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내게는 언제나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이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끝이 어딜까? 내가 기대하던 수많은 목적을 잃은 후에도 나는 무엇을 해결해야 했다. 나는 한 통의 물이었다. 수시로 출렁거리고 자주 쏟아졌다. 잘못 세운 문짝처럼 닫아도 열리고 닫아도 열리고 나의 내부는 언제나 비바람이 들었다. 멈추면 물속에 가라앉기라도 할 듯 나는 허우적거렸다. 문제가 사라지면 존재가 증발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내가 문제를 지닌 것이 아니라 문제가 나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상황은 지나가고 지나갔지만 나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얼까? 시는 그 물음을 타고 왔으리라. 원하지 않던 시가. 그것에 실려 와서 그것에 갇혀 있다.

문학의 기원이 내 안에서 계통발생을 겪은 것일까? 누구에게 배운 것 없는 시가 내게 왔다. 밖에서 오는 자극은 안에 눈뜨지 못한 것을 깨어나게 했을 뿐 이식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현대적 진화에 미치지 못한 네안데르탈처럼 말하는 일, 생각하기, 걷는 일들이 불편했다. 세상일들을 받아들이는 일도 불편했다. 모든 것은 의문이었고 의문은 언제나 나의 부피를 초과하고 필요 이상으로 앓게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공단으로 가야 했다. 그 곳은 헤어날 수 없는 늪이었다. 나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우리의 손과 근육만 필요로 했다. 각각의 일들이 서로 이어지는 연결점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랬다. 모든 것이 단절적이었고 분절되어 있었다. 다른 것과 다른 존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떻게 만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어떤 연관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고립과 부자유를 나는 견딜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무의미하고 찢겨져 있었다. 나의 중심은 거품처럼 들끓었다. 나는 과도하게 감정을 낭비했다. 나는 절망했고 이십대 중반을 넘기고 있었다.

잠자는 시간 외 모든 시간을 노동에 바쳐야 했다. 잦은 사고로 노동자들이 죽고 불구가 되어도 여건은 좋아지지 않았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읽어도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입을 틀어막고 최소한의 자유마저 박탈된 세상은 모래알처럼 분절되어 있었다. 그 단절이야말로 얼마나 큰 인간적 고통을 가져오는가를 알게 된 건 한참 지난 후의 일이었다. 나는 그 당시 그저 막연하고 막막한 어둠을 견디어야 했다. 나는 나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많은 책들에게 길을 물었으나 찾을 수 없었다. 책이 없었다.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로부터 책 한 권도 추천받지 못했다. 도서관도 없었다. 질문을 던져볼 사람 하나 없었다. 내게는 오직 곤궁과 결핍과 가난과 뛰는 가슴만 있었다. 공단에서 유일한 서점 하나, 5평도 안 되는 작은 서점이 나의 유일한 학교였다.

나는 빠르게 나를 포기했다. 나는 더 이상 좌절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되지 말아야 했다. 나는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는 나를 바칠 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고 믿었다. 그래야 나를 버릴 수 있었다. 대신 텅 빈 집착이 일어났다. 나를 지워버리고 싶은 집착이었다.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는 집착이었다. 그 무엇도 되지 않겠다는 집착이었다. 그 집착은 저 너머의 것을 그리게 만들었다. 흐릿하고 불확실한 것에 닿고 싶었다. 예기치 않은 일이 찾아들었다. 멀게만 느껴지던 시가 가까이 온 것이다. 새처럼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던 시들이 아주 가까이서 만져지는 것이었다.

