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임채수_수필가, 1944년생
칼럼집 『세월의 무게(1)』, 산문집 『세월의 무게(2)』 등
순탄하게 커가는 줄로만 알았던 열 살 외손녀의 일상에 잇따라 ‘사고’가 터졌다. 지난 6월 학교에서 놀이기구에 얼굴을 부딪쳐 송곳니가 빠지는 부상을 당해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더니, 7월 들어서는 방과 후 피아노 교습 중 “운지법(運脂法)을 따르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짜증이 났던지 건반을 두 손으로 내려친 일로 엄마에게 꾸중과 함께 몇 번 쥐어 박히고는 집을 뛰쳐나와 외가를 찾아왔다. “이제 집에는 안 가겠다! 할아버지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해 달라”며 ‘가출’을 선언한 것이다. 이가 빠진 사고야 진료가 순조로웠고 제 부주의도 깨달아 곧 평정을 되찾았지만, 늘 착하게만 보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놈의 ‘가출소동’은 큰 충격이었다. 사춘기 아이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성장통(成長痛) 징후를 닮아서다.
딸네 집은 내가 사는 집과 직선거리로 200여 미터 거리 가까이에 있지만 손녀 혼자서 외가를 오간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니 외갓집 위치나 오가는 길쯤은 익혔겠지만 혼자서 길을 나서는 것은 절대 안 되는 일로 단단히 일러온 터라, 겁이 나 계속 뛰어온 듯 얼굴이 눈물과 땀투성이였다. 대충 씻기고 진정시켜 자초지종을 듣고 엄마와 화해하는 자리에서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다더냐”며 딸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가출소동이 꼭 정해진 학교일과나 과외활동 부담 때문만은 아닌 듯하지만, 아이의 일과가 어느 한 때도 제 의지대로 무엇인가를 해 볼 시간이 없는 것은 사실이고, 온가족이 기울이는 사랑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손녀는 그래도 여느 맞벌이 자녀보다는 여건이 나은 편으로 생각해왔다. 제 엄마가 출퇴근시간이 일정한 중학교 교사에, 대학교수인 아빠도 주말 하루는 다른 일을 제쳐놓고 주로 야외자연의 경치를 찾아 아이와 보내고 있으며, 손녀라면 ‘껌뻑 죽는’ 외조부모가 성심으로 돕고 있음에도 성에 차지 않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엄마 품에서 응석이나 부릴 나이인 생후 14개월 무렵부터 어린이집에 맡겼던 것이 불만으로 쌓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아이에게 쏟았던 정성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처방은 그래도 내리사랑뿐임을 깨달으며 재다짐하는 것밖에 없었다. 어른들의 삶이 날로 팍팍해지면서 자녀양육은 더 어려워진 느낌이고, 어린아이라 해서 삶의 무게가 가볍고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닌 것이 현실이다.
혈손(血孫)으로 하나뿐인 외손녀를 나는 ‘솔이’로 부른다. 10년 전 울진 소광리 소나무 숲 탐방 중 아이의 출생소식을 전해 듣고, 그곳 울울창창한 소나무의 기상을 닮아주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은 이름이다. 외손녀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퇴직 후 은거 중인 일상에서 특별한 감동이자 기쁨이었다.
아이는 특별히 애지중지한 것도 없었지만 병치레 잦지 않았고 순조롭게 자란 편이었으나, 갓난아기 때는 돌보기가 힘든 울보, 떼보였다. 백일을 맞기까지 별났던 기질이 지금도 생생한데, 6주간 산후조리원에서 지낼 때 시도 때도 없이 우렁차게(!) 우는 바람에 제 엄마를 힘들게 했다. 아기들은 하루 열 시간 이상을 자며 엄마 젖을 빠는 일이 주요 일과라는데, 한 시간 이상 자기가 드물게 자주 깨어나 우는 바람에 보육사들을 곤혹스럽게 하기가 일쑤였고, 특히 목욕할 때면 어찌나 맹렬히 울어대던지 식구들은 그야말로 전전긍긍해야 했다.
어릴 때부터 역마살이 낀 듯 바깥나들이에 관심이 많아 물놀이 전날이면 미리 수영복을 입고 잠자리에 들었고, 김밥 등 준비물에 차질이 없도록 두 번 세 번 엄마에게 다짐을 받던 아이였다. 우유 생산과정 견학을 다녀와서는 “엄마! 우유는 ㅅㅇ우유를 마셔야겠어”라며 천연덕스럽게 한마디 하던 아이였고, 치카치카(양치질) 후에는 좋아하는 요구르트조차 “안 먹겠다!”며 단호히 거절하는 바람에 간식을 내민 할머니를 어리둥절하게 하던 아이였다. 소아과 주치의가 진료를 끝내면 주던 사탕을 어느 날인가는 주지 않자, 의사를 빤히 쳐다보며 손을 내밀어 의사로부터 두 배로 사탕을 받아내던, ‘약속과 규칙에 충실’하던 녀석이며, 엄마 아빠의 말다툼 끝에 엄마로부터 한마디 핀잔을 듣고는 제 아빠를 향해 “아빠! 왜 저 여자와 결혼했어?”라는 일갈(一喝)로 부부싸움을 끝내게 하던 놈이다.
손녀가 태어나면서부터 우리 부부의 일상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노후는 서울을 떠나 살기로 하고 시골에 거처까지 마련했으나, 아내는 손녀가 태어나자 “아이를 가까이서 보지 않고는 살 수 없다”며 귀향을 거부했다. 식탁 대화는 대부분이 손녀의 동향에 관한 것이다. 아이가 제법 굵고 긴 황금색 똥을 눈 것을 보고 한바탕 크게 웃는 식이다. 두 딸을 키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편리한 육아용품이 개발되었고, 나아진 주거환경에, 어린이집 등 탁아 도움을 받고 있음에도, 육아의 어려움은 더해진 느낌이다. 그래서 늘 맑고 밝은 웃음 속에 커가는 손녀의 모습에서 행복을 느껴왔지만, 언제부턴가 틀에 갇혀 창공을 마음껏 훨훨 날지 못하고 서툰 날갯짓으로 푸득거리는 어린 영혼의 면면을 대할 때마다 애처로운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