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김현승_시인. 1913~1975년
시집 『김현승시초』『옹호자의 노래』『견고한 고독』『절대고독』『마지막 지상에서』 등

아버지 다형선생에 관해 명백하고 구체적인 증언을 하기엔 돌아가실 당시까지의 나는 너무 어렸다. 그러니까 내 기억속의 부친은 어린 막내에게 비친, 해답 얻을 수 없는 질문들을 여럿 품어가진 미지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가 간직하고 있는 아버지와의 추억과 인상은 대체로 미완의 형태를 하고 있다. 온전히 성장해서 그 분의 이모저모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 자식의 회상과는 사뭇 다른. 그래도 내 기억 속 나만의 자료실에 보관된 부친의 모습은 특별하다. 아버지 생전 나는 그분의 시도 제대로 읽을 줄 몰랐으며 한 인간으로서 지닌 고뇌의 부피나 질량에 대해선 더더욱 파악할 길 없었던 어설픈 철부지였다고 하는 편이 옳다. 월트 휘트먼의 시구처럼 ‘창 밖에는 라일락이 찬란하게 피어있는’ 4월 어느 날 그 분이 급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나셨을 때에도 나는 그 이별을 온전히 슬퍼하지 조차 못했던 것 같다. 나는 다만 어리둥절했을 따름이다.
아버지는 아무도 온전히 밝힐 수 없는 고독의 비밀을 안은 채 떠나가셨다. 우리 모두는 그 분의 고독에 대해 다만 추론할 뿐이다. 어린 나를 데리고 외출 할 때에도 아버지는 ‘고독’하셨던 것 같다.
그 외출은 지금 생각해도 여느 부녀의 것과는 다른 독특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시내 나가자’ 하시면 나는 얼른 그 분의 손을 잡고 따라나섰다. 대개는 광화문 근처의 서점에 들러 내가 읽을 만한 책들을 사주시고 곧바로 근처 중국집으로 향하는 것이 순서였다. 시키는 음식은 언제나 자장면, 그러나 매 번 내 것 한 그릇이었다. 내가 당시의 귀한 별식을 허겁지겁 그것도 면만 집중적으로 공략 해 정작 자장의 진수들은 언제나 밑에 가라앉게 되는 형태로 먹어치우는 동안 맞은편에 앉은 아버지는 줄곧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계셨다.
어린 시절의 기억속에서도 지울 수 없는 것은 그 유명한 커피향기이다. 일단 대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 반기는 것은 마당 가득 채워진 커피 향이었다. 그러니까 그 시절의 ‘별다방’이 우리 집이었던 거다. 커피는 인스턴트가 아닌 원두커피였다.

‘Hills Bros.’라고 찍혔던 원형 양철통 속의 커피가 아버지의 보물이었다. 부친은 직접 포트에 물을 끓이고 원두커피를 조그만 체에 담아 걸러서 잔에 따르시고 대개는 크림과 설탕을 곁들여 내놓으셨다. 지금도 미국의 슈퍼마켓에서는 ‘Hills Bros.’가 염가의 서민커피로 팔리고 있지만 그 시절 맡았던 그 향기의 세련된 그윽함은 아버지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의 코끝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커피이외 에도 아버지가 사랑했던 기호식품들은 또 있었다.
오남매들 중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혼자 드시던(!) 그것들. 이런 때 아버지는 어린아이 같으셨다. 감춰두고 혼자 드시다니. 그러나 막내인 내게는 예외였다. 아버지는 가끔 나만 불러 그 귀한 과자와 음료를 먹이시곤 하셨다.
내가 음악을 전공하게 된 이유는 음악선생님이었던 모친의 영향 때문이었겠지만 결국 예술의 세계를 사랑하신 부친의 크나큰 후원의 덕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슴 찡한 아버지의 모습 중 하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레슨을 받으러 가는 날 아침, 아마도 레슨비가 당장 수중에 없으셨는지 방과 후 아버지는 학교 앞으로 오시겠노라고 하셨다. 오후에 학교 앞 빵집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아마도 초등 시절 아버지 손잡고 시내 나들이 간 중국집에서 자장면 먹은 이후 최초로 마주 앉은 아버지의 얼굴은 이미 내 어린 기억 속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미 많이 주름지고 쇠약해지신 모습이었다. 레슨비를 건네시는 아버지는 까닭 없이 흐뭇한 표정으로 남은 기간 입시 준비 열심히 잘 할 것을 당부하셨다. 아, 아버지가 그 하루 동안 나의 레슨비를 마련하시노라 어떤 애를 쓰셨는지 당시의 나는 알 수도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처럼 영원히 철들지 않는 천둥벌거숭이 막내의 모습을 나는 오래도록 버리지 못했었다.

