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디지털 현실 속에서 구원과 신성을 성찰하다

라이따이한에 관한 거짓 혹은 진실

삶의 주인이 되는 길

선택과 배제를 넘어서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책상은, 책상이다?

운명, 미워하지 않는다

폭설 속에 새긴 궁핍한 시절의 꿈 하나

빈자리

신촌, 유령이 떠도는 거리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詩샘

판의 미로 데자뷰

밤에 듣는 밤 이야기

뻐끔담배 우산을 꽃이라 불러보는 오후 새들은 어디서 날아오나 시간을 담는 용기 흔해빠진 자살 여행

다시 읽는 우리 문집

‘꼭 죽어야 할 상황’을 준비하다

글과 사진 조운찬_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장. 1963년생

황현의 『매천집』

1. 두 개의 「구안실기」

『매천집』을 집어든 것은 지난 호에 소개한 『운양집』에서 「구안실기(苟安室記)」를 읽고 난 뒤였다. 「구안실기」는 운양 김윤식이 매천 황현의 서실(書室)에 부쳐 써 준 글이다. 여기에는 이 글을 쓰게 된 내력이 나온다. 1902년 가을, 구례에 살던 매천은 지도(智島)로 유배 온 운양 김윤식을 찾아간다. 매천은 당대의 문장가인 운양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으나 한양까지는 올라갈 염두를 내지 못하다 운양이 전라도로 유배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 서너 명과 함께 그의 적거지를 방문한 것이다. 당대 최고 문장가였던 두 사람의 회동은 만나자마자 불꽃이 튀었다. 역사를 논하고 성현의 언행을 이야기했다. 고금 인물들의 시와 그림을 품평하기도 했다. 첫 만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오랜 지기를 대하듯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매천은 운양의 적거에서 이틀 밤을 묵으면서 토론했다. 저녁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촛불의 심지가 여러 차례 타 버릴 정도였다. 작별할 즈음에 매천은 서실에 대한 기문(記文)을 청한다. “제가 돌아가서 제 집에 누울 텐데 벽 위의 글을 보는 것으로 촛불 심지를 잘라가며 대화하던 일을 대신할까 합니다.” 매천의 말에 운양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대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슬며시 청이 있기를 바랐습니다”라며 즉석에서 허락했다. 당시 매천은 광양에서 구례로 이사와 백운산 아래 만수동(지금의 구례군 간전면 수평리)에 살고 있었다. 1886년에 만수동에 터를 잡았으니 벌써 16년째다. 스스로 지은 세 칸짜리 초가를 ‘구안실’이라 이름 짓고 손수 기문을 지었다. 매천은 ‘구안실’의 당호를 『논어 구절 ‘이만하면 충분히 갖추었고 이만하면 충분히 훌륭하다(苟完苟美)’와 ‘군자는 일상생활에서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다(君子居無求安)’에서 각각 ‘苟’와 ‘安’을 따 지었다.

구안실의 기문을 요청받은 운양 김윤식은 육신을 편안히 하고 마음을 게을리 하는 것은 천한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며 매천에게 초야에 머무르지 말고 과거에 응시해 세상을 구제하라고 충고한다. ‘구차하게 편안한(苟安)’ 삶은 소인이나 하는 일이니 ‘구안실’에서 뛰쳐나와 중앙 무대인 한양으로 진출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매천은 ‘불의하면서도 부귀한 것은 내게 뜬구름과 같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구차하게 얻어도 걱정이 없는 것은 초가집을 짓고 시골 사람들과 사는 것일 뿐”이라며 반박한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는 큰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고 시골에 은둔해 사는 게 자그마한 편안함이라도 누릴 수 있다는 얘기다. 매천의 응수에 운양은 “내 일찍이 그대의 말을 듣지 못한 게 안타깝구나. 어떻게 그대를 따라갈 수 있을까”라며 「구안실기」를 지어 건넨다. 매천은 이보다 12년 빠른 1890년 「구안실기」를 지었다. 『매천집』에 실려 있는 「구안실기」는 운양이 쓴 것과 크게 대비된다. 매천이 ‘군자는 일상생활에서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편안함을 해석했다면 운양은 그것을 세속적인 부귀와 행복으로 이해했다. 『논어』의 구분을 따른다면 매천은 군자이고 운양은 소인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헤어진 뒤 취한 행보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종신유배형을 받았던 운양은 1907년 사면돼 풀려난다. 송병준을 비롯한 일진회의 간청과 조정의 70세 이상 고령자에 대한 해배 조치 때문이었다. 이후 운양이 걷는 길은 《대산문화》 전 호에 소개된 그대로이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듬해 중추원 의장에 임명됐고, 한일합병 두 달 뒤에는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반면 매천은 운양을 만난 그해 겨울 화엄사 입구의 월곡 마을로 이사한 뒤 더욱 맹렬한 ‘시대의 증언자’가 된다. ‘차지호리 류이천리(差之毫厘，謬以千里)’라는 옛말이 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은 것 같으나 나중에는 큰 차이가 생긴다는 뜻이다. 매천과 운양의 경우가 이에 해당할 수 있겠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날 때만 해도 밤 새워 역사와 사회 현안을 함께 얘기할 정도로 큰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두 사람은 이후 친일과 순국이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나는 그 단초를 두 개의「구안실기」에 보이는 ‘편안함(安)’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보았다. 한 글자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2. 매천, 죽음을 응시하다

