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해외로 문학기행을 떠난 우리 대산대학문학수상자들은 베를린 쿠담 거리에 위치한 ‘문학의 집(Literaturhaus)’, 도심 속 예쁜 정원을 간직한 이곳에서 독일에 사는 일본작가, 요코 다와다를 만났다. 우리들은 세계화로 인해 불분명해진 경계 속에서 희망과 혼란을 동시에 목도하고 있는 세대이다. 독일어와 일본어로 문학을 하고 있는 요코 다와다와의 만남은 경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또한 작가의 문학과 ‘언어’가 갖고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논의가 오고 갔다. 노선정 번역가의 통역으로 약 두 시간 동안 진행된 이번 대담 내용을 소개한다.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요코 다와다 작가(오른쪽 첫번째)와 노선정 번역가(오른쪽 두번째)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이하 수상자) ㅣ 선생님의 작품 『목욕탕』을 읽으면서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 생각이 났습니다. 바틀비의 행동이 자본주의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으로 느껴졌다면, 『목욕탕』의 주인공은 언어 중에서도 모국어에 대한 저항으로 느껴졌는데 이러한 해석에 무리가 있다고 보십니까?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해 본 적이 있나요?

요코 다와다(이하 요코) ㅣ 저항의 관점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정체성을 느낄 때는 일본이나 독일 어느 한쪽에 존재할 때가 아니라, 그런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때입니다. 모국어와 독일어에서 느끼는 내 감정을 저항이나 정체성의 문제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내게 모국어와 독일어는 씨줄과 날줄로 서로 촘촘히 짜여 있는 스웨터와 같아서 그 경계를 나누기 힘듭니다. 아마 질문자가 독일에 좀 더 머물면서 고민을 한 후라면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았을 거에요(웃음).

수 상 자 ㅣ 『목욕탕』에서 화자가 ‘와타시(わたし, 나)’ 라는 주어를 거부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자기검열 없이 늘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 인한 고통은 분명 존재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작가에게 가장 크게 작용하는 관성인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일본어와 독일어 두 가지 언어로 다년간 글을 써오셨지요. 모국어와 외국어로 글을 쓰면서 이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 되었습니까? 모국어의 관성에서 자유로워지는 대안으로 외국어를 배우는 것 대신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요코 ㅣ 타국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만이 다른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국어를 배운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여러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할머니와 대화할 때는 사투리를 쓰고, 학교에 가면 학술 언어를 사용하지요. 이처럼 ‘나’라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나’가 여러 개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 질문자가 말한 대안이 될 수 있겠지요. 내가 여러 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된다. 여러 개의 ‘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본성입니다. 처음부터 갈등이 있어서 해소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를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수 상 자 ㅣ 말씀대로 한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어긋남과 오해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소모가 적지 않습니다. 거기에 매일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고 사용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어휘가 사라지거나 지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동력을 찾고 계십니까?

요코 ㅣ 물론 힘든 일이지만,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간의 ‘차이’는 극복해야 할 간극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 사이 갈등이 없고, 합의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대화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 아닐까요. 비유를 하자면, 맛있다고 하루 종일 초콜릿만 먹을 수는 없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매운맛, 신맛 등등 여러 가지 맛을 먹어야 즐거운 것 아니겠습니까.

수 상 자 ㅣ 『목욕탕』의 서사 구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소설은 새로운 장으로 넘어갈 때마다 ‘사실 나는 사진 모델이 아니다’, ‘크산더는 사실은 사진사가 아니고 독일어 선생이다’ 하는 식으로 앞장에서 한 얘기를 부정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이렇게 구성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요코 ㅣ 어려우면서 중요한 질문이군요. 예를 들어 나는 학생이지만 학생일 뿐만 아니라 창녀일 수도 있다. 앞의 답변이 반복되지만 한 인물에 내재된 여러 가지 실재성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수 상 자 ㅣ 소설 『목욕탕』과 에세이 『영혼 없는 작가』는 아름다운 산문이지만 시적 감동도 느껴집니다. 현재 시를 쓰고 계시는지 애송하는 시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요코 ㅣ 평소에 시를 굉장히 많이 읽고 시적으로 쓰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직접 시를 쓰기도 하지만 많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읽은 시 중에서는 괴테가 아랍 사람들에 대해 쓴 시가 마음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동양에 대한 이해와 낯설음이 오리엔탈리즘과는 다른 인식으로 나타나 있어 흥미로웠지요.

