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신촌, 유령이 떠도는 거리
글 이기성_시인, 평론가. 1966년생
시집 『불쑥 내민 손』 『타일의 모든 것』, 평론집 『우리, 유쾌한 사전꾼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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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 번잡한 현실 우에 하나하나 환상을 붙여서 보지 않아도 좋다 꺼먼 얼굴이며 노란 얼굴이며 찌그러진 얼굴이며가 모두 환상과 현실의 중간에 서서 있기에
- 김수영, 「거리(二)」
신촌은 대학들로 둘러싸인 ‘대학가’이다. 1970,80년대의 신촌은 이른바 청춘의 낭만을 소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한때를 풍미했던 대학가라는 향수어린 명성을 인근 ‘홍대앞’에 내어 준 채, 신촌은 자신을 채우던 활력을 소진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강남 사람 너무 많아/홍대 사람 많아/신촌은 뭔가 부족해’(<이태원 프리덤>)라는 노랫말 속에서, 신촌은 대중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결핍된 공간으로 그려진다. 강남과 홍대를 거쳐 이태원으로 욕망의 발화점이 옮겨가는 동안, 수십 년간 ‘대학가’라는 특권적 지위를 유지해 주던 자본의 축이 급격하게 기울어간 것이다. 자본의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자에게 ‘자기계발’의 논리가 구원처럼 다가왔다. 떠나간 청년들의 사랑을 받기에 ‘뭔가 부족했던’ 신촌은 스스로를 단장 하기로 했다. 신촌을 관통하는 연세로(명물거리)의 보도블록을 갈아엎고 가로수를 베어내고 간판을 정비했다. 보행을 가로막던 포장마차와 노점들이 사라지고 대신 말끔하게 다듬어진 포석이 깔렸다.
신촌이 겪고 있는 이러한 변화는 서울의 곳곳이 겪어왔던 맹목적 개발의 비극적 결과를 그대로 보여준다. 하긴 이 땅의 어느 곳이 자신의 원형을 보존하는 것을 꿈이나 꿀 수 있을 것인가. 서울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갈아치워지는 사이에 신촌 기차역이 철거되었다. 그와 함께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을 보여주던 기차역의 풍경은 콘크리트에 묻힌 채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회색 콘크리트 덩어리로 만든 쇼핑센터가 들어섰다. 어떤 상상력도 보탤 수 없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둔중한 이 건물은 오늘도 효용의 극대화와 이윤 추구라는 자본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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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로터리와 연세대 앞을 잇는 연세로는 일직선으로 뻗어있다. 하지만 이 단순한 거리를 통과하기는 만만치 않다. 상점에서 틀어대는 음악이 세이렌의 노래처럼 보행자의 발목을 잡고 눈앞을 흐려지게 하는 까닭이다. 다국적 패스트패션의 브랜드들이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속옷과 액세서리와 화장품 가게들이 화려하게 반짝인다. 순식간에 생겨났다가 다음 계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상점의 상품들은 자신들의 일회적 운명을 뻔뻔하게 전시하고 있다. 이 거리에서 난파되지 않기 위해서는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아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어떤 보행자들은 영리하다. 그들은 검은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자신의 영혼을 단속한다. 그들의 시선은 유혹 당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상품의 표면을 무심하게 스쳐간다. 새로운 오디세이족의 등장일까. 물론 이러한 금욕적 주체들의 숭고한 결심은 오래 가지 못한다. 이 거리 어디에선가 그들을 유혹하는 또 하나의 세이렌이 출몰하기 마련이니까.
