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린 그때 러시아 차(茶)를 마시곤 했다. 떫으면서도 쓴 맛이 도는 그 차이름은 ‘이반-차이’였다. 우스꽝스러운 이반-차이.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거무틱틱하게 마른 찻잎을 두고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다. 러시아어로 차를 ‘차이’라고 하니 무리가 아니었다. 이반의 차. ‘이반’이라는 상호라면 어지간한 러시아 인들에게 친숙하리라 여겼다. 성인 요한을 기리는 이반은 왕부터 농노에 이르기까지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막 써온 러시아의 대표 이름이다. 이반-차이라면 그 이반들이 먹는 차라는 뜻인가. 다시 말하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러시아 차라고 나는 단정 지었다. 그건 내가 러시아에 있을 때도 듣도 보도 못한 거였다. 하기야 내가 아는 차라고는 텔레비전에서 선전하는 ‘ 톤’이나 ‘아마드’같은 상표의 차였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주로 립톤을 마셨다. 시장에 가면 줄지어 선 키오스크에서도 주로 그런 것을 전면에 내놨다. 어쨌건 눈여겨보지 않은 탓인지 나는 한국에 나와 김을 통해 처음 들었다. 이반-차이. 그 어감은 우스웠다. 어려서 각인된 그 이름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일까. 동화 ‘바보 이반’. 실제 바보가 아니라 무서울 정도로 미욱하면서도 의뭉스런 이반이었다. 그래도 바보를 앞세운 그 제목은 머리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꼼짝하지 않았다. 새로운 ‘이반’은 정색을 하며 씁쓰레하면서도 떨떠름하게 내 입을 파고들었다. 비릿한 날내가 감도는 것도 같았다. 달갑게 다가오지 않는 그 차를 훌쩍거리며 우린 시베리아에 대해, 정확히 말하면 시베리아 답사에 대해 조심스레 이야기 하곤 했다. 시베리아에 관한 한 김이 전문가라서 그의 말을 들으며 차를 조금씩 흘려 넣었다. “몸에 좋은 거요!” 그는 내 잔을 채울 때 늘 그런 말을 자신 있게 덧붙였다. 김이 바이칼호수 근처에서 직접 따 만든 것이라고 자랑했다. 이반-차이에 대한 호기심은 시베리아에 대한 관심과 함께 내 안에서 움텄다. 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은 사할린에서 태어난 고려인 2세였다. 그의 러시아식 이름이 이반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이반-차이가 그 뿌리를 드러낸 건 시베리아의 ‘체르니셰프스크’라는 조그만 도시를 앞두고서였다.
2 ‘체르니셰프스크 50Km’라는 도로 표지판을 보고 열을 냈다. “저기가 역사적인 곳이요. 혁명가를 기념해서 붙인 이름이요. 짜르 시절 이리로 유형 왔소. 그가 체르느이 스끼요. 그래서 여길 체르느이 스끄라하는 거요.” 김은 백미러로 나를 흘끔거리며 ‘체르니셰프스키’에 대한 지식을 꺼냈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게 있었다. 나는 얼른 손에 쥐고 있던 지도에 시선을 주었다. 삼 년 전 한 여행사를 따라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가다가 이십분 가량 머문 역이 스쳐갔던 것이다. 미색으로 단장한 조그마한 역사(驛舍) 입구에 은빛으로 서 있던 동상. 그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소설을 쓴 1860년대 러시아 비평가이자 혁명가인 체르니셰프스키였다. 누군가 급조한 은박 칠을 뒤집어 쓴 채 체르니셰프스키의 역할을 수행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동상은 작았다. 더구나 미색으로 칠한 역 건물과 같은 밝은 계통의 은색이라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나도 한참 만에 동상의 주인공을 알아보았다. 대학 시절 그의 책 제목은 레닌의 동일한 제목의 연설문과 함께 유행처럼 오르내렸다. 