매천 황현(1855~1910)이 살았던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은 우리 역사의 허약함을 극명하게 보여준 시기였다.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외세들이 다투어 강토를 유린했다. 안으로는 세도정치의 탐학에 항거한 농민들이 왕조를 뿌리부터 뜯어고칠 것을 요구하며 일어났다. 조선의 남쪽 끄트머리에서 태어난 매천은 과거 1차 시험에는 합격했으나 요지경 속의 사회를 목도하고는 서울 생활에 미련을 접었다. 대신 그는 남도 땅에 머물며 역사의 기록자로 남고자 했다. 서울에서 천 리나 되는 궁벽진 곳이었지만 그는 서울의 지식인보다도 더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세상을 관찰했다. 매천이 태어난 곳은 전남 광양이었지만 주로 활동한 곳은 인접한 구례였다.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가 그의 활동무대였다. 시골에 살았으면서도 한양뿐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중앙에서 활동했던 글벗들 덕분이다. 매천은 당시 김택영, 이건창, 강위와 같은 내로라하는 문인들과 교유했다(이들 네 명을 한말 문장 4대가로 부른다). 편지를 주고받았을 뿐 아니라 서로를 방문하고 함께 금강산이나 영남 등을 유람하기도 했다. 「구안실기」에 보이듯 처음 매천은 시골에서 책 읽고 작은 농사를 지으며 촌로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안빈낙도의 길을 원했다. 20~30대 지은 시 가운데 시골 생활과 지리산 일대의 산천, 사찰 등을 읊은 자연시가 많은 것은 이를 입증한다. 물론 거북선을 노래한 「이 충무공 귀선가」처럼 역사의식을 드러내는 시도 없지는 않다. 매천은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던 1894년을 전후해 사회 현실에 본격 눈을 돌리게 된다. 시에서도 시대를 걱정하는 ‘우국시’가 많이 등장한다. 처음에 매천은 『동비기략』을 쓰면서 동학을 동비(東匪)로 규정하는 등 봉건의식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다. 의병에 대해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매천야록』을 집필하면서부터 시국을 깊고 정확하게 바라보게 된다. 1895년 4월부터는 『오하기문』 저술에도 나선다. 4권으로 된 국역 『매천집』은 시 3권, 산문 1권으로 시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산문의 주제가 대부분 『매천야록』 같은 야사류에 들어갔기 때문으로 보인다. 『매천집』에는 1877년부터 1910년 자결 직전에 쓴 절명시에 이르기까지 838수가 연대순으로 실렸다. 「구안실기」가 실린 4권에는 묘지명, 제문, 상소문, 전기 등이 묶였는데, 강겸, 학이태 등 중국인들이 쓴 서문과 발문이 몇 편 포함돼 있다. 『매천집』이 중국 상해(上海)의 북쪽 남통(南通)이라는 이역에서 간행된 특별한 사연 때문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매천집』의 하이라이트는 절명시 4수이다. 이 가운데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회고해 보니 /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秋燈掩卷懷千古難作人間識字人)’라는 구절은 오늘날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와 관련해 많이 인용되는 대목이다. 절명시는 매천 자신의 죽음을 읊은 것이지만, 『매천집』에는 당대 인물들의 죽음을 기록한 글이 유난히 많다. 이 점을 눈 여겨 본 김택영은 황현의 ‘본전(本傳)’에서 “고금인(古今人)의 순절한 일을 읊은 시가 매우 많은데, 이것들은 모두 충정을 남김없이 토로하여 비통함을 극도로 표출하고야 말았으니, 천성이 절의를 더없이 좋아한 이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기록했다. 절의를 좋아한 천성으로 인해 의로운 죽음을 심상하게 보아 넘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천은 타인의 죽음을 기록하며 자신을 성찰했다. 『매천집』에는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挽詩)’가 53편이나 실려있다. 특히 존경하는 인물이나 남다른 인연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수(首)의 추도시를 남겼다. 문우였던 추금 강위에게는 「곡(哭)추금선생」이라는 제목으로 4수를, 면암 최익현에게는 「곡면암선생」 6수를 바쳤다. 또 을사늑약 때 순절한 민영환, 홍만식, 조병세, 최익현, 이건창을 기리는 장편의 「오애시(五哀詩)」를 남기기도 했다. 죽음을 성찰하려는 태도는 인물의 전기에서도 읽을 수 있다. 「천우현의 일을 기록함(書千禹鉉事)」이라는 글은 매천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구례현감 천우현이 화약심지를 안고 분사할 각오로 혼자서 관내의 한 성을 지켜냈다는 이야기인데, 매천은 이를 통해 죽음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을 돌파하는 최상의 수단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행히 천우현은 죽음을 면했지만, 매천은 그를 순절자 이상으로 평가했다. “만약 한 몸을 헛되이 버리는 것을 수치로 여겨, 경중과 이해를 따지고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헛되이 죽지 않으려 한다면, 꼭 죽어야 할 상황이 되어도 죽지 못할 것이다.” 이 글을 읽다보면 매천이 ‘꼭 죽어야 할 상황’을 준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매천의 순국은 우연이 아니고 준비된 필연의 사건이었다.

