들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파월 전투병들은 밤이면 밤마다 청음초를 나가고 불침번을 서야 할 뿐만 아니라, 한두 주일짜리 작전을 119 소방대원 출동만큼이나 자주 나가야 했고, 사단규모의 작전이 벌어지면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밀림에서 나오지를 못했다. 그래서 병사들은 기껏해야 연대 단위로 부대 근처 바닷가에 철조망을 둘러친 속에 천막 몇 개를 지어놓은 휴양소에서 군인들끼리 수영이나 배구를 하며 당일치기 한나절 보상 휴식을 취하는 정도였다.
전투지휘관들 역시 전술 기지에서 살며 정글 속을 헤매고 돌아다니면서 목숨을 걸고 전투에 바빴을 뿐, 중대장 정도라면 사이공은 구경조차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전쟁하는 군인들은 한 지역의 소탕이 끝나면 적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데, 언제 그들이 도시에 나가서 베트남 여자들과 살림을 차리고 라이따이한을 낳았다는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나라 동부전선 OP나 GP에 1년쯤 근무하는 병사들이 속초나 강릉 여자들과 살림을 차리고 자식을 줄줄이 낳고 도망친다는 식의 이런 주장을 믿어주는 사람들의 상식 또한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경제적인 부담 또한 전투병들에게는 라이따이한을 생산하는 데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었다, 나는 병장 시절에 전투 수당을 한 달에 38달러씩 받았고,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을 “외화를 획득하여 국력을 키우자”는 국가 정책에 따라 강제로 한국에 송금했다. 병사들은 얼마 안 되는 나머지 돈을 푼푼이 모아 PX 면세점에서 GE 냉장고나 RCA 텔레비전이나 아카이(Akai) 녹음기 따위의 전자 제품을 기껏해야 하나 정도 구입했다. 한국으로 가져가 팔아서 ‘한밑천’ 잡아 제대한 다음의 생활 기반을 마련하려는 목적에서였다. GNP 2만 달러가 어쩌고 하는 요즈음 사람들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겠지만 그것이 GNP 62달러였던 당시의 한국 현실이었다.
반면에 돈을 잘 버는 기술자들은 현지처를 얻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집단이었다. 몇 십 년 전쟁이 계속되는 사이에 베트콩과 월남군 양쪽으로 끌려 나가 자꾸 죽어 남자들이 절대 부족하던 당시 베트남에서는 웬만한 시골 경찰관만 되어도 경제력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 ‘아내’를 두셋씩 두기가 보통이었다. 여러 여자를 구제해준다는 박애주의정신에서 이슬람의 일부다처제가 생겨난 원인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라이따이한의 아버지들이 보여준 행태를 정당화할 만큼 전혀 떳떳하지 못한 참으로 비극적인 사실이기는 하지만, “돈을 잘 번다”고 한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던 해외기술자들은 그만큼 기회가 많았던 셈이다.
1991년에 영화 <하얀 전쟁>을 촬영하러 제작진과 함께 베트남에 갔을 때 정기평 기자를 비롯한 MBC-TV 동행 취재진과 나는 호치민에서 어느 은행 지점장으로부터 저녁식사를 대접받았는데, 그는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으로 왕성하게 진출하면서 현지 여성과 살림을 차리는 남자들이 갑자기 늘어나 라이따이한 때문에 창피하고 걱정스럽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영화 촬영에 필요한 관공서 업무에 관하여 제작진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호치민의 젊은 사업가 역시 서울에 가족을 두었지만 사무실에서 비서로 일하는 젊은 미망인을 현지처로 삼은 한국 남자였다. 그는 “젊은 사람이니까 좀 이해해 주십쇼”라며 씩 웃었다. 나는 그의 젊은 혈기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따지고 보면 그런 이중생활 불륜문화 행태는 서울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다반사 현상이었기 때문에 같이 웃고 넘어갔다.