나도 한글 번역본으로 그 소설을 대충 읽었다. 소설로는 재미가 없었다. 그때 학교 뒷골목 단골 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그 책에 대해, 그 제목에 대해 나와 몇몇은 열띤 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바지 자락에 흘려 허옇게 말라붙은 막걸리 자국처럼 내용도 몇 가지만 기억났다. 러시아 문학 시간에 조를 짜서 러시아 작가들에 대해 발표할 때 체르니셰프스키를 맡았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내 머리에 든 것은 별로 없었다. 여주인공꿈에 나타난 ‘수정궁’이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로 작가의 핵심적 사상이란 것도 해설을 읽고야 알았다. 또 그가 태어난 곳이 ‘사라토프’니 하는 것들만 어렴풋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베리아 유형. 발표 시간에 떠든 것은 그게 다였다. 혁명사상이니 공동체니 회자되는 것들은 저 깊이 있어 나는 거기까지 다다르지 못했다. 체르느이셰프스키는 은은한 무지갯빛을 머금은 은빛 수정궁이 아닌 시베리아의 궁벽한 소도시 역에 조야한 은박을 뒤집어쓴 채 서 있었다. 그 동상 앞에서 자다 깬 얼굴로 제법 엄숙하게 입을 꾹 다문 채 사진 찍은 것이 기억났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알았지만 ‘체르니셰프스크’라는 지명의 유래는 김의 말과 달랐다. 물론 지금은 김의 말처럼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쓴 혁명가 체르니셰프스키를 기념하고 있었다. 러시아 포털 사이트에서 확인한 바 그 지명 유래 자체가 알쏭달쏭했다. 애당초 그 지명은 혁명가 체르니셰프스키와 전혀 무관했다. 그의 시베리아 유형지도 거기가 아니었다. 혁명 뒤 소련시절 그곳 공장 기술자의 성(姓)이 체르니셰프스키였다. 아마도 노동영웅 같은 게 대두될 때 아니었을까. 공장 기술자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공장기술자는 혁명가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왜 그랬는지에 대해선 설명이 없었다. 나는 내친 김에 이반-차이도 검색했다. 그건 김의 말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다. 김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은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3 지난여름 우리는 토양개선제를 생산하기 위해 석탄시장을 알아보러 시베리아로 떠났었다. 우리란 나와 김, 그리고 최였다. 김은 석탄에서 부식 산(酸)을 추출하는 방법을 알았다. 작년까지 김은 내가 시간강사로 나가는 지방대학의 화학과 조교수 대우로 있었다. 그 대학의 산학협력단 지원으로 그는 이 방면에 특허까지 냈다. 김이 보여준 특허증에는 ‘가연성 광물로부터 부식산 염의 추출방법’이라는 다소 긴 발명의 명칭이 붙어 있었다. 석탄에서 추출한 부식산에 김이 아는 공정을 거치면 상품이 되는 것이었다. 김은 토양 개선과 수확량 향상을 장담했다. 김은 샘플로 만든 토양개선제를 사용하여 방울토마토와 난초 그리고 빨간 열매를 매단 천냥금 같은 화초를 연구실 귀퉁이에서 키웠다. 아닌 게 아니라 방울토마토는 촘촘하게 줄기를 뻗으며 빼곡하게 열매를 맺었다. 난도 꽃 대궁을 뻗으며 하얀 꽃을 촘촘히 매달았다. 문제는 양질의 석탄을 싼 값에 손에 넣느냐 였다. 김은 무조건 러시아 탄이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아니, 한국 탄 놔두고 왜 거기 걸 써요?” “늬네 탄은 너무 늙었어요.” 또 ‘늬네’였다. 그는 한국에 산 지가 십년이 다 되는데도, 하대할 때 쓰는 ‘늬네’, 아니면 ‘니’를 남발했다. 어느 정도 친해진 사이라면 그는 종종 ‘니’를 들먹였다. 