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레드 콤플렉스
글 구효서_소설가. 1957년생
소설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늪을 건너는 법』 『비밀의 문』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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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음탕했다. 10대였는데, 10대라면 음흉하다거나 엉큼하다는 말이 좀 더 어울릴 법했겠으나, 얘는 아니었다. 음탕했다. 20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얘는 그렇게 고백한다.
가난해서 얘는 자기 방을 가져보지 못했다. 제 방에 제 책상을 가진 애들이 주변에 없었다. 그건 텔레비전에나 나오는 얘기였다. 얘가 살던곳은 구로동이었고, 그곳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도시 빈민을 위해 비탈에 지어준 공영주택이 있었다. 조립식 단층 콘크리트 단지였다. 576호에서 299호로 이사하며 10대와 20대 전반기를 보냈다. 그나마도 전세였다.
창문의 높이가 사람의 어깨 높이였다. 그 창문으로 찹쌀떡 장수에게 찹쌀떡을 샀다. 팔을 올리거나 발꿈치를 들 필요도 없이 그냥 손만 뻗으면 찹쌀떡을 팔고 살 수 있는 높이였다. 그런 집에 다락방이 있을 턱이 없었는데 있었다. 그러니 방이랄 것도 없었다. 지붕과 천장 사이의 틈이었다. 어둡고 은밀한 틈. 굳이 방이라고 하자면 ‘틈방’쯤 될까. 얘는 그곳에서 음탕했다.
그곳 벽에 쥐구멍 같은 게 하나 있었는데, 가까이는 개봉동이, 멀리는 오류동 산이 내다보였다. 구로동과 개봉동 사이에는 철길이 있었고 가끔 디젤 기관차가 달렸다. ‘철도길 건너 산을 넘는 들길엔 먼 기적소리만…….’ 이수만의 <모든 것 끝난 뒤>의 가사와 똑같은 풍경이었고 얘는 그래서 그 노래를 곧잘 불렀다. 하지만 노래는 이것저것 짬뽕이 되다가 언제나 김추자로 끝났다.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그대 오기를 기다려 봐도 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애 낳긴 다 틀렸구려…….’
이것은 얘의 ‘노가바’가 아니었다. 남자 애들 다 그렇게 불렀다. 공영주택 사는 애들 거의 다. 김추자의 노래였기에 나도 애들도 더 좋아했다. 김추자가 누구인가. 얘는 김추자라면 말문이 막힌다. 김추자의 옷, 김추자의 붉은 벨트, 김추자의 손가락, 김추자의 입술, 김추자의 엉덩이, 김추자의 허벅지, 김추자의 허스키, 김추자의 서늘함, 김추자의 외침, 김추자의 흔듦…….
얘뿐만 아니라 하여튼 남자 애들 다 말문이 막혔다.
막히는 순간 안에서는 뭔가 미치도록 파열했는데, 미치지는 못하고 미치겠다는 말만 자꾸 자꾸 뱉었다. 얘는 이수만, 사월과 오월, 트윈폴리오, 이장희의 노래를 통기타의 Am Dm E7에 맞추어 부르다가 결국엔 언제나 김추자의 ‘크어피 한 좐을 시키어노크어’로 마치며 으으으, 미치겠네……. 진저리쳤다.
틈방에서 얘는, 야설이라는 것의 국내 기원인 ‘빨간책’ 장르의 소설을 썼다. 교실에서 유통되는 빨간책의 수량은 터무니없이 적었고 노는 애들 우선으로 돌다가 유실되는 경우가 많아서 찌질한 얘한테까지는 순서가 오지 않았다. 겨우 온다는 것이 찢어지고 나달나달한 ‘꿀단지’ 몇 페이지였다. 얘는 그나마도 다 보지 못했다. 그 귀한 것을 돌려보지 않고, 잃어버렸다고 ‘구라’치면서 개인 소장해 버리는, 정말 치사한 놈들이 많았다. 얘는 하루 종일 그런 책만 읽는 행복한 사람을 꿈꾸고, 그런 책을 만드느라 매일 황홀한 활자를 뽑는 을지로의 문선공들과 인쇄공들을 상상하다가 마침내 직접 쓰고 읽는 자급자족의 완전 체제를 떠올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밖에서는 지하철 1호선이 완공되고, 대통령 부인이 공산주의자라고 알려진 23세의 청년 문세광이 쏜 총에 쓰러지고, 대학생 유학생 빨갱이들이 우루루 잡혀가고, 긴급조치라는 것이 연예인 앨범처럼 줄줄이 발령되었으나, 얘는 틈방에 틀어박혀 《선데이 서울》, 《주간경향》을 보며 체위를, 《야담과 실화》, 《명랑》을 보며 테크닉을 터득했고 마침내는 고우영의 『수호지』와 배금택의 『고금소총』을 보며 이야기에다 화사한 컷까지 가미하는, 작가와 독자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빨간소설 창작에 기염을 토했다.