문학서적에 빨려들수록 갈증과 결핍 또한 커져만 갔다. 막막한 결핍,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결핍. 1984년에 시를 발표하고서도 시인이라는 자의식이 조금도 없었다.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가 가라앉을 즈음 나는 비로소 나를 조금은 추슬러 갈 수 있었다. 숯불을 삼킨 듯한 열기로 첫 시집의 원고를 완성했다. 시집에 밀어 넣고도 남은 울분을 다시 거리에 쏟았다. 내 가슴은 최루탄과 바리케이트와 화염병과 구호가 나뒹구는 아스팔트였다. 그 감정은 시인의 감정을 초과하고 너무 거칠었다. 그래서 내가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나는 시를 통해 원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내 머리는 자주 저 너머에 있었기에 좌절은 일상적이었다. 시가 시를 부정하고 세상을 뒤집는 무기가 되어도 미안해 할 것 없다고 생각했다. 시가 나의 진로도 신분도 직업도 밥도 어떤 수단도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시는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다. 그만큼 외로웠던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해갔다. 세계사적 큰 변화와 함께 눈앞의 현실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찾아왔다. 떠나가고 흩어졌다. 혁명이 그랬고, 역사가 그랬고, 민주주의와 정의가 그랬고, 뜻을 나눈 사람들이 그랬다. 나는 현실적인 꿈이 없었으므로 변화된 현실에 살아남을 수 없었다. 내 곁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지독한 외로움의 끝이 보이지 않는 지점에서 나는 발견했다. 저녁 파장처럼 흩어져 날리는 먼지바람 속에서 말갛게 트여오는 그 무엇을.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시가 있었다. 그랬다. 시는 언제나 좌절의 끝에, 나의 영토가 텅텅 비었을 때,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을 때, 손이 깨끗이 비었을 때, 갈갈이 찢겼을 때 찾아온다는 것. 허공과 함께 흙먼지와 함께 찾아온다는 것. 하지만 나는 성급했고 나의 삶은 여전히 과열되어 있었다.

어느 여름이었을까. 신열에 들떠 며칠을 앓고 나서 내가 가꾼 텃밭을 살피러 나와 보니 잡초가 무성하게 뒤덮여 있었다. 뽑아도 뽑아도 끈질기게 물고 있는 잡초만이 지천이었다. 나는 비로소 그것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애써 가꾸어 온 것들을 다 뒤덮고 무성하게 꽃을 피우던 잡초들, 내게 남은 것은 잡초들이었다. 원래 땅은 잡초의 것이었다. 시는 끈질기게 나를 점령하고 있었다.

나는 줄곧 부인해 왔지만, 돌아보면 시의 길을 가도록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무의식적 충동이 늘 있어 온 것 같다. 시의 요구에 진작 귀를 기울이지는 않은 것은 내 불찰이고 물 위에 부는 바람 때문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주려고 산 헤세의 『지(知)와 사랑』이라는 책. 헌책방에서 200원을 주고 샀으나 전해주기도 전에 친구가 죽는 바람에 학교도 가지 않고 온전히 빠져 읽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나는 골드문트를 따라 떠돌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과학에 매료된 중학교 1학년 때, 손수 만든 진공관 단파라디오로 밤을 새워 전파를 타고 알 수 없는 세계를 찾아 나서던 그 수많은 밤들. 열 살 때 처음 본 그 무한정의 바다를 크레파스로 그리고 또 그려보며 익히던 색감들. 바람 때문에 단지 바람 때문에 한없이 무너지던 가슴. 사과꽃 지던 맑은 봄날 시퍼런 강물에 얼비치던 시커먼 죽음의 그림자. 종달새를 쫓아 보리밭을 내달리다 나도 모르게 쏟아지던 눈물의 기억들. 논갈이 끝난 밤 들판에서 진흙이 소가 되어 땅 거죽을 뚫고 일어서 달려오던 환상을 본 밤들. 밤기차 차창에 기대 졸던 스무 살 환청처럼 허공에서 울려오던 그 노래와 음성. 밤마다 괴롭히던 전생처럼 먼 기억들. 사람들, 사람들, 무언가를 갈망하는 눈빛들, 살기 위한 몸부림들, 무너진 어깨, 거친 손들, 애틋한 인정들, 그렁그렁한 눈물들, 피어보지 못한 꽃들, 겁에 질린 눈빛들 그런 것들이, 숱한 그런 것들이 여전히 내 안에서 나를 움직이고, 뜨겁게 하고, 무너지게 하고, 또 일어나게 했다.

나는 여전히 해결할 것이 있다. 그 때문에 시는 아직 내 안에 갇혀 날개를 펴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제 겨우 반환점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