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준래_한국외국어대학교 HK연구교수. 1970년생
역서 『제파강의 다리 외』 『보리스 다비도비치의 무덤』 등
오늘날 발칸 문학의 현대화를 견인했던 구 유고슬라비아 근대 문학은 안정적인 시민사회의 토양에서 자라난 서유럽 문학과는 현격히 다른 길을 걸었다.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분할된 식민지인으로서의 삶에 근대 자본주의의 유입과 발칸 특유의 지방주의 및 민족주의에 의해 삼중으로 억압되어 있었던 발칸 근대인의 운명을 그린 이 지역의 문학은, 압축적 근대화를 경험했고 식민주의, 자본주의, 전근대주의가 중첩된 상징계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 근대문학과 강한 유사성을 보인다.
아울러, 발칸 반도 서부지역에 형성된 국가적, 민족적 복수성의 환경과 초민족적인 단일문화이념의 결여는 지역 내 사회적 안정성의 현격한 저하를 초래하는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복수의 국가와 민족의 병존으로 인해 구 유고지역에서 항시 유발될 수 있는 극단적인 차이와 대립은, 그것들을 중화시키는 상위심급이 부재하는 경우, 사회구성원들에게 외부의 위협에 예민해지고 자기방어에 대해 과도하게 신경 쓰도록 유도함으로써 자주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치닫게 한다.
보스니아 태생의 유대계 세르비아인 작가인 196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보 안드리치(Ivo Andrić, 1892~1975)와 함께 ‘유고슬라비즘의 이상을 가장 잘 표현해낸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다닐로 키슈(Danilo Kiš, 1935~1989)는, 한국 근현대 성장소설의 서사적 특징 중 하나인 ‘식민주의·제국주의적 오이디푸스 아버지’와 ‘부권부재’의 모티프, 프로이트의 ‘가족로망스’를 연상시키는 장편소설 삼부작 『가족의 서커스(Porodični cirkus)』에서, 작가의 유년시절의 분신 ‘안디’의 성장사와 아버지(은퇴한 철도 감독관으로 검은 모자와 단장을 든 ‘에두아르드 샴’)의 인생 궤적에 대한 아들의 탐색, 나아가 유년시절의 기억 속에 자리하는 트라우마적 중핵—아버지의 폭력적 죽음—을 묘사하며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하부텍스트로 도입했다.
공식역사와 대립하는 대안적인 문학적 역사, 즉 평범한 인간들의 생애를 기록한 아카이브를 진실한 역사로 보는 작가의 관점은 『죽은 자들의 백과전서(Enciklopedija Mrtvih)』에서 중심 주제로 다시 구현되는 바, 키슈가 가족 삼부작에서 주인공인 아버지 ‘에두아르드 샴’의 생전의 신변과 관련된 디테일과 각종 자료를 과하다 싶으리만큼 자세히 나열하는 까닭은 보편역사의 추상적 범주 대신 구체적이고 생생한 개인적 생애의 재현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현존재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자각하게 하기 위함이다.
『죽은 자들의 백과전서』는 신약시대의 유대 땅, 1920년대 세계공황기의 독일 항구도시, 20세기 후반의 스웨덴, 기원 후 3세기의 소아시아, 19세기 말의 헝가리 지방도시 및 프라하와 스페인, 20세기 초에서 2차 대전 무렵까지의 러시아와 서유럽 사회 등 저마다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총 9개의 독립적인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울러 성서 속에 등장하는 한 이단 마술사에 대한 일화, 일간지 단신기사 중 한 토막, 근현대 유고슬라비아 사회의 일상사, 오래된 종교적 전설과 외경, 판본학과 서지학적 정보, 근현대 유럽사회에 관한 사료, 문학계의 비사(秘史) 등 작가가 글감으로 끌어온 원천 또한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이 다채롭고 역동적인 인생의 면면을 내비치는 일화들을 일관되게 에워싸는 것은 죽음의 불가피성이라는 어둡고 무거운 주제이며, 이런 점 때문에 소설집 전체에 ‘아홉 색깔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는다고 해도 억지는 아닐 것이다. 