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우리말인 ‘그림’은 ‘그리워하다’라는 어원에서 왔다. 반 고흐, ‘그림’을 통해 두 여인을 ‘그리워하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 문장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어느 편지에 언젠가는 자신의 그림들이 물감 값 이상의 가격에 팔릴 날이 올 거라고 적고 있다. 이는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그가 온 생애를 다해 남긴 작품 중 화가의 품을 떠난 그림은 단 한 점, 동생 테오에게 선물한 「아를의 붉은 포도밭」(1888)이라는 그림이 우연히 한 무명 화가에게 팔렸을 뿐이다. 잘 알려져 있듯 그의 극빈은 종이 구입에도 어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그렇다고 숨 쉬는 일을 포기할 수 없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포기할 수 없던 그는 그림 뒷면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에는 그림 위에 물감을 덧칠해 다른 작품을 완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캔버스의 재활용, 여기까지는 그의 전기적 사실일 뿐이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카페에서, 르탕부랭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1887)라는 그림에 집중된다. 이 작품은 고흐의 파리 시기(1886~1888), 한 여인을 모델로 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눈여겨 볼 점은 그가 남긴 36점의 자화상 중 27점이 파리 시기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모델을 구하기 어려웠던 화가는 자화상을 통해 양식적 변화와 발전을 이루게 된다. 1887년 한 해에만 자화상 22점을 그렸다. 우리는 그 자화상을 통해 고흐의 고뇌에 찬 내면을 다양한 각도에서 마주하게 된다. 가끔은 자의식 덩어리인 우리 자신을 마주할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생각해보면 고흐에게도 차마, 거울 속 자신을 대면하기 어려운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연인에게 모델이 되어주기를 요청했던 것일까. 「카페에서, 르탕부랭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라는 그림이 자화상을 가장 많이 남긴 1887년에 그려진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자신의 자리에 잠시 연인을 초대한 것이다. 이어지는 질문, 고흐의 연인 세가토리는 어떤 인물일까. 그림 속 까페 테이블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한 인물. 그녀는 파리 뒷골목 62번지에서 까페를 운영하던 이탈리아 출신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이다. 과연 화가 고흐에게 ‘사랑’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랑에 빠지면 태양이 더 환하게 비추고 모든 것이 새로운 매력을 갖고 다가온다. 깊은 사랑에 빠지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건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난 사랑이 명확한 사고를 막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사랑할 때 더 분명하게 생각하고 이전보다 더 활동적이 되거든.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 그리고 사랑은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준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자기 일에 더 적합한 사람이 되어간다.1)
▲「카페에서, 르탕부랭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고흐, 1887)
그는 여기서 ‘사랑에 빠지면 태양이 더 환하게 비추고’, 모든 사물이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랑’에 빠지는 일을 ‘아름다운 일’이라고 규정한다. 그가 그림 그리는 ‘일에 더 적합한 사람이 되어’가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촉매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포함한 반 고흐 생애 최고의 걸작은 파리에서의 2년이 아니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이 시기 사실주의적인 화풍에서 벗어나 인상주의를 경험하고 화풍의 급격한 변화와 발전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는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파리의 연인, 세가토리는 오랜 시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림 속 그녀는 고흐의 섬세한 붓질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 특히 그녀의 얼굴에 갈색과 초록색을 얇게 펴 발라 그늘을 만든 뒤, 살구색을 덧칠한 점이 돋보인다. 훗날 안타깝게도 값싼 안료를 사용한 이유로 빛에 탈색되어버린 이 그림은 복원 과정을 거치게 된다.
놀라운 일은 그림의 복원을 위한 엑스선 촬영 당시, 또 다른 여인의 초상화가 투시된 사실이다. 세가토리 뒤에 숨겨진 한 여인 역시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 검은 선으로만 존재하는 여인의 동공은 텅 비어있다. 전문가들의 학술적 연구에 의하면, 이 여인은 고흐가 네덜란드 시기(1881~1885)에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정리하면 네덜란드에서 그린 여인의 그림 위에 1887년 파리의 연인을 덧칠해 그려 넣은 것이다. 우리는 먼저 그려진 여인이 고흐의 연인이었다고 확신할 수 없으나, 한 작품에 두 그리움이 중첩되어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눈빛은 엑스선이 아니어서 그림을 투시할 수 없다. 그러나 ‘연인 뒤의 여인’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 시작된다. 반 고흐, ‘그림’을 통해 두 여인을 ‘그리워하다.’ 그는 “사람들이 싹을 틔울 수 있는 힘은 바로 사랑에서 나오는 것”2)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봄날의 싹을 틔울 수 있는 힘도 그로부터 나오게 될까.
1) 빈센트 반 고흐, 신성림 옮김,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예담, 2005, 94~95면. 앞의 책, 151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