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꽁꽁 얼었던 길가 옆 쌓였던 눈더미들이 점차 녹고 있다. 지독히도 추웠던 이번 겨울이 이제야 자리를 비켜주나 보다. 추위를 많이 타는 필자도 무척 힘든 날을 보냈다. 더군다나 집 보일러가 동파되는 바람에 침대 위에서 이불을 꽁꽁 둘러 싸매고 보냈던 하룻밤의 기억은 끔찍했다. 문단도 유독 추운 겨울을 보냈다. 지난해 연말에 날아온 한해 성적표는 참담했다. 베스트셀러 신간 문학 서적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삶은 이어지고, 누군가는 새로운 결실을 맺을 터. 새로운 한해를 준비하고 여는 연말연시에 반가운 작품이 적지 않았다.
‘문단의 소문난 입담꾼’인 소설가 성석제는 장편 소설 『단 한 번의 연애』를 펴냈다. 본인의 첫 번째 연애소설이라는 이 책에서 그는 경북 포항을 배경으로 한 남성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렸다. 낄낄 웃게 만드는 그의 특기는 여전했고, 후반 ‘글로벌하게’ 배경이 커지는 것도 흥미로웠다. 특히 그가 이 소설을 집필을 하며 포항시로부터 1억 원을 지원받았다고 전해지면서 새삼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제주 출신의 소설가 현길언은 조선시대 제주의 거상 김만덕(1739~1812)의 생애를 그린 소설 『섬의 여인, 김만덕-꿈은 누가 꾸는가』를 펴냈다. 김만덕을 재조명한 것도 눈에 띄었지만 조선시대 조정에서 보낸 관리와 제주 토착 세력의 권력 대결이 비중 있게 그려졌다. 오랜 시절 축적된 제주도민들의 피해의식과 아픔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소설가 이호철은 1961년 발표한 단편 「판문점」과 그 뒤를 이은 단편 「판문점 2」를 함께 묶어 『판문점』을 52년 만에 내놔 자신의 오랜 숙원을 풀었다. 종교적 소설에 심취했던 정찬은 소설집 『정결한 집』을 통해 부당해고를 당한 노동자나 집총을 거부하는 청년 이야기 등을 통해 우리 사회 소외된 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지아는 5년 만에 소설집 『숲의 대화』를 펴냈으며, 3년 전 『제리』를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김혜나는 역시 문제적 소설 『정크』를 선보였다. 『표백』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던 장강명은 두 번째 책『뤼미에르 피플』을, 이재웅은 소설집 『불온한 응시』를 펴냈다. 시집으로는 10년 만의 침묵을 깨고 돌아온 이성복의 『래여애반다라』가 주목을 모았다. 앞선 여섯 권의 시집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시집으로 원숙한 시인의 정신세계가 그대로 드러난다. 시인은 이와 함께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번역해 펴내 눈길을 끌었다. 부지런히 시업을 이어가고 있는 황동규는 열다섯 번 째 시집 『사는 기쁨』을 펴냈고, 고영민 시인은 부드러운 시정(詩情) 속에 유쾌한 해학을 곁들인 세 번째 시집 『사슴공원』을 펴냈다. 신경림 시인은 시집 『가난한 사랑 노래』의 출간 25주년을 맞아 기념 시집을 선보였다. 개인적으로는 필자와 이름이 같은 황인찬 시인이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를 낸 게 반가웠다. 인터뷰로 만난 필자와 시인은 “대아그룹 황인찬 회장도 같이 있으면 재미있을 텐데”라고 깔깔댔다. 인터뷰 기사가 나갔지만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새해 벽두부터 산문집 출간이 활발했다. 몇 년 사이 출판계 대세로 떠오른 ‘힐링열풍’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시인 신달자는 『엄마와 딸』을 통해 여섯 번째 딸이었고, 이제는 세 딸의 어머니로 살아가는 일상에서 얻은 깨달음을 소개했고, 유안진 시인은 『상처를 꽃으로』를 펴냈다. 정호승 시인은 2006년 출간해 30만 부가 넘게 팔린『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의 후속편 격인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를 펴냈다. 시인이 읽은 글과 지인들의 만남을 통해 얻은 단상을 76개 에피소드로 나눠 펼쳐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신작 에세이 2편과 기존 책을 엮어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 전집(총 6권)을, 소설가 박범신은 터키 여행 산문인 『그리운 내가 온다』를 펴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도언은 『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를, 시인 김행숙은 『에로스와 아우라』를 선보였다. 문단의 한 이정표를 찍는 산문집도 나왔다. 김수영 시인의 미망인인 김현경 여사가 시인의 사후 45년 만에 그와의 추억을 담은 첫 산문집 『김수영의 연인』을 펴낸 것. 출간에 맞춰 김현경 여사의 용인 집을 찾았다. 여든여섯의 나이였지만 2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할 정도로 정력적이었고, 무엇보다 시인과 관련된 기억이 정확해 놀라울 따름이었다. 출판 시장에서 뜨겁게 호응한 것은 세계문학전집이었다. 영화, 뮤지컬 <레미제라블>에 쏠린 대중의 관심은 책으로도 이어졌고, 민음사 『레 미제라블』(총 5권)은 판매 합계 10만부를 넘겼다. 호사다마(好事多魔)일까. 이 책은 오탈자와 고어체 번역 때문에 독자들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관심은 확산되고 있다. 열린책들이 선보인 ‘세계문학’ 앱이 나흘 만에 2만 권이 다운로드 되며 화제를 모은 것. 하지만 헐값논란이 휘말리기도 했다. 세계문학전집을 출간하는 출판사들이 앞 다투어 30, 40% 할인 경쟁에 뛰어들어 우려도 일고 있다. 이와 맞물려 출판계의 도서정가제 개정 움직임에도 관심이 쏠렸다. 한국출판인회의 새 회장에 오른 박은주 김영사 대표도 도서정가제 개정에 강한 의지를 밝혔다. 올 겨울은 대한민국의 정권 교체기였다. 문단도 역시 현실 정치에 관심을 기울였다. 유신정권을 강력히 비판했던 김지하 시인이 밝힌 ‘박근혜 지지 선언’은 문단을 넘어 대선 정국에 큰 관심을 모았다. 김 시인은 여러 차례 ‘노골적인 발언’을 통해 때론 지지를, 때론 비판을 받았다. 이 때문에 2월 한국작가회의 총회에서는 그를 제명시켜야 한다는 날선 주장도 나왔다. 한편 공지영, 이외수를 비롯한 문인 출신 파워 트위터리안들도 대선 기간 중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한 시기였다.
예기치 않은 일도 터졌다. 소설가와 시인 1백37명이 대선을 앞두고 한 일간지에 ‘우리는 정권 교체를 원합니다’라는 선언문을 담은 광고를 냈다가,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고발을 당한 것. 작가들은 경찰서 앞에서 이를 규탄하는 선언문을 낭독했고, 한국작가회의도 여러 차례 고발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사당국은 대표 고발된 문인을 소환 조사하며 처벌 의사를 철회하지 않고 있다. 문학적으로 큰 성과보다는 여러 구설수와 잡음이 끊이질 않았던 올 겨울이다. 아무쪼록 다가올 봄에는 푸릇하고 따뜻한 소식들이 많이 들려왔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