▲요코 다와다(오른쪽)

수 상 자 ㅣ 작가로서 특별히 좋아하거나 아끼는 단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요코 ㅣ 등뼈, 척추라는 뜻의 독일어 ‘Rückgrat’의 어감을 좋아합니다. 발음하면 혀의 모양도 그렇고 어딘지 구불구불한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나선을 의미하는 ‘Spirale’도 좋아하죠. 피곤할 때 이 단어들을 생각하며 척추를 곧추 세우곤 합니다(웃음).

수 상 자 ㅣ 우리는 자동화된 언어작용을 거부함으로써 상투적이고 관성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익숙한 언어를 낯설게 보고, 또 낯선 언어에 익숙해지기 위해 아프리카 말을 배우시는 등 끊임없이 노력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처음 독일어를 배울 당시와 지금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책이나 인터넷 같은 미디어의 범람으로 어떤 존재에 대해 알고 나서 언어를 배우는 것이 가능합니다. 존재와 언어 두 가지가 모두 낯설 때와, 존재는 어느 정도 익숙한데 언어만 낯설 때의 차이는 어떤 것인지 직접 경험하신 선생님께 듣고 싶습니다.

요코 ㅣ 내가 독일을 모르고 독일어를 배웠을 때와, 지금 젊은이들이 낯선 언어를 배우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방금 얘기한 대로 현재의 젊은이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인터넷이나 미디어를 통해 얻는 정보들이 생동감을 주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내가 독일에 처음 왔을 때, 학생들과 교수는 수업 중 서로 반말을 하고 교수와 학생이 밥을 먹을 땐 더치페이를 하더군요. 이런 생동감들은 인터넷 같은 정보들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 상 자 ㅣ 인터넷이나 뉴스 등에서 제공하는 표면적인 정보나, 고착화된 집단 언어가 개별적 존재의 다양성을 섬세하게 드러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런 집단 언어와 개별 언어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노력이 문학일수도 있겠지요. 선생님은 문학 말고 그런 노력의 대안으로 어떤 것을 생각하십니까?

요코 ㅣ 아주 철학적인 문제군요. 개인의 다양한 실체를 보편적인 언어로 드러내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다양한 생각을 가진 미디어들을 두루 읽어보는 것이 그 간극을 좁히는 대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독일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아주 작은 집단까지도 그들을 대변하는 미디어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른 활발한 토론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몇몇의 거대 미디어가 모든 것을 장악하고, 또 주입하고 있는 미국이나 아시아 문화와는 매우 다른 경향이지요.

수 상 자 ㅣ 모국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국경을 넘는 것 또한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처음 유럽에 왔습니다. 하지만 낯선 타지임에도, 타지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역시 익숙한 것들과의 조우 속에서 우리에게 큰 안도감을 줍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에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스타벅스에 들어갔을 땐 내 집 같은 안전함을 느끼는 것. 외국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의 관성은 변하지 않고 몸이 익숙한 데로 기웁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물리적인 이동을 넘어 다른 변화를 필요로 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이 겪었던 국경의 경계에 대한 경험과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요인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요코 ㅣ 관광객의 신분으로 국경을 넘느냐, 아니면 거기 살려고 가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관광객의 신분으로 외국에 온다면 당연히 스타벅스에 가서 안도감을 느끼겠지만, 그 안에 들어가 살면 전혀 다른 것을 접하게 되지요. 그 공동체 내에 편입하느냐 마냐의 차이인데, 독일에 온 관광객이라면 식수가 필요할 때 당연히 생수를 사먹겠지요. 하지만 거주자들은 밥할 때 수돗물을 씁니다. 일본이나 한국과 달리 독일의 물은 석회수인데 말입니다. 또 관광객으로 독일에 왔다면 따뜻한 한식을 먹을 수도 있지만, 독일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이라면 그들이 먹는 찬 음식(샐러드나 빵과 같은)을 먹게 됩니다. 그럴 때, 내가 국경을 넘었구나, 라는 자각을 하게 되지요.

▲ 요코 다와다 작가(가운데), 노선정 번역가(왼쪽 세번째)와 수상자들

이 자리는 요코 다와다라는 작가를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독일에서 처음으로 독일에 거주하는 사람과 만난 자리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이라면, 우리들은 이 만남을 통해 ‘석회수’라는 말을 만났다. 기행으로 독일에 왔기에 어떤 공동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지 못했던 우리들에게 국경을 넘어간 한 사람이 관광과 거주 사이에서 건넬 수 있었던 단어였다. 이 단어가 우리들에게 ‘경계’를 실감하게 해주었고 그 경계에서 문학을 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지하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