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꼭 30년 전이다. 군에 입대한 지 1년 남짓, 이른 바 ‘군대 맛’이란 게 어떤 건지 제대로 알아가던 1983년 겨울 어느 일요일 아침, 야간 당직근무를 마치고 대대 관측소 내무반으로 들어선 나는 평소 같았으면 이내 모포를 깔고 잠 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갔어야 했다. 그런데 주간근무가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병력이 빠져나간 썰렁한 내무반은 그날따라 유난히 을씨년스러워 보였고, 기댈 곳만 있어도 잠이 드는 ‘군바리’의 생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갑자기 불면증 환자라도 된 듯 눈이 말똥말똥해지는 거였다. 흰 머리가 늘어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고, 고무신 거꾸로 신은 여자친구가 눈앞을 오락가락 하고, 소고기국에 이밥 먹고 싶으면 얼른 넘어오라는 대남방송은 메아리가 되어 떠돌고, 바람막이로 내무반 창문에 쳐놓은 비닐은 쉴 새 없이 파락거리고…….
그래서 텔레비전을 켰다고 한다면, 그 시간 이후로 이어지게 될 참으로 소중한 인연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 모른다. 어쨌든, 그때의 나는 모포 안에 파묻었던 몸을 일으켜 내무반 침상 끝 녹색 페인트로 칠한 투박한 선반 위에 올라앉
아 있던 텔레비전으로 다가가 전원 스위치를 돌렸다. 리모컨은커녕 버튼도 없던 시절이고, 스위치 하나로 전원도 켜고 볼륨도 조절하던 때였다. 그리고 당연히 흑백텔레비전이었다. 두어 해 전부터 세상에는 컬러텔레비전이란 게 나와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긴 했지만 전방부대 내무반에까지 보급되려면 세월이라 해야 할 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던 때였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때 내무반에 있던 텔레비전의 크기는 14인치를 넘지 않았다. 그야말로 손바닥만 했다. 게다가 또렷하기는커녕 흐릿하게나마 잡히는 채널도 두세 개를 넘지 못했다. 그 두세 개의 채널 가운데 대남선전용 개성텔레비전방송까지 끼여 있었으니, 당시 전방부대의 내무반 생활이란 건 그야말로 별 볼일이 없었다.
텔레비전을 켜고 다시 모포 속으로 몸을 구겨 넣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KBS, TV문학관, 재방송. (본방송은 토요일 밤 10시였다.) 비장한 음악이 흐르면서 <어느 시인의 죽음>이라는 타이틀이 나타났을
때, 왠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시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막연한 설렘에 ‘죽음’이라는 단어의 무거움이 겹치면서 팔베개를 하고 삐딱하게 누워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일어나 앉았다. 그때 뇌리를 스쳐간 것은 <닥터 지바고
>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였다. 그가 쓴 것 중에 유사한 제목의 작품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원작자의 이름이 나타났지만 내게는 생소한 작가였다(KBS 홈페이지에서 <어느 시인의 죽음>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이 나온
다: 1983년 8월 27일 밤 10시 TV문학관으로 방영. 러닝타임 120분. 원작 호영송, 극본 박병우, 연출 장기오. 한 불행한 시인의 양심과 문학적 신념을 보여줌으로써 이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기준의 허와 실을 파헤치면서 시를 쓰는 이유
와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 등을 조명해 본 드라마).
두 시간 동안 나는 꼼짝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응시했다. 그것은, 내게는 아주 소중한 경험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닐지 모르는 것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것이 될 수 있다는, 참 당연한 그 진리를 나는 그 두 시간을 통해, 어쩌면 태어나 24년 만에 처음으로 인식했을지 몰랐다. 지금은 어느새 몸집 넉넉한 원로배우가 되어 있지만 당시만 해도 강단과 예민한 감수성이 표정 하나하나에 살아 있던 미남배우 노주현이 연기한 ‘시인’은 예술의 고매함과 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그래서 현실과의 타협을 ‘죽음’처럼 여기는 천상의 예술가였다. 그때까지의 나는 작가나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우수한 성적의 경영학과 졸업생으로 번듯한 기업에 취직해 호의호식하고 싶은 생각 밖에 없던, 영락없는 부르주아지가 나였다.

▲ © 운영자

그날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마치 첫사랑에 가슴을 앓는 소년처럼 멍하니 오후를 보냈고, 저녁을 맞았다. 다시 야간당직근무를 서기 위해 관측소로 올라가다 마주친 서쪽 하늘의 놀은 예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피멍 같았다. 조금의 과장을 섞어 말하면, 그때 이미 나는 시인이거나 작가였다. 그렇게 일단 풀려 나가기 시작한 우연이라는 운명의 끈은 다시 한 번 내게 드리워진다. 그로부터 며칠 뒤, 포병대 관측장교가 야간순찰을 나가며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내게 맡긴 것이다.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 1983년 10월호. 예전 같았으면 휘리릭 넘겨보고 던져버렸을 잡지가 무슨 경전처럼 보였다. “제7회 이상문학상 발표”라는 흰 글씨와 “창간11주년 기념 4대 특집호”라는 붉은 글씨가 시인 김용호 선생이 그려진 표지에 도드라져 있었다. 네 개의 특집 중 하나였던 ‘나의 문학적 자화상 28인’이라는 코너는 잡지 맨 앞쪽에 실려 있었는데, 첫 페이지에 적힌 스물여덟명의 이름을 하나씩 읽어나가던 내 눈에 한 이름이 빨려들 듯 다가왔다. 호영송이었다.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나는 처음으로 받은 연애편지를 읽듯, 그의 글을 읽었다. 그는 나를 알지도 못했지만, 그의 글은 내게 쓴 글이나 다름없었다. “이 시대, 나는 무엇을 쓰자는 작가인가?” 당신이 쓴 10여 장 남짓한 산문의 제목이었다. 관측장교가 순찰을 마치고 관측소로 다시 돌아온 한 시간 동안 내가 읽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예술가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는 눈을 통해서 세계를 본다”는 말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글의 말미에 적힌 약력을 통해 그가 이미 약관의 나이에 빼어난 시를 썼던 시인이며 10년 전에 「파하의 안개」라는 독특한 알레고리 소설로 문단의 주목을 받은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우연의 이름으로 다가온 인연의 끈은 내게 편지를 쓰도록 만들었다. 물론 호영송 선생께였다. 그 이후로 선생과 나는, 내가 등단하게 되는 1987년까지 4년여 동안 100여 통에 이르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정식으로 문학수업을 받아본 적 없던 내게 그 4년은 그 어떤 강의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문학수업의 기간이었다.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어서, 불과 4년 만에 나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소설가가 되어버렸다. 그 시작이 1983년의 겨울, 중부전선의 대대관측소 냉기 가득한 내무반에서 손바닥만한 텔레비전으로 본 2시간짜리 <TV문학관> 재방송 드라마였다는 사실은, 생각해보면, 참으로 꿈같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