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_평론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945년생
저서 『얼굴 없는 희망』 『말과 시간의 깊이』 『잘 표현된 불행』, 역서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 말라르메의 『시집』, 아폴리네르의 『알코올』, 발터 벤야민의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공역),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 등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지난 1990년대 초의 일이다. 춘천의 한 호텔에서 출판관련 학술회의가 열렸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 범용 인터넷 망이 깔리기 전이었지만, 각종 문서들이 디지털화하는 추세에 불안을 느낀 출판인들이 멀지 않은 장 래에 책이 만나게 될 운명을 타진하고 그 방책을 세우려는 데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강원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나는 어떤 인연으로 그 학술회의에 한발표의 질의자로 참여하였다. 대학 강단의 연구자들이거나 문화예술계 인사들인 발표자들은 거의 대부분 당시 유행하던 포스트모던의 문화이론을 이리저리 꿰맞추어 거대한 문화혁명이 도래하고 있다는 내용의 말을 지극히 추상적인 언어로 엮어내었다. 그러나 출판인들에게 위안을 주는 말도 없지 않았다. 저명한 문학이론가로 연세대학교 영문과에 재직하며 『연세대 한국어사전』의 편찬을 책임지고 있던 이상섭 교수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내용이다. 당신은 한국어사전을 편찬하면서 옥스퍼드 대사전을 자주 참조한다. 그 방대한 사전이 지금 콤팩트디스크 한 장에 들어가 있으니 더 없이 편리하다. 이 장소 저 장소로 나르기 쉽고, 컴퓨터에 돌려 모든 낱말들을 검색하거나 정렬할 수 있으며, 관련 예문들을 입체적으로 추출할 수 있다. 여기까지 말하고 이 교수는 어조를 바꾸었다. 그러나 당신이 더 좋아하는 것은 종이로 출판된 옥스퍼드 사전이다. 책과 잉크의 냄새가 어떤 분위기를 형성하고, 한 낱말을 찾다가 다른 낱말에 한눈을 팔 수도 있으며, 책에 수택이 묻고 책장이 낡아지는 것을 보며 연구자로서 긍지를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전을 뒤적이다 피곤할 때는 그 두꺼운 사전을 베고 잠을 잘 수도 있다. 시디를 베고 잠을 잘 수는 없지 않느냐. 이교수가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만장한 출판인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교수의 발표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그 박수와 환호성이었다. 나는 그게 아닌데 싶었지만, 내 속생각을 마음대로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을 뿐더러, 내 자신도 사전을 베고 잠을 청한 적이 없지 않았던지라 그 박수소리에 내 박수소리를 섞어 넣었다. 현실은 노학자의 고결한 취향을 무참하게 배반했다. 이제는 거대한 사전을 편찬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종이책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 사전이 학습용 사전을 넘어서면, 출판사도 이용자도 디지털 버전에 더 많은 기대를 건다. 나의 경우에도 종이책 사전을 펴는 일은 거의 없다. 십여 종의 어학사전과 백과사전을 모바일 기기에 담아 작은 가방에 넣고 다니며, ‘앱’으로 판매되지 않는 사전은 인터넷을 통해 이용한다. 디지털사전들을 베고 잠을 잘 수는 물론 없지만 조금 덜 낭만적인 방식으로 모바일 기기를 가슴에 올려놓고 잠들 수는 있다. 그러나 종이책 사전이 타격을 받았다고 해서 디지털문명의 시대가 전반적으로 서적의 출판에 불리한 사태만 몰고 온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급하게 활자의 죽음을 말하였지만, 활자는 그 ‘활(活)’의 본분을 이제야 완수할 수 있다는 듯이 어디서나 질주하고 어디에나 파고든다. 우리 시대보다 더 많은 글자를 소비한 시대가 있었던가. 사람들은 천지에 글자를 쓴다기보다 차라리 뿌린다. 종이에 갇혀 있던 글자들이 이제는 허공으로 날아다닌다. 책을 만드는 일도 그만큼 쉬워졌다. 원고가 출판사에 들어가서 일주일도 되기 전에 책이 되어 나오는 일이 예사다. 아니 원고가 벌써 책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출판 방식의 변화가 출판의 개념 까지 바꾸려 한다. 글 쓰는 방식의 변화가 또한 글 쓰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또다시 나를 예로 든다면, 지금 같은 시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지 않았을지 모른다. 무딘 손으로 쓴 내 글씨를 못 견디게 혐오하던 나를 문서작성 프로그램이 구원해 준 것이다. 썼던 글을 지우고 다시 쓰는 일이 손쉬워진 것도 내게 이상하게 용기를 준다. 