직선으로 이어진 거리의 단순성은 공간이 담고 있는 어떤 ‘깊이’를 거세해 버린다.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는 속도전의 거리. 여기서는 그 누구도 길을 잃고 헤맬 수가 없다.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채 공간의 내부를 헤맬 때 우리는 비로소 그 공간의 깊이를 체험하게 된다. 보행자에게서 헤맴의 경험을 박탈한 연세로는 깊이가 휘발된 표면성의 공간이며, 내부를 향한 입구가 봉쇄된 닫힌 공간이다. 만약 당신이 신촌에서 깊숙한 헤맴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 직선의 거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행히 신촌은 거미줄처럼 흩어지는 수많은 골목들을 숨기고 있다. 이면도로에 들어서서 모퉁이를 돌면 허름한 식당과 비닐 포장을 친 주점들을 만날 수 있다. 고개를 돌리면 오래된 카페와 만화방들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낡은 한옥집 앞에 세워진 가스배달 오토바이, 먼지 낀 수족관에서 뻐끔거리는 물고기의 공허한 입. 운명과 사주를 점치는 철학관의 비밀스런 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리고 오래된 하숙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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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의 어느 날 신촌은 느닷없이 대중들 앞에 호출되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무대는 신촌의 한 하숙집이었다. 하숙집에는 고향의 부모를 대신하는 주인 내외와 여동생 같은 딸이 있다. 하숙집 구성원들이 나누는 끈끈한 우정과 친밀한 연대감은 대중들에게 감동적인 가족 판타지를 선물했다. 식탁에 둘러앉은 정겨운 하숙생들의 모습이, 개별화된 공간에 유폐된 현대인들에게 이상화된 가족의 모습을 환기시켰으리라. 이러한 가족의 이미지는 1990년대 초반, 자본의 위기가 닥쳐오기 전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풍족했던 시절에 대한 은유이다. 자본의 위기를 삶의 위기로 경험한 이들에게, 흥성했던 시절의 신촌은 자신들의 아름다운 시절을 표상하는 노스탤지어의 공간으로 떠올랐다. 드라마에 재현된 신촌의 이미지 속에서, 현재가 불안한 기성세대는 나름대로 화려했던 과거를 추억하고, 젊은 세대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유토피아의 꿈을 잠시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낭만적 환각이 끝난 뒤 우리가 대면하는 것은 차갑고 외로운 현실이다. 신촌의 젊은 세대들은 이제 하숙집이 아니라 원룸, 오피스텔, 고시원이라 이름 붙여진 ‘동굴’에 깃들어 산다.1) 신촌역 3번 출구에는 ‘홍익문고’가 있다. 신촌에 불어 닥친 재개발의 광풍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책방이다. 하지만 많은 주민들의 지지 속에 철거를 면한 홍익문고가 언제 자본의 폭풍 속에 휩쓸려 난파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자본의 풍랑 속에서 흔들리는 홍익문고의 운명은 이미 사라진 책방 ‘오늘의 책’을 떠올리게 한다. ‘오늘의 책’이 흥성하던 시절은 역설적으로 지배 권력의 억압이 극한으로 치닫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서점은 청년들의 갈급한 지적 욕구를 채워주던 성소였으며, 현실에 맞서고자 했던 청춘들의 비밀스런 회합의 장소였다. 청년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읽히던 책들, 마르크스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수많은 금서들 그리고 1988년 이후에야 빛을 보게 될 월북 작가들의 작품들도 이곳을 거점으로 유통되었다. 금지된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저항의 한 방식이었던 시절, 청년들은 서점의 로고가 선명하게 인쇄된 포장지로 싼 책을 들고 다녔다. 이제 청년들은 더 이상 ‘불온한’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자격증 수험서에 성실하게 밑줄을 긋고, 여분의 시간에는 자기계발서를 열정적으로 탐독한다. 어두워지면 치열하게 반짝이는 상점의 불빛들 속에서, 외딴 섬처럼 떠 있는 홍익문고는 지난 시절의 환영처럼 보인다.
그날의 신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눅눅한 공기가 무겁게 깔려있던 그날은 장례식의 날이었다. 연세대 교정에 새벽부터 몰려든 수많은 군중들, 흩날리는 흰 만장들. 한 청년이 사망했다. 교문 앞에서 벌어진 시위 현장에서 최루탄을 맞고 숨진 청년의 이름은 이한열. 독재 권력에 맞서 저항하던 1980년대의 열망이 절정으로 치달았던 시간,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백만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교문을 나와 신촌로터리로 천천히 움직이던 운구행렬. 청년이 걸었던 길을 따라서 100만 명의 사람들이 시청 앞 광장으로 행진했다. 운구의 행렬의 선두가 시청에 도착할 때까지도, 아침이슬 노래를 부르며 신촌로터리를 빠져나가지 못하던 수많은 군중들. 그들은 그날 신촌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폭력적 통제와 검문이 횡행하던 거리를 걸어가며, 그들은 지배 권력을 순간적으로나마 해체시키는 어떤 ‘해방’의 순간을 맛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해 12월 역사의 비극은 기괴한 소극(笑劇)으로 떨어지게 된다. 독재 정권은 ‘합법적’으로 연장되고, 해방의 환희는 망각 속에 묻혔다. 그리고 2014년 오늘 역사의 천사는 과거를 향해 속수무책 떠밀려 가고 있다. 살아남은 자들은 낡은 체제와 이념들이 사신(死神)처럼 회귀하는 현실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안간힘으로 부유하고 있다. 신촌은 자신의 가슴을 밟고 지나갔던 그 경건하고 서글픈 장례 행렬을 기억하고 있을까.