그게 러시아어의 2인칭 단수 대명사의 활용을 그대로 한국어에 적용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가만 보면, 대개는 그게 수틀렸을 때였다. “김 박사님, 한국에서 ‘니’나 ‘늬네들’은 아이한테나 쓰지 어른들한테 쓰면 안돼요.” 소용없었다. 김의 머릿속에 굳어진 ‘니’는 한국 국적의 우리와 러시아 국적의 그를 가르는 지표가 되었다. 나아가 그건 한국과 러시아를 가르는 국경선이었다. 그의 이름은 ‘김철준’이었다. 러시아 여권에도 분명 키릴문자로 ‘이반’이 아닌 ‘철준’으로 표기됐다. 고려인들 중 2세, 3세가 되며 성은 그대로 썼지만 이름은 ‘미하일’이라던가 ‘아나톨리’ 같은 러시아식 명명을 따랐다. 하지만 김은 그게 아니었다. ‘이반’과 그것의 애칭인 ‘바냐’는 러시아에서 그가 평소에 쓰는 사적인 이름일 뿐이었다. 김이 자신과 우리를 가를 때, 그는 영락없이 이반으로 변해 있었다. 그가 뱉는 우리말은 어눌했다. 그의 말을 알아들은 학생들이 용했다. 아마도 화학용어니 화학식이니 그런건 통했을 수도 있었다. 그걸 벗어나서는 한글을 제대로 배우려 들지 않는 게 역력했다. “지금, 한국말 배우면 뭐해요? 인제 러시아 가야 돼요.” 계약기간이 끝나가는 것도, 김의 나이가 이제 육십이 넘은 것도 감안하면 수긍이 안 가는 바도 아니었다. 한국 탄이 늙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늙은 뇌’가 떠올랐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 인간의 뇌는 가장 심층에 있는 ‘늙은 뇌’, 중간에 있는 ‘중간 뇌’, 겉에 있는 ‘새로운 뇌’가 있다고 했다. 퇴적되는 지층처럼, 새로운게 그 위에 쌓여 또 다른 ‘새로운 뇌’를 낳으면 이전의 ‘중간 뇌’는 ‘늙은 뇌’가 되고, ‘새로운 뇌’는 ‘중간 뇌’가 된다. 층층이 쌓인 ‘늙은 뇌’는 습관이 되어버린 행동을 관장한다고 했다. ‘늙었다’는 김의 말에 갑자기 ‘늙은 뇌’를 왜 떠올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한국 탄과 ‘늙은 뇌’의 상관관계를 짚었다. 아리송했다. 제대로 된 부식산을 추출하지 못하는 한국 탄. 김의 입장에서 보면 ‘늬네’ 탓이었다. 걸핏하면 ‘늬네’를 지껄이며 완고하게 경계 짓는 그의 의식. 그거야말로 늙은 뇌 탓 아닐까. “늬네 우유는 이상해요. 며칠 씩 놔둬도 변하지 않는단 말이요. 그러면서 붉게 되요. 러시아 우유는 안 그래요. 러시아 소는 전부 풀밭 풀만 먹는단 말이요. 사료를 안 먹여요. 그래서 우유가 치즈같이 바뀌는데 늬네 건 안 그래요.” 그의 뇌 속 늙은 부분은 두터운 퇴적층을 이루었다. 나는 슬그머니 부아가 나서 그럼 이걸 뭐 하러 먹냐고 물었다. “없는데 어떡해요. 할 수 없이 늬네 꺼 먹어야지.” 그건 세월의 더께인지도 몰랐다. 이반-차이도 그 퇴적층 속에 꼭꼭 틀어박혀 있었다. 언젠가 내가 사다 준 국산 녹차는 그날 맛보고 그만이었다. 그건 실험실 한 귀퉁이에서 은박봉투 위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김은 툭하면 이반-차이였다. 처음부터 그랬다. 김에게는 이반-차이가 만병통치약 같았다. 김이 그걸 들이밀 때면 거무스레한 그 찻물의 색깔을 보며 정로환 같다고 생각든 게 여러 차례였다. 돌아가신 큰아버지는 툭하면 정로환이었다. 그는 일제시대에 사범학교를 다녔다. 여름방학 때 군사훈련을 받으러 갔다가 배탈이 된통 났고, 그 때 정로환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고 했다. 근데 희한하게도 그게 다른 곳에도 효과가 있더라는 것이었다. 큰아버지가 그걸 부르던 이름은 ‘크레오소트’의 일본식 발음인 ‘구로소도’였다. 정로환이라 부르는 끈적끈적한 검은 환약. 러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일본군이 만들었다는 정로환(征露丸). 나중에 그 이름이 너무 도발적인데다 러시아와의 관계로 이름을 정로환(正露丸)으로 바꿨다던가. 분명 배가 아프다거나 설사할 때 먹는 그걸 큰아버지는 머리가 아플 때도 강한 냄새의 그 환 몇 알을 얼른 들이켰다. 젊어서 다친 다리에 통증이 도질 때도 예의 그 약병을 열어 한 움큼의 알약을 얼른 목으로 넘기곤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 집 사촌들은 엔간해선 큰아버지 앞에서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역한 냄새를 풍기는 그 정로환을 들이밀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김이 그랬다. 