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문_시인. 1913~1985년
시집 『화수원(華愁園)』 『송가』 『화성인』 『푸른 전설』 『이목구비』 『묵시록』 『지구촌』 『신비한 사랑』, 수필 「사색·감흥·구상·표현」 「나무와 인간」, 평론 「6·25가 한국시에 미친 영향」 등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28년이나 흘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의 감수성이나 문학성향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삼형제 중 나인 것 같다. 나는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46세셨다. 우리 가족은 신촌 봉원동에 살았다. 당시 아버지는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셨는데, 국문과 제자와 문학에 꿈을 가진 학생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문학 강연을 듣고 음악과 예술에 대해서 듣곤 했었다. 시간강사로 나오던 전혜린 씨도 왔었다.
1963년도이던 당시 나는 6살 정도 되었는데 제자들이 사온 케이크를 먹으며 무척이나 행복해 했다.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커피를 직접 타주고 RCA전축에서 흐르는 클래식을 들으며 시를 낭송하셨다. 나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문학적인 분위기가 가득했다.
아버지는 산을 좋아 하셔서 우리 3형제와 강아지를 데리고 봉원동 뒷산에 오르곤 했다. 나무이파리로 소리 내는 것을 즐겨하셔서 안단테 칸타빌레(Andante Cantabile)를 자주 불러 주셨다. 아버지의 제자이신 시인 김광자 선생은 아버지의 1주기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날 강의를 마친 교수님은 제자들과 봉원동 뒷산에 가셔서 ‘소나무가 말하는 소리를 들어 보아라’고 하시며 시 「송가」를 낭독해주셨습니다.”
되도록이면 나무이기를 나무 중에서도 소나무이기를, 생각하는 나무, 춤추는 나무이기를 (중략) 어디서 이 크나큰 생명은, 맥박 쳐 오는 것일까, 그 무엇도 침범키 어려운, 이 장엄한 행진의 힘 당신의 혈관 속이나 세포처럼 독균의 침입을 입지 않은 순수한 내부조직 아, 이 눈부신 살림이여, 사랑이여!
아버지는 생활을 사랑하셨다. 신촌에는 아버지와 절친이었던 문인과 교수들이 많이 계셔서 시인 박두진 선생, 극 평론가 오화섭 선생, 아동문학가 이희성 여사, 이상범 화백, 이광린 교수, 함병춘 교수, 김형석 교수, 김동길 교수, 김옥길 교수, 김활란 박사 등과 자주 왕래하셨다. 그분들과 서로의 집에서 만나 토론하고 시를 낭송하기도 했으며 같이 식사도 하시곤 했다. 어머니(극작가 김자림, 1926~1994년)는 저서에서 이 무렵이(1960~1965년) 가장 재미있고 낭만적인 시절이었다고 회고하셨다. 이 시절을 함께 한 박두진 선생은 아버지의 장례식 추모시에 이렇게 쓰셨다.
양형, 양형 양형이 가시다니 어이없고 알 수 없고 믿어지지 않네 (중략) 50년을 읊조려온 땅의 나라노래 겨레아픔 나라걱정 실향의 설움 피맺힌 격조 높고 유연한 순난의 시인 (중략) 격정은 타는 불길 부드럽긴 봄바람 (중략) 양-명-문 땅의 나라 시의 별 별빛하나 꺼지고 하늘나라 시의 성좌 큰 별이 되어 가네 (1985년 11월 25일)
아버지의 시집 『화성인』 출판기념회(1956년 1월 26일)에는 박수근 화백, 한묵 화백, 명동백작 이봉구 선생, 월탄, 공초, 이희승 선생, 정비석 선생, 선우휘 선생, 김억 선생, 박인환 시인 등 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참석했다. 박인환 시인은 방명록에 이렇게 쓰셨다. “앞으로 오래 삽시다.” 그 후 몇 달 안돼서 박인환 시인과 박수근 화백이 요절하셨으니 아버지는 젊었을 때 친한 친구들을 잃어버린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어느 날 아침 아버지는 시인 김수영 선생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크게 낙담하셨다. “내 친구 수영이가 죽다니……” 아직도 그 광경이 선하다.
