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받아 책꽂이에 꽂아두고는 나를 적당히 방치했다. 무엇보다 귀찮았다. 시집을 마주하며 감정이입을 하거나 어떤 계획을 세우기에 나는 너무 게을렀다. 그냥 신경을 껐다. 한동안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지냈다. 일이 바쁘지 않은 날이면 곧장 집으로 가서 밥을 챙겨 먹었다. 그러고는 겨울 이불처럼 퍼져서 영화를 보거나 미국 드라마를 봤다. 야심하고 무료한 시간이 돼서야 시집을 꺼내 들고 아무 곳이나 펼쳤다. 어디를 펼쳐도 그 시에 담긴 풍경과 마음과 시간 따위가 불쑥 떠올랐다. 시집을 읽는 지금의 나와 시를 쓰던 과거의 나 사이에서 어떤 괴리를 찾을 때마다 나는 심하게 낯설었고 불안했다. 그건 벽 같았고 적막 같았다.
여수에서 지낸 열아홉 해와 전주에서 지낸 열두 해와 그리고 서울에서 지낸 나머지 시간들. 시집 속에는 내가 그간 지냈던 동네와 집들과 걸었던 골목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스치거나 깊숙이 관여했던 사람들과 실패한 감정들이 있었다. 시집을 들춰보는 행위는 남의 일생을 훔쳐보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는 호기심에 읽었고 어느 정도는 즐거웠으며 어느 정도는 슬펐다.
시집은 휴일 낮, 벽과 방바닥을 타고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처럼 내게 진동을 남긴다. 이 감정을 한 번 겪고 나서야 나는 시집을 객관적으로 바라봤다. 이리 쓰지 못해서, 저리 고치지 못해서 못내 아쉬웠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삭히면서 고치고 싶었던 시들이었다.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서 내가 생각하는 시의 형상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왜 나는 시를 쓰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행간까지 신경이 뻗어서 내 몸의 일부처럼 반응하게 되었을까. 처음을 생각한다. 그건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자의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숱하게 지나친 길이나 구름 따위였을지도 모른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지금 부족하지 않게 만족한다. 치열한 시간들은 자꾸 적을 만들고 나를 공격한다. 사는 동안은 무감각하고 싶다. 쓰는 동안 어차피 끄집어낼 감정들이기에 사는 내내 목을 매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 시집을 천천히 읽기가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서른 해를 겨우 넘긴 사랑과 아픔과 기쁨 같은 것들을 끄집어내 써내려간 시들은 다시 읽기가 두렵다. 그리고 나는 안다. 내가 읽기 두려워하지 않은 몇몇 시들은 형편없다는 것을. 결국 다시 써야할 것이다.
버나드 쇼는 어느 책에서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 토지에 대한 계급 독점이 이루어지고 나면 반드시 자본에 대한 계급 독점이 뒤따른다”고 말했다. 문학과 거리가 먼 정치적인 발언이지만, 나는 여기에 시를 대입해 본다. 시라는 토지의 독점 세력을. 자본이 없는 이곳을 넘보는 이가 드물기에 여기에는 독점의식이 생겨난다. 쉽게 자만에 빠지고 우월의식에 사로잡힌다. 곧 계급의식이 생겨나고 몰락하는 농노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세계를 부정하거나 한 단계 올라가거나 정복하기를 꿈꾼다. 문학의 몰락이며 독자를 잃어가는 방식이라 생각된다. 내가 가난하게 살겠다는 말이 아니며, 이 안에서 계급투쟁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시와 삶 앞에서 겸손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요즘 하는 일은 열심히 세상을 다시 보는 일이다. 지금까지 많이 써먹었으니, 써먹은 만큼 다시 채워 놓아야 한다. 다행히 나는 속이 좁은 놈이라 조금만 더 노력하면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시집은 이렇게 기약 없다.
※필자는 재단의 2012년 대산창작기금을 받아 창비에서 시집 『거인을 보았다』를 출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