이번 시베리아에 가서 물을 갈아먹고 우리 일행이 배가 아파 올 때도 그는 그 찻물을 권했다. 효과가 더뎠는지 아랫배가 계속 쌀쌀했다. 결국 나는 익숙한 정로환을 들이켰다. 솔밭 가운데서 야영을 하며 부근에 난 버섯을 따 맛있게 찌개를 만들어 먹었다. 문제는 버섯을 약간 볶던지 소금물에 재워야 했는데 독소가 다 빠지지 않은 버섯을 날로 끓인 것이다. 속이 부대끼며 설사가 났다. 그걸 본 김은 이반-차이 찻잎을 집어 더운 물이 담긴 코펠에다 넣었다. 얼른 나는 정로환을 먹었다. 나와 최는 배를 문지르며 숲속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야전삽을 들고 헤맸다. 물을 갈아먹든, 독소를 빼지 않은 버섯을 먹든 김은 끄떡없었다. “늬들 내 말 들으면 괜찮아요. 이반-차이 먹으면 배도 안 아프고, 설사도 안 나요.” 인상을 찌푸리며 환약을 삼키는 나를 보고 다시 이반-차이의 효능을 읊었다. 김은 ‘늙은’ 한국 석탄에는 아예 관심도 안 뒀다. “내가 알아보니까 러시아 안 가면 다른 데 꺼 써야 되는데, 러시아 탄보다 아주 비싸요. 늬들이 알아야 돼요. 한국 탄은 늙어 부식산이 제대로 안 나와요.” 러시아 것이 아니면 타산이 안 맞는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어쩌면 그가 자기에게 익숙한 ‘것’과 ‘곳’만 고집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시베리아에 널린 노천탄광만 염두에 두었다. 결정은 김의 몫이었다. 어쨌든 그날 나는 김의 말을 귀 너머로 흘리며 ‘늙은’이란 형용사가 전해주는 장면들을 훑으며 잠자코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시베리아란 말에 군침이 돌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4 나는 ‘시베리아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몇 년째 강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베리아는 늘 책과 인터넷 자료로 내 머릿속 지도에 자리 할 뿐이었다. 더욱이 학생들은 교재를 요구했으나 거기에 딱 맞는 책도 없었다. 나는 시베리아에 관한 책을 써야 한다면서도 미루고 있던 터였다. 자료도 자료지만 저작권 때문에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도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한번은 여행사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을 따라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횡단열차를 타고 이르쿠츠크까지 가는 여정이었지만 그건 겉핥기였다. 나 혼자 가려해도 그건 경비와 정보 등등이 발목을 잡았다. 김을 처음 만난 뒤 혹 그를 따라 갈 수 없을까 머리를 굴리기도 했다. 그것 역시 만만찮았다. 그에게 신세를 지자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내가 듣기로는 그가 조교수라도 받는 봉급은 형편없었다. 그건 잘 알려진 바였다. 가령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곳에서 석사 정도의 학위를 가지고 와 강의를 하면 한 달에 삼 사백만원 받기가 수월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온 교수들은 비록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 해도 이백만원에 간당간당한 급여를 챙길 뿐이었다. 김도 그랬다. 김을 만난 건 이년 전 ‘시사모’에서였다. 그날은 일주일에 한 번 출강하는 날이었다. 나는 학생들 앞에서 시베리아에 대해 떠들었다. ‘시베리아의 이해’는 그 대학의 교수로 있는 선배가 준 강의였다. 선배는 ‘시사모’에 함께 가자했다. “‘시사모’가 뭡니까?” 