혼혈아들은 정상적인 ‘국제결혼’을 통해서도 태어난다. 한국에서 배우자를 구하기 힘들어 애를 먹던 농촌 총각들이 언제부터인가 국제결혼 중개업자들의 도움을 받아 동남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때로는 인신매매 비슷한 농간이 끼어들어 바람직하지 못한 부작용들이 자꾸 생겨나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제 다문화 가정은 우리 사회의 엄연한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백의민족 단일민족”의 우수성을 부르짖던 쇄국주의 시각은 근친결혼의 열등성 이론과 상쇄되었고, 혼혈아에 대한 편견이나 도덕성 논란 또한 많이 사라졌다.
국제결혼이나 “국경을 초월한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모조리 비극의 씨앗은 아니다. 그리고 베트남 여인들은 한국 남자를 안 만났더라면 과연 얼마나 더 행복했겠는지를 이론적으로 따지는 일도 부질없는 짓이고, 우리나라에서 한국인끼리 결혼하더라도 파탄을 맞아 불행해지는 사례 역시 부지기수다.
그런데 거의 다 돈벌이 노무자들이 남긴 라이따이한을 몽땅 군인들이 줄줄이 낳아 내버리고 오기라도 한 듯 50년이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온갖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부 언론과 선동적 여론이 노리는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그런 쪽으로 군중의 인식을 유도한 사람들은 누구였으며, 그로 인해서 창궐하는 유언비어로부터 덕을 보는 사람들은 또 누구였을까?
아무리 정치적인 목적도 좋고 이념 투쟁도 좋지만,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여론을 유도하고 왜곡해야만 했던 필연성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슬프지만 우리 민족이 지정학적으로 꼭 거쳤어야만 했던 통과의례와 성장통 노릇을 한 역사적인 현실이었다.
‘미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라며 참전병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용병론자들은 과연 국가의 수호와 건설을 위해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전쟁터를 다녀온 무고한 30만 명의 가슴에 못을 박는 언론의 학살 행위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나는 312,853명의 참전병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는 분명히 “다 똑같은 놈들” 가운데 1인인데, 학살은 한 적이없고 라이따이한을 낳지도 않았다. 그리고 베트남을 다녀온 312,853명 가운데 학살을 안 하고 라이따이한을 안 낳은 사람은 무척 많다.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5,000명 전사자와 육체적인 상처를 입고 돌아온 전상자 8,000명 중에도 무고한 사람은 수두룩하다.
빠가야로가 사흘째 전화를 걸어와서 “마감이 다 되었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듣고 싶다”면서 “언론사에 난입한 전우회의 폭력행위에 대하여 한 마디만 해달라”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나는 “그건 난입한 게 아니라 항의 방문이었을 거다”라고 말했다. 스스로 애국자라고 자부하는 30만 명을 누군가 자꾸 불량 세력으로 몰아대며 공격하면 당연히 그들로서는 반격과 변명의 필요를 느꼈겠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한국전쟁 직후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상이군인들의 행패’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라며 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렸었다. 그들은 요즈음 ‘동네조폭’처럼 장바닥 점포나 업소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달라고 행패를 부려 골칫거리가 되었다.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다가 평생 불구자가 되었지만 정부가 제대로 돌봐주지 않던 열악한 환경에서 그들이 자행한 폭력과 행패는 협박성 강매 정도였다. 그것은 좀 과격한 구걸 행위였으며, 나는 스스로 전쟁터를 다녀온 다음에야 상이군인들의 ‘속상한 심정’이 이해가 갔다.
‘따이한 용병들의 50년 전 행적을 박살내고’ 싶었을 빠가야로는 나를 “정말로 말이 안 통하는 답답한 수구 꼴통”이라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는지, 아니면 기사의 마감이 지나서였는지 몰라도, 더 이상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빠가야로가 무슨 기사를 어디에 어떻게썼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가 한 말을 문장 째로 온전히 인용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유리한 몇몇 단어만 골라가며 일방적인 논조로 엮어 어떤 새로운 거짓된 진실을 창출했을 듯싶다. 유언비어로 선동을 일삼는 통신 전략의 기본적인 기법이 흔히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니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