학교는 공사 중이다. 명물거리와 일자로 이어지던 연세대 백양로의 상징이던 백양나무가 모두 베어지고 두꺼운 콘크리트가 발라졌다. 나무들은 속절없이 푸른 비린내를 흘리면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잘려나갔다.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콘크리트가 부어지는 살풍경은 우리 시대의 사유의 두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간의 적층성을 견디지 못하는 부박한 풍경. 백양이 사라진 이후에도 그곳의 이름은 여전히 ‘백양로’일까. 이렇게 21세기의 자본은 대학의 내부마저 상업화하고 있다. 지식의 중개상이 되어버린 대학의 도서관 앞에는 그래도 ‘그날’이 되면, 제단이 세워진다. 죽은 자의 얼굴이 내걸리고 서글픈 향이 피워진다. 그러나 아무도 멈춰 그들을 위해 묵념을 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죽음을, 그들의 열망을 기억하자고, 누군가 검은 매직으로 써 놓은 글씨들이 공허하게 흔들린다. 두꺼운 수험서를 옆에 낀 지식의 소비자들은 바삐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기념할 무엇이 남아 있지 않은 세대의 자화상이다.
오늘의 신촌은 낯선 활력으로 가득 차 있다.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현실에 착지하지 못한 채 떠밀리는 고단한 청춘들로, 자본주의의 달콤함과 한류라는 환등효과에 취한 외국 유학생들로 붐비고 있다. 주말 연세로의 교통은 통제되고 거리는 일시적으로 해방된다. 이른바 ‘문화의 거리’ 프로젝트, 신촌 거리에서 상업성을 벗겨내고 대신 ‘문화’라는 이미지를 덧입히겠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레 문화적 지층이 쌓여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이식하겠다는 이 놀라운 발상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압축 성장의 판타지를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교통을 통제한 ‘합법적’ 축제의 공간은, 청춘들에게 잠시 권력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억눌린 젊음을 발산하도록 열어놓은 축제에서 ‘정치’는 금지된다. 정치가 거세된 축제는 더 많이 ‘향유하라’는 자본의 명령을 노골적으로 유통시킨다. 이렇게 자본과 문화는 서로의 알리바이가 되는 것이다. 흥겨운 축제가 끝난 휴일의 자정, 신촌은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들로 분주하다.
어떤 축제는 게릴라들이 접수하는 시간에 온다. 합법적 공간을 ‘점령(occupy)’하는 자들, 그들은 권력이 그어놓은 금지선을 뚫고 나와서 자신들의 서명을 남기고 유유히 사라진다. 잘 다듬어진 도시의 외관을 흉측하게 일그러뜨림으로써, 견고한 콘크리트 벽의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것. 이를테면 신촌 굴다리에 검붉은 페인트로 그려진 알 수 없는 기호들. ‘합법적 축제’의 공허함은 이 은밀한 게릴라적 방식과 절묘하게 부딪치는 순간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2) 자본의 제국에서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자들, 입이 없는 사람들, 망각된 이름들, 유령들. 해방의 축제는 모든 배제된 자들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 몫의 식탁을 함께 준비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자정 무렵 신촌의 화려한 불빛 속에서 누군가 서성이고 있다. 어느 날 당신은 신촌을 걷다가 이 낯익은 유령과 마주칠지도 모른다. 그 창백한 얼굴이 한때, 아름다웠던 ‘우리’임을 깨닫지 못한 채 무감하게 걸어가게 될지도.
1) 김미월, 『서울 동굴 가이드』, 문학과지성사, 2007 2) 현재 진행 중인 ‘전환도시-신촌’의 일련의 작업들은 ‘정치’를 배제한 축제의 외형을 재전유하면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찾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겨레21》(2014. 10. 31.)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