질문을 던지면서 나는 안주로 올라오는 열빙어를 연상했다. ‘시사모’는 ‘시베리아를 사랑하는 모임’의 약자였다. 출강하는 대학이 속한 지방도시는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시와 자매결연을 맺었고, 그 일환으로 시베리아 여행단을 모집해 거길 다녀왔다고 했다. 그 뒤 ‘시사모’를 결성해 일 년에 두어 번 모임을 갖는다는 거였다. 얼떨결에 합석을 한 나는 계면쩍게 앉아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김과 처음으로 인사를 했다. 하기야 일주일에 한번 가는 내가 다른 과 교수를 제대로 알 턱이 없었다. 학교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점퍼 차림으로 그 자리에 나타난 김을 우연찮게 시베리아 여행에 참가한 그 도시의 인물쯤으로 넘겨짚었다. 모임이 끝난 뒤 나와 선배, 그리고 몇몇은 근처 오뎅집에서 정말 구운 ‘시사모’를 안주로 시켜놓고 2차를 했다. 김도 함께였다. 김에 대한 대충의 정보는 그날 들었다. 그 후 나는 가끔 김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대개 그는 자리에 없었다. 거의 위층 실험실에서 뭔가 몰두했다. 그때가 산학협 력단과 손잡고 부식산을 추출하는 실험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실험실 한 귀퉁이에 석탄을 담은 포대 몇개가 잔뜩 검댕을 묻힌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김이 반기며 건넨 게 이반-차이였다. 그날도 화학과 실험실에서 김과 얼굴을 맞대고 데면데면 앉아 있었다. 특별한 일이 있어 간 것도 아니었다. 멋쩍어 가끔씩 등 뒤 탁자에 늘어선 비커들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렸다. 비커에 담긴 황갈색, 진홍색, 흑갈색을 띠는 액체들에서 시큼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김이 이반-차이를 내놓은 건 그때였다. 비커속에 담긴 거무스름한 시료를 마시기라도 하듯 흑갈색 액체로 채워진 찻잔을 조심스레 입에 갖다 댔다. 비커 속 흑갈색 액체가 김이 심혈을 기울이는 부식산이라는 건 후에 알았다. 나는 천천히 시베리아를 꺼내 들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시베리아 곳곳과 바이칼에 대해 잘 알았다. 입에 올린 장소 중에는 내가 바라던 곳들이 꽤 포함되었다. 그때 이반-차이를 더 달라고 청해 몇 잔을 비웠다. 시베리아에 다녀와야 한다는 의무감이 혀끝에 닿는 뒷맛을 헹궈냈는지 몇 잔을 비우자 개운한 듯도 했다. 그가 방학마다 이르쿠츠크에 간다는 말은 내 뇌리에 꽂혔다. 그러나 꽂힌 말은 어쩔 줄 모르고 제 자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우리는 한참동안 시베리아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로 끝을 맺었다. 와중에 김은 계약기간이 끝나고 학교를 물러났다. 김이 사업을 해보겠다는 얘기를 꺼내자, ‘시사모’ 회원 몇이서 십시일반 그에게 실험실을 하나 마련해 주었다. 투자라고 하기엔 낯 뜨겁지만 나도 얼마간의 돈을 김의 사업에 밀어 넣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최는 꽤 큰돈을 덜컥 내놓았다. 얼마 만큼인지는 모르지만 최는 부동산 부자라는 소문이 돌았다. 크게 하는 일도 없는 모양이었다. 시베리아에서 한 푼 갖고 절절매는 최의 행동을 봐서는 의아한 일이었다. 그만큼 부식산 사업에 확신을 했다. 샘플로 얻어간 그걸 자기 텃밭에다 심은 모종에 실험해보고 사업이 될 거라 굳게 믿었다. 최는 김의 말이라면 ‘암요!’ 했다. 이반-차이를 맛있다며 단박에 들이켰다. 그렇게 우리는 시베리아로 탄을 찾아 나섰다. 탄광지대로 가려면 먼저 사륜구동차를 구해야 했다. 우린 한국에서 중고 스타렉스를 샀다. 경비는 김을 제외하곤 각자 몫이었다. 경비를 줄이려 웬만하면 야영을 하기로 하고 텐트와 침낭도 챙겨 넣었다. (중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