아버지는 실향민이었다. 그래서 꿈에서도 고향 평양에 두고 온 어머니를 부르며 베개에 눈물을 적시곤 했다. 아버지의 시 「어머니」에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사무쳐 있다.
어머니, 마음 푹 놓으시고 어서 여기 앉아 계셔요. 봄이면 살구꽃 곱게 피고, 가을이면 대추 다닥다닥 열리는 집 뜰, 네모났던 섬돌이 귀가 갈리어, 두루뭉실하게 된, 진짜 우리 집이올시다.
어머니, 아무런 일이 있더라도 가령 땅 위에다 끓는 피로 꽃무늬를 놓더라도, 여기를 떠나지 마시고 앉아 계셔요. 여기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적부터, 돌도끼로 나무 찍던 그 옛날부터 살아 온, 하늘 맑고 물 맑은 동네. 여기는 아들의 아들 아들 아들, 아들의 아들, 아들, 아들, 또, 그 아들의 아들 아들 아들들이 살아야 할, 잘 살아야 할, 진짜 아들의 땅이니까요. 어머니, 여기 앉으셔요.
나의 어머니와의 로맨스도 재미있다. 어머니의 친척 되시는 극작가 오영진 선생의 중매로 두 분이 만나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문학 초년생이었다. 어머니가 희곡 「운명」이란 작품을 써서 오영진 선생에게 갖고 가자 오영진 선생이 양명문 시인에게 가서 평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단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갖고 갔더니 아버지 왈 “이런 작품은 차마 문학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아예 지금부터라도 백지로 돌아가서 문학개론을 다시 읽고 시작하시오”라며 혹평을 하셨다. 이에 어머니가 질세라 아버지께 반박하시는 중에 연애감정이 싹 터 결혼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남편이자 스승이었다. 어머니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극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공이 컸으리라. 1965년 어머니의 희곡 「이민선」이 국립극단 제44회 정기공연에 올랐을 때 아버지는 여성이 쓴 작품으론 처음이라면서 무척 기뻐하셨다. 연출은 전세권, 출연배우는 백성희, 최불암, 김금지, 강효실, 반효정, 여운계, 박근형, 윤여정, 오지명 씨 등이었다. 어머니는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변변치는 않으나 남편 덕에 소위 극작가 김자림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부르지 못한 당신에게』(학원사, 1986년)라는 책을 쓰셨다. 그 책 서두에는 이런 글이 있다.
그 날 빈소를 찾아주신 여러 조객들의 위로의 말씀 중, 울던 내 입을 그만 웃게 만든 시인 황금찬 선생은 울음으로 먹먹해진 내 귀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래된 얘기지요. 우리 문인들 몇몇이 다방 보리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어요. 창 밖에는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는데, 눈을 흠뻑 뒤집어쓰고 문을 열고 들어서시는 양명문 선생은 가슴에 포인세티아 꽃을 안고 있었어요. 양 선생은 눈 이야기를 하시다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하며 포인세티아 꽃잎을 따서 우리에게 한 잎씩 나눠 주셨지요. 화가 박수근 씨는 웃고만 있고 작가 이원수 씨는 다방에서 메모지를 얻어 곧 시를 썼는데 제목은 「포인세티아 꽃잎과 눈」이었지요. 그 시 원고를 양 선생님이 빼앗아 큰 소리로 낭독하셨지요. ‘명동거리에 눈이 내리고 아늑한 화원 꽃이 피네’ 이렇게 시작하는 시였지요.”
얼마 전 TV에서 최불암 선생이 시 「명태」를 낭송하는 것을 보고 감회가 깊었다.
감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 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며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이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고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 명태라고 아 하하하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미술과 음악과 문학과 어우러져서 살아가신 분, 민족과 자연과 생활을 사랑하신 분, 오늘은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헨델의 라르고를 들으며 뒷마당에 있는 소나무와 더불어 아버지를 불러본다. 아버님, 다시 뵈올 때까지 편히 쉬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