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한국의 문학계를 배회하고 있다. 지젝이라는 유령이”라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실에 좀 더 부합하기 위해서는 ‘문학계’라는 말을 ‘인문학계’라는 말로 고치든가, 아예 ‘문’자를 빼어야 할 것이다. 지젝이라는 유령의 출몰에 환호를 보내든 야유를 보내든 이는 동의하기 어렵지 않은 명제이다. 실제로 2000년대 우리 (인문)학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이론가로 지젝을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있어봤자 지젝의 저작 권 수에 (못) 미치는 정도밖에 안 되지 않을까?
그런 ‘거물’ 지젝과 한국문학(의 영향관계)에 대해 논하라는 게 내가 받은 주제이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논할 수 없는—‘논하기 힘든’이 아니라—주제이다. 지젝이 한국문학에 미친 영향을 말하기 위해선, 지젝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변수(문학가들이 읽거나 참조하거나 영향을 받은 사상가나 작가, 어떤 유파나 사조, 심지어는 시인이나 작가들의 그때그때의 컨디션이나 기분까지도)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그 반대, 즉 우리 문학에서의 지젝의 영향력을 통제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이를 종합해 말하면 “모르긴 해도 아마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을 거야”라고 말하는 게 엉터리 같지만 가장 진솔한 표현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그러니까 이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는 사건과 같아서 수사를 공개로 돌리고 시민의 제보를 기다리듯, 이 특집 주제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시인, 소설가, 비평가, 연구자 등 한국문학과 관련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젝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느냐고 묻고 그 답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나마나한 소리지만 이 역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모르긴 해도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을 거라는 그 추측과 느낌의 정체를 고백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수사관이나 고고학자의 태도가 아니라, 고백록을 쓸 때의 아우구스티누스나 루소와 같은 심정으로, 또는 에쎄를 쓸 때의 몽테뉴와 같은 자세로 지젝과 한국문학의 밀월에 대해 차분히 둘러보기로 한다.
내가 지젝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본 것은 2001년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젝의 원서로 진행되는 수업이 있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난 그 수업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머릿속에 남아있던 지젝이라는 이름은 어딜 가도 들려왔다. 주로 비평가들의 글 속에서 자주 출몰하였으며, 연구 논문 속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돌이켜보건대 어쩌면 김소월이나 황순원보다 더 자주 본 것 같기도 하다.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둔감한 자들이 말하듯 유행이란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랬다면 벌써 잊혀졌을 것이고, 당연히 이 글도 쓰여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지젝이 많이 읽혔고 또 읽히고 있는 데에는 아마도 그가 ‘실재’에 대한 탐구자라는 게 큰 몫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라캉의 이른바 ‘RSI삼항(실재계the real, 상징계the symbolic, 상상계the imaginary)’ 중에서 가장 외면 받고 있던 실재계야말로, 지젝에 의하면 우리의 무시무시한 심연이자 중핵이다. 여기서 ‘우리’란 주체 내부를 일컫는 것이기도 하고, 주체들이 기입되어 있는 상징계 내부를 일컫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후자의 경우가 좀 더 시사적인데 상징계가, 특히 신자유주의의 화려한 외관을 걸치고 있는 상징계가 그 자신의 끔찍한 외설적 이면을 반복적으로 드러낸 것은 아마도 2000년대 이후일 것이다. 도처에서 우리는 상징계(더불어 그 네트워크 안에 기입되어 있는 주체)의 괴물과 같은 외설적 이면들을 목도하게 되었는데, 이 목도를 이론적으로 집약하면서 해방적 계기를 모색하는 데에 지젝만한 이론가는 없었고,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적어도 과문한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더군다나 지젝은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니체의 금언을 극단으로 밀고가, 주체 스스로가 이미 텅 빈 기표이자 동시에 괴물(적) 기표임을 드러내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던가. 사정이 이러하기에 행복한 무지 속에서 살기를 원하는 지적 게으름뱅이가 아니라면 지젝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재(계)에 대한 이러한 지젝의 정열은 2000년대 이후 우리 문학의 주요한 파토스이기도 하다. 장르를 불문하고 2000년대 이후 우리 문학이 주로 탐구해온 주제 역시 주체와 네트워크의 내부에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는 괴물(들)thing을 드러내는 일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김영하나 백민석에서부터 백가흠이나 편혜영을 거쳐 최근의 손보미나 정소현에 이르기까지(그리고 넓은 맥락에서 김애란이나 황정은까지도) 2000년대 이후 우리 소설은 괴물과의 싸움의 기록이었다. 