최소한 펜으로 글을 쓸 때처럼 적절한 단어나 문장형식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해서 쓰던 글을 덮어버리는 일이 훨씬 드물어졌다. 여러 버전으로 문장을 써놓고 그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도 오래 전에 터득한 방법이다. 글을 이어 나가며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순간의 절박함이 그만큼 완화되었다. 선택의 이런 용이함은 나 같은 비평가들과는 다른 서사작가들에게도 그 서사의 설계에 자유롭고 넓은 공간을 만들어 준다. 한 인간이 오른쪽으로 가면서 동시에 왼쪽으로 간다. 한 여자가 동시에 여러 남자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왼쪽과 오른쪽이 각기 다른 사건의 계기를 품고 있고, 남자들은 여자에게 각기 다른 운명의 길을 열어 준다. 작가는 다른 선택에 따른 다른 사건들을 동시에 선택할 수 있다. 종이책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기한 입체적 서사의 전개가 하이퍼텍스트의 디지털 공간에서는 가능하다.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류시키 제로나나(龍騎士07)가 시나리오를 쓴 일본의 만화영화 『쓰르라미 울 적에』(2006, 2007)는 산골마을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사건에 이어 2천여 명의 주민 전체가 가스폭발사고로 몰살하는 참사를 열 개의 버전으로 이야기한다. 참사의 희생자인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 선의 때문에, 이 거대한 범죄의 하수인이 되거나 당사자가 된다. 만화영화에서 이 참극이 다른 버전으로 아홉 번 반복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은 다른 선택을 하지만 결과는 늘 동일한 재난이다. 한 버전의 기억은 다른 버전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매번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그 에피소드들의 중요한 부분을 기억하는 한 소녀가 있고, 그 영향 아래서 몇몇 등장인물은 아홉 번째 버전에서부터 조각난 기억을 기시감의 형식으로 되살리고, 마침내 열 번째 버전에서 그들의 선택은 마을을 비 극에서 구한다. 운명과 선택은 자연주의 이후 현대소설의 가장 중요한 주제에 속한다. 단일한 줄거리의 소설에서도 반복되는 에피소드의 만화에서도 등장인물들에게는 운명의 고비가 있고 선택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차이가 없지않다. 전통적 소설에서 주인공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한 번이기에, 그 선택에는 그만큼 실존적 비장감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저 만화영화 속 인물들도 주어진 운명의 조건 아래서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애쓰지만, 그들의 선택은 사실상 롤플레잉 개임에 임하는 플레이어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플레이어는 제 게임에서 승리하고 싶어 하겠지만, 바둑알이 죽지 내가 죽느냐는 심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쓰라라미 울 적에』에서도, 전통적 서사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인물들의 선택이 마을을 범죄와 재난에서 구하는 열 번째 버전이다. 거기서 인물들은 전통적인 종이책 서사의 인물들처럼 생각하고 결단하고 선택한다. 나머지 아홉 개의 버전을 <미소녀 게임> 같은 롤플레잉게임과 다르게 만드는 것도 사실은 니체의 영원회귀론이며, 그 바탕 위에서 허위의 신화가 진정한 신화를 막고 불행의 역사를 갈수록 짧은 주기로 반복하게 한다고 주장하는 발터 벤야민의 현대문명 비판론이다. 이렇듯 종이책의 위엄은 디지털 서사에서도 여전히 막강하다. 우리 시대에 어떤 종류의 종이책 서사들은 디지털 서사를 따라 잡으려고 애쓰지만, 반대로 디지털 서사들은 종이책의 역사를 내면화하려고 애쓴다. 어느 날 종이책이 사라진다고 해도 책의 형식은 끝까지 남는다고 말해야 할 이유가 그것이다. 지금 인터넷에는 이른 바 세계명작들이 이미지본이나 텍스트로 무수하게 떠 있다.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는 벌써 수천 권에 이르는 고전들을 전자 텍스트로 배포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국립도서관은 소장 도서 전체를 이미지 파일로 만들려는 기획을 수년 전부터 진행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모든 저작, 위고의 모든 저작, 발자크의 모든 저작을 거기서 만날 수 있다. 이들 기획은 인류가 출간한 책의 총합이 가장 방대한 디지털 서사라는 믿음을 안고 있다. 우리의 인터넷은 콘텐츠가 빈약하다는 데도 문제가 있지만, 디지털 콘텐츠들이 오로지 디지털만을 지향한다는 데도 문제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거기서 제시하는 방식으로 읽어 본 사람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