그때 이미 얘는 이런저런 주간지나 월간지의 독자고민 란에 등장하는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라든가, ‘정을 통했다’라는 구태의연하면서도 뻔뻔하게 반복되는 문장에 화를 내고 있었다. 그것은 일찍이 동시상영 극장 변소에서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친구는 없고 친구 누나만 있었다……’는 따위의 진부한 스토리를 거듭 접하고 ‘빈정’이 상했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일이었다. 그런가 하면, 대통령이 나서서 ‘국민총화’라는 명분으로 얘가 좋아하는 가수들을 대마초에 엮어 후려칠 때도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아아아아. 국민도 거짓말 총화도 거짓마알……’
하고 분노했었다. 얘가 좋아하지 않았던 가수를 빼더라도 대마초 때문에 ‘낙엽처럼 가버린 사랑’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김인순, 이수미, 장현, 윤형주, 김세환, 신중현, 김도향, 하남석, 별 하나에 김정호, 별 하나에 이장희, 별 하나에 조용필, 별 하나에 김추자 김추자.
그러면서 맘에 안 드는 노래를 금지시키고 맘에 안드는 가수 이름을 바꾸게 했으며 맘에 안 드는 정치가를 가두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느냐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방송금지 시키고, 영원한 여름 곡 <해변으로 가요>를 부른 키보이스를 열쇠 소년들이라 바꾸게 했다. 그리고 얘는 틈방에 엎드려 자칭 한 단계 진화된 문장과 구성으로 야하기 그지없는 소설을 휘몰아 쓰고 외설적 포즈의 노골적인 부위에 붉은 색을 마구 덧칠했다. 그 색깔은 틈방의 눅눅한 어둠과 강렬하게 대비되면서 어린 청춘의, 이면의 붉은방이 되어갔다.
틈방에 처박혀 움직이지 않는 얘를 이따금 바깥으로 밀어낸 것은 어머니였다. 여러 권의 노트로 이어지던 은밀한 빨간 소설 시리즈가 어떤 날은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스스로 이탈해 자리를 슬쩍 바꾸었는데, 그것이 어머니의 기척 혹은 위협이었음을 깨닫고 얘는 얼굴이 뜨거워 당분간 틈방을 드나들지 않았다.
틈방 바깥에서라면 겨우 2본동시상영관의 <흑녀>와 <화녀> 같은 작품을 몰래 보는 거였다. 양정화와 윤여정의 연기는 정말, 두말할 것 없이, 얘를 압도했으며, 특히 검은 브래지어 차림으로 쇠사슬에 묶여 학대당하는 양정화의 연기는 얘의 빨간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주간지에 제공되는 김수미(나중에 일용엄니가 되는)의 비키니 브로마이드에 만족을 못하고 세운상가를 기웃거리면서 “책 찾아?”라고 묻는 아저씨에게 《플레이보이》와 《팬트하우스》를 샀(던 것은 딱한 번이었고-비쌌다-그 뒤로는 ‘꿀단지’ 경우처럼 조각난 페이지를 돌려 보았)다.
틈방을 벗어나 때로는 동네의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관으로 틈입하고 멀리는 세운상가와 문래동을 거닐기도 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밖이 아닌 안으로의 도망이었고, 어둡고 쓸쓸했으며, 그마저도 ‘당분간’이었다.
어린 청춘도 당분간처럼 그렇게 가려는지 70년대 마감을 앞두고 얘는 군에 갔고, 그곳에서 대통령의 피살 사태를 맞았고, 그때부터 연일 이른바 준비태세였다. 전투화를 신은 채 잠이 들고 잠에서 깼다. 부마항쟁, 10·26, 12·12, 5·18 등 별의별 어지러운 일을 겪으며 남침을 대비한다고는 했으나 당시의 느낌으로는 병영 밖이 모두 빨갱이 천지 같았다. 얘가 부대 안에서 했던 훈련도 혹독한 ‘폭동진압훈련’이었으니까.
5공 정부가 주는 국난극복기장을 예비군복 가슴에 달고 전역하던 날 몇몇 전역 동기들과 술 한 잔 하고 화신백화점 옆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한다는 극장에 들어갔다. 그런 공연도 더는 구경할 수 없다던 동기의 말에 뭉클해져서 갔던 것인데 좌석은 거의 비어 있었다. 여남은 명의 무희가 영화가 시작되기 전 무대에 올라 지친 다리를 들어 올리며 사이비 캉캉춤을 췄다.
아, 얘는 술이 확 깼다. 다리를 들어 올릴 때마다 어둡게 드러나는 빨간 사각 팬티가 서글펐던 것이다. 그렇게 얘의 붉은 청춘의 시대도 지나고 있었다. 그닥 젊지 않은 무희들의 빨간 팬티와 춤을, 예비군 여남은명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피고 또 지는 꽃잎처럼…….’ 극장을 나설 때 그 노래가 흘러나왔었는지는 모르지만 김창완이 그 노래를 불렀던 것은 얘가 전역했던 1981년이 분명하다. 한 시절도 지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극장을 나왔을 때 얘가 다시 돌아갈 틈방 따위는 없었다. 한때 어떤 것에서의 도피처였고 위안의 소도(蘇塗)였다고 믿었던 틈방은 해방구가 아닌 게토였다. 그리고 얘의 10대와 20대에 여지없이 음탕했던 것은 시대였다. 얘는 그 시대의 어둡고 은밀한 틈이 아니었을까. 그 틈을 더듬고 들여다보며 과연 나는 김추자처럼 온몸으로 새로이 그때를 노래할 수 있을까. ‘크어피 한 좐을 시키어 노크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