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폭설 속에 새긴 궁핍한 시절의 꿈 하나
글 곽재구_시인,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954년생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서울 세노야』 『와온바다』,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포구기행』 『우리가 사랑한 일초들』
『길귀신의 노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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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의 초겨울 나는 한국 국적을 지닌 사내로서 군 입대를 하게 되었다. 입대하기 전날 큰 눈이 왔다. 무등산 정상에 하얗게 쌓이던 눈이 종래에는 광주 시가지를 다 덮었다. 화이트 아웃이 되어 주위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 즈음 군대를 간다는 것은 생의 모든 의미를 절망에 맡기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날 나는 눈길을 다섯 시간 걸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발은 거리의 모든 풍경을 지웠고 어느 순간 내일이면 논산 훈련소로 들어가야 하는 마음의 절박함까지 다 지워졌다.
그 무렵 나의 꿈은 하루 86,400초를 온전히 시에 바치는 것이었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한 초 한 초들을 다 기억하고 사랑하는 것. 어떤 초는 무슨 빛깔을 하고 무슨 목소리를 지녔으며 어떤 초는 누구의 시와 영화를 좋아하는지, 무슨 음악을 듣고 어떤 산과 바다와 절망을 여행하였으며, 어떤 고통과 궁핍에 맞서 싸웠는지, 그 내력을 속속들이 이해한 뒤에야 내가 진실로 쓰고 싶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자취방을 구할 돈이 없어 이 집 저 집 떠돌며 지냈던 그 시절 나는 시를 원고지나 노트에 적지 않았다. 길 위에서 하나의 이미지들이 찾아오면 그것을 기억 속에 저장하였는데 그 기억의 곳간을 채워가는 것이 그 무렵의 내게 제일 큰 기쁨이었다. 어떤 시는 두 줄, 어떤 시는 일곱 줄 어떤 시는 열 줄 어떤 시는 마지막 한 줄을 남기고 기억 속에 머물러 있었는데 맨 마지막 줄이 완성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습작노트에 옮겨 적었다. 어떤 시는 일주일, 어떤 시는 삼주일, 어떤 시는 한 달 혹은 세 달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당연히 내가 쓴시는 모두 암송할 수가 있었다.
이 무렵 내 기억의 곳간에 가장 오래 머문 시 한 편이 있었다. 그 시는 한 해 전 겨울부터 마음 안에 머물고 있었던 이미지였는데 폭설 속을 걷는 동안 미완성의 부분들이 날개를 달았다.
그날 저녁 시를 쓰는 몇몇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입영 파티를 해주었다. 막걸리와 소주에 토끼탕이 곁들인 파티였다. 그즈음의 입영 파티가 늘 그렇듯 우리는 절망과 탄식 속에 눈물 섞인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지하의 시 「푸른 옷」을 함께 읽기도 했다. 그 파티에서 나는 낮의 폭설 속에서 썼던 시를 낭송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군에서 돌아와 복학했을 때 내가 처음 몰입한 일은 그해의 신춘문예 준비였다. 6월에 제대하여 12월 초까지 신춘문예에 대비한 시들을 썼다. 부끄럽지만 이 일은 내가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부딪쳐나간 내 생애 최초의 일이기도 했다. 눈 떠서 다시 감는 순간까지 시 이외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12월이 되어 나는 동무 나해철에게 응모할 시들을 보여주었는데 아주 쓸쓸한 목소리로 당선될 것 같구나, 라고 얘기했다. 1979년 말이었고 그해의 신춘문예에 해철의 예상은 빗나갔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친 뒤의 절망과 무력감은 컸다. 다음해 5월 광주 항쟁이 있었다. 시란 무엇인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생각할 수 없는 절망의 시간들이 찾아왔고 그 해 난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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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2월 초 전남대학교 대학촌의 작은 골목길을 걸어가던 나는 함께 시를 썼던 한 친구와 만났다.
그가 대뜸 신춘문예 응모했는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신춘문예는 모든 문학 청년의 의무이네. 응모하게.” 그의 말이 가슴을 후볐고 그날 저녁 나는 무등산의 사천김씨 제실에 들어가 지난해에 썼던 시편들을 하나하나 풀어쓰기 시작했다. 눈이 펑펑 내리던 밤이었다. 지난해 응모한 작품들이 관념과 고통과 수사의 보여주기 식 축제였다면 그 모든 것들을 지극히 현실적인 이미지로 바꾸어 나갔다. 그렇게 아홉 편의 시들을 정리했고 그중 다섯 편을 한 신문사에, 나머지 시편을 중앙일보에 응모했다. 중앙일보에 응모하며 한 편을 더 붙여 다섯 편을 응모했는데 그 마지막 덧붙인 시가 「사평역에서」였다. 눈이 무릎까지 쌓인 무등산 길을 12km 걸어 내려와 광주우체국에서 등기를 부쳤다. 그뿐이었다. 그해 난 내가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으며 더부살이를 하던 외삼촌 집 전화로 당선통지가 왔을 때 나는 전화의 내용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곽재구씨 맞죠?
신춘문예에 응모하셨죠?” 기자가 거듭 물었을 때 비로소 내가 신춘문예에 응모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사평역에서」는 신춘문예를 준비하며 쓴 시가 아니었다. 하루 86,400초를 온전히 기억하고 싶었던 시절, 1970년대 중반의 암울한 현실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노래한 시였다. 당선 소식을 들은 나해철이 내게 ‘이제 난 어떡하지?’ 라고 울먹이던 순간도 기억에 남는다. 그해 그는 그 힘든 수련의 생활을 하며 시를 썼고 그 시편들이 다음해 동아일보의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시가, 인생이 무엇인지 알기 이전에 자신이 진실로 사랑했던 시간들에 매진했던 젊은 날들의 꿈이 빚어낸 한 폭의 그림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