부친을 생각할 때마다 예술적 자아와 생활인으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힘든 부분이 얼마나 많았을까 다시금 추측해보며 가슴을 쓸어내릴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분은 두 국면 사이를 사뭇 위태롭게 줄타기 하시는 듯 하면서도 결코 균형을 깨뜨리지는 않으셨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내 부친을 불멸의 작곡가 요한 세바스찬 바흐와 비슷하다고 자주 생각한다. 마치 바게트 빵처럼 겉으로는 딱딱하고 건조해 보이나 뚫고 들어가면 부드러운 속살의 감격을 지녔다는 점, 높은 예술혼을 지니고 그것을 생업으로도 삼으셨지만 결코 빵을 위해 구차해지지 않으셨다는 점, 한밤중에 깨어 음악을, 시를 만드는 작업에 삶의 의미를 걸었지만 처자식에 대한 애정과 의무 또한 중하게 여겼다는 면들에서 아버지와 바흐는 많이 닮으셨다. 현실의 비리나 불합리를 도저히 묵과하지 못하고 자주 열을 내며 의분을 금치 않았던 것과 절제와 검소는 몸에 밴 습관이었고 제자들을 향한 사랑은 거의 본능적이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삶과 예술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합일체라는 신념을 몸소 실천했다는 면에서 결정적으로 일치한다.
그래도 내게는 언제나 엄격한 지도편달과 동시에 순전한 애정을 숨기지 않으셨던 육친으로서의 모습이 진하게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부친의 내면에 어떠한 고뇌와 갈등이 있었는지는 다만 그분의 시편(詩片)들을 통해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나는 사실 오랜 동안 아버지의 시들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치 바흐의 음악을 정식으로 대면하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그 분의 시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내가 많이 자라야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오랫동안 나는 의식적으로 그분을 뇌리에 너무 오래 머물게 하지 않으려 애썼다. 안 그러면 필경 아무일도 해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아마도 유학시절이었을 것이다. 어린 딸을 병으로 일찍 떠나보낸 애끓는 어느 아버지의 글을 읽었다.
‘네 웃음과 네 말소리, 네 숨결이 이렇게 헤어진 것으로 영영 끝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언젠가 너를 반드시 다시 만난다는 그 희망, 천국에서 다시 널 볼 수 있다는……’ 이는 바로 그대로 아버지를, 그리고 지금은 어머니도, 떠올릴 때의 내 심정이다. 당신의 마지막 생신잔치가 끝난 이후 생전 무단으로 열어보시지 않는 내 방문을 갑자기 열고 ‘너. 밥은 잘 먹은거냐?’라고 챙기시던 그 아득한 미소를 띤 얼굴이 정녕 마지막이라고 나는 절대로 믿고 싶지 않다.
한국 시단이 다형선생으로 인하여 그 스펙트럼을 더욱 더 풍요롭게 보유하게 되었다면 나와 내 형제들은 아버지 덕분에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자로 살 수 있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물려주신 위대한 유산, 값진 정신과 신앙의 유산은 어떤 동산(動産)이나 부동산보다도 힘이 세고 영구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