시 쪽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이른바 ‘미래파’ 시인들이 언어를 구사하는 방법은 상징계에 대한 상징적 도발—물론 그 도발이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지만—그 자체였으며, 이장욱이나 김행숙, 진은영, 이기인 등의 시적 고민이 보여주는 시스템과 주체에 대한 문제적 고찰 역시 지젝의 사유와 유비되는 면이 있다. 비평은 더욱 말할 것도 없다. 과장하자면 지젝에 대한 인용과 해석의 경연장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2000년대 이후 우리 비평은 지젝이라는 잉크를 묻히지 않고는 거의 쓰여지기 힘들었다. 지난 십여 년 간 우리 비평의 주요 화두는 단연 ‘윤리’와 ‘정치’였는데, 이때 가장 많은 참조점이 된 인물은 (칸트와 마르크스라는 고전적인 예외를 제외한다면) 단연 지젝이었다. 그에 비할 때 물론 시(인)나 소설(가)의 경우 지젝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이나 영향관계를 논리적으로 면밀히 살필 수는 없다. 그러나 창작이 당대의 비평과 교류한다는 점, 그리고 문학적, 문화적 분위기나 풍토, 하이데거 식으로 말해 ‘근본기분’에 창작 역시 어떠한 식으로든 영향을 받는다는 점으로 미루어 시와 소설 역시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지젝과의 교류(또는 교유) 아래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더불어 2000년대 이후 주요 시인들이 전업시인이라기보다는 주로 문학 연구자를 겸하고 있다는 현실적 정황을 고려해 보면, 지젝에 대한 독서와 참조가 이 글에서 막연하게 예상하고 있는 선보다도 오히려 더 활발히 이루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지젝이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소개된 지 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지젝과 한국문학’이라는 특집이 다루어진다는 것 자체가 그 단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겠다. 이는 물론 다행스런 일이다. 문학 내적으로도 그렇고, 문학 외적으로도 그렇다. 문학 내적인 것을 주체에, 외적인 것을 체계(상징계)에 대입해본다면, 우리는 그 두 곳 모두에 덧씌워진 환상의 스크린을 찢는 데 지젝이란 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테리 이글턴은 전후 미국 강단에서 신비평이 중심을 차지한 것에 대해, 혼란한 현실에 비할 때 작품 내적 완전성이란 것이 일종의 자족적 유토피아를 제공해주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지젝이 끊임없이 문제 삼고 공격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환영이다. 내 경우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난 원래 순문학주의자였으나 지젝을 읽고 나서는 전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젝이 『시차적 관점』에서 쓴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자아-이드 축으로부터 주체-진실 축으로” 이동(하고자)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우리 문학계가 지젝 이후 라캉과 헤겔, 마르크스는 물론이거니와 동시대의 슬로베니아 학파 전반과 바디우, 아감벤 그리고 랑시에르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 즉 환영의 커튼을 걷어내고 심연을 바라보는 것, 더불어 ‘정치’를 행정의 영역에서 다시 실천의 영역, 삶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올리는 작업, 그리고 그 작업에의 문학적(예술적) 연루(더 이상적으로는 ‘기여’)에 꾸준한 열정을 품어온 것에 대해서도, 지젝에 대한 독서(독해)가 그 가교 역할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내 경우만 해도 지젝이 아니었다면 라캉을 젠 체 하는 학계의 댄디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헤겔은 차라리 댄디였으면 하는 고리타분하고 반동적인 교수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단 마르크스는 그가 아니었더라도 지금과 같이 존경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슬로베니아 학파는 존재 자체도 몰랐을 확률이 높으며, 바디우나 아감벤, 랑시에르 등에 대해서도 지금과 같은 큰 관심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문학을 윤리나 정치의 맥락에서 사유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란 이야기다. 더불어 삶의 심연을 바라보고 그것에 윤리적 차원을 도입하(고자 하)는 모험도 없었을 것이란 이야기도 덧붙일 수 있겠다.
“예술적 퍼포먼스는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이들에게 당신의 작품은 ‘오 세상에, 이런 것이 있었다니!’라는 자각을 환기시킵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술은 ‘깨어남’을 선사하죠.” 지젝의 말이다. 난 이 말을 믿는다. 그리고 이 말에 대한 믿음을 예증하는 예술적 퍼포먼스와 작품들을 믿는다. 이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자아-이드’ 축에서 ‘주체-진실’ 축으로 이동시키며, 이 이동이야말로 윤리적 차원을 발생시키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나와 ‘각별한’ 사이인 지젝—나는 그(더 정확히 말하면 ‘지젝봇’)의 팔로워다—이 오늘 내게 들려준 말을 옮겨 적는다. “인간이란 그의 삶이 상징적 허구들에 의해 통치되는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이것을 너무도 자명해서 우리가 알아채지조차 못하는 어떤 것으로서 받아들인다. 그것을 완전히 알게 되기 위해서는 경탄의 철학적 경험이 필요하다.” 이 “경탄의 철학적 경험”을 내게 제공해준 이가 지젝이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경탄의 문학적(예술적) 경험, 경탄의 삶의 경험이란 것도 가능했다. 여기서 ‘경탄’이라 함은 입 벌리고 손뼉 치는 순진한 감동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환상을 깨는 윤리적 차원의 불순한 개입으로부터만 가능해진다는 점을 굳이 덧붙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