3. 또 하나의 구안실기

『매천집』을 간행한 김택영의 문집 『소호당집』에는 「역구안실기(亦苟安室記)」라는 글이 있다. 말 그대로 ‘또 하나의 구안실기’이다. 매천 황현의 제자 오병희의 부탁을 받고 써 준 기문이다. 오병희는 스승이 떠난 뒤 폐허로 변한 만수동의 구안실터에 다시 집을 짓고 ‘역구안실’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택영은 오병희 역시 매천 못지않은 ‘열사의 마음’을 지녔다며 그를 위해 붓을 들었다. 『매천집』을 읽고서 황현의 고향 구례를 찾았다. 매천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광의면 수월리 월곡의 옛집은 오래 전에 복원됐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매천이 자결했다는 ‘대월헌(對月軒)’을 비롯해 ‘성인문(成仁門)’, ‘매천유물관’ 등이 들어섰고, 집 뒤로는 1955년에 건립된 사당 『매천사』가 있다. 옛집과 사당이 한 자리에 있어 매천의 정신을 배우는 공간으로는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4칸짜리 대월헌은 복원과정에서 3칸으로 축소됐고, 유물관은 진품 한 점 없는 빈껍데기 전시장에 불과했다. 매천 생전을 증언할 존재는 마당 한켠에 우람하게 솟은 오동나무뿐이었다. 매천사를 관리하고 있는 이영열옹은 그 나무를 가리키며 “『오하기문』의 책 이름에 나오는 오동나무가 바로 이것”이라고 말했다. 구안실이 있었다는 간전면 수평리의 만수동은 매천사에서 5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깊은 산골의 마을이다. 매천이 16년이나 거처했지만,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다. 구안실의 집터는 홍수로 쓸려가 버렸다. 그 앞에 ‘구안실’ 표지판만이 세워 있을 뿐이다. 구안실은 세 사람의 ‘기문’ 속에서만 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후대에까지 오래 기억되는 방법으로 ‘입언(立言: 글을 지어 남김)’을 꼽았나 보다. 세편의 「구안실기」는 사라진 구안실을 증언하고 있는 자료들이다. 구례군은 구안실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모쪼록 충실한 고증으로 월곡의 매천 옛집처럼 어설픈 복원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