기적의 실패를 뜻하는 추락사와 폐사(「‘기적을 행하는 자’ 시몬」), 폐렴에 의한 매춘부의 ‘낭만적’ 죽음(「마지막 경의(敬意)」), 괴물 꽃처럼 커진 암세포가 앗아간 혈육의 덧없는 죽음(「죽은 자들의 백과전서-한 인간의 전 생애에 관한 기록」), 좌절된 부활의 결과이자 잠과 분리되지 않는 몽환적인 성격의 죽음(「잠자는 자들에 대한 전설」), 범죄자의 난행과 초현실적 예지가 충돌하는 불가사의한 죽음(「낯선 세계를 비추는 거울」), 허상에 의해 실재가 ‘살해’되는 철학적 논쟁으로서의 죽음(「스승과 제자의 이야기」), 영웅주의 신화의 토포스와 역사적 아이러니가 혼재하기 마련인 정치적 희생(「영예롭도다, 조국을 위한 죽음이여」), 포그롬과 홀로코스트 등 근대의 기술문명과 결합한 사상 초유의 대량 살육(「왕들의 서(書) 또는 광대들의 서(書)」), 정치적 숙청과 질투어린 사랑이 빚어낸 ‘문학적’ 죽음(「레닌의 초상화가 그려진 붉은 색 우표」)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듯 저마다 독특성을 띤 인물과 상황은 개별 에피소드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고 인류 보편에 닥쳐오는 죽음의 총체적 이미지로 상승하며, 동시에 작가는 고대의 전설에서 현대의 정치적 메시지를 읽어내고, 비극과 희극, 장중한 어조와 아이러니한 냉소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일례로, 이 소설집의 서막을 여는 이야기 「‘기적을 행하는 자’ 시몬」에서 키슈는 영지주의 일파의 전승을 소재로 이용하여, 초기 기독교 교부들에 의해 온갖 이단의 원조로 규정됐던 시몬 마구스의 이미지를 재구성하면서 전체주의, 사회주의를 포함한 모든 위계와 권위에 도전하는 개인, 온갖 도그마에 반발하는 평범한 항거자의 모습으로 그를 변형시킨다. 또 이 소설 모음집의 두 번째 조각인 「마지막 경의」에서 작가는 독일 항구도시의 매춘부가 폐렴으로 숨진 후 생전에 그의 ‘연인’이자 고객이었던 선원들이 그녀의 장례식을 놓고 벌이는 해프닝을 묘사하면서, 만인의 평등을 강조했던 허울뿐인 공산주의 이념보다 “만국 선원에 대한 무차별적 사랑”을 실천했던 불우한 창녀의 죽음이 더욱 숭고하고 감동적이지 않느냐고 짓궂은 냉소를 지어 보인다.
이 소설집의 세련된 미학적 구성이 예증하듯이, 다닐로 키슈는 주제의 국제성과 함께 발칸 반도 외부의 문제를 문학적 소재로 선택하고 시점의 다중화 및 픽션과 팩토그래피를 혼합하는 포스트모던의 방법론을 선취하여 청년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작가이다. 이 새로운 시도는, 소연방을 모델로 하여 성립한 구 유고연방의 기성 문단에서 1970년대 이후 점차 대두되기 시작한 민족주의적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해 강도 높게 비난했던 그의 이력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작품을 비롯한 또 다른 환상소설(『보리스 다비도비치의 무덤(Grobnica za Borisa Davidoviča)』)에서 동유럽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던 사해동포주의적 공동체의 모델로부터 소연방이 관료주의적 전체주의로 변질되어가는 과정에 주목했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위시하여 고대부터 현대까지 여러 전체주의 사회의 알레고리를 통해 유고 사회를 풍자했다. 이 두 대표 소설은 일종의 ‘반유대주의사 서술’이며, 키슈는 ‘결코 선하지만은 않은’ 책과 문학과정(창작, 출판, 번역, 독서행위)이 담지하는 신화적 파급력과 미학 행위 자체에 내재한 윤리성에 주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작품에서는 당시 유고 사회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대목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키슈는 민족주의와 보수주의, 반유대주의 계열 동료문인들 모두에게 비난의 표적으로 몰리게 됐고, 반세기 전 같은 유대계 작가 오시프 만델슈탐이 그랬듯이 표절작가라는 오명을 쓰게 된다. 키슈는 사실주의적 재현방식을 포기하고 의도적으로 분절적, 파편적인 서사 형식과 비문학적 다큐멘터리 자료들을 조합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형식과 현격히 대비되는 보르헤스식 환상소설을 표현했다. 그는 유럽사회에서 반유대주의가 진화해 온 ‘복잡계’적 경로를 추적하면서 반유대주의라는 괴물이 시대마다 모양을 달리하지만 동일한 본질-‘문학적’ 속성-을 지니는 담론적 현상임을 지적한다(「왕들의 서(書) 또는 광대들의 서(書)」). 키슈는 특히 반유대주의 민족주의 정서가 문학담론과 결합하여 러시아를 비롯한 국제적인 반유대주의 정서 확산에 기여해 왔고, 근대 이후 예술 인텔리겐치아들에 의해서 반유대주의 담론이 형식과 내용에서 보다 세공되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안드리치와 키슈의 메타픽션에서 폭력에 의한 트라우마와 희생된 인명에 대한 기억은 일상적 시간의 흐름을 끊어놓고 화자의 인식을 비극적 공간으로 되돌리기에 시간의 파편화를 초래하는 듯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억압’과 ‘인내’의 모티프를 담은 그들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개인과 집단의 ‘폭력적 죽음’은 독자의 내부에 악에 대한 ‘항구적 저항’의 심리를 발생시키고 역사적 총체성의 감각을 발생시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