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내가 로댕의 「칼레의 시민」(1995년 주조, 12번째 에디션)을 처음 본 것은 1999년 태평로 삼성본관에 로댕박물관(현재 플라토)이 개장했을 때였다. 십년 전 가슴속에 주조해놓았던 시, 「칼레의 바다」를 가늠해보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여섯 명의 이름과 사연을 떠올리며 그들의 표정과 몸짓, 그들의 몸에 걸친 속옷과 밧줄, 그들의 맨발과 발걸음, 그리고 고뇌에 찬 그들의 격정 들을 되짚어보았다. 헌데 실내여서였을까, 동물원에서 사자를 본 것 같은 미진함이 있었다. 그리고 2010년 도쿄의 우에노 공원에 위치한 국립서양미술관 야외에서 「칼레의 시민」(1953년 주조, 9번째 에디션)을 다시 봤다. 그러나 연말연시 정기휴관일 이었기에 닫힌 입구 밖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추운 겨울 아침의 황량함 속에서 그것도 멀리서 바라봤기 때문이었을까. 십년 전 서울의 로댕박물관 안에서 봤던 「칼레의 시민」보다 더 푸르스름하고 더 거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칼레의 바다」를 썼던 건 설렁설렁 석사 두 학기 마친 겨울방학 때였다. 83학번으로 입학한 대학은 학습과 가투, 최루탄과 화염병, 짭새(사복경찰)와 백골단, 분신과 투신, 수업거부와 휴교가 일상이었다. 문학을 하던 많은 선배들이 학생운동으로, 노동운동으로 뛰어들었으며 그런 시절에 대학원을 진학한다는 게, 시를 쓴다는 게 편치 않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스물일곱 살까지 시를 써보겠다는 결심으로 대학원을 선택했고 그런 대학원은 내게 스물일곱 살까지 시를 쓸 수 있는 합법적인 도량(!)이었다. 그러기에 예정대로라면 나는 스물일곱 살이 되는 1991년의 신춘문예에 응모를 해야만 했었다. 헌데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직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봉투에서 ‘○○일보 신춘문예 응모작’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집에 오자마자 습작시 몇 편을 크로버 2벌식 타자기로 쳐서 이튿날 모신문사에 직접 들고 가 투고를 했다. 확실히 질투는 힘이 셌다. 첫 신춘문예 응모를 3년이나 당겨버렸으니! 물론 본심에도 오르지 못했다. 아무튼 친구의 응모봉투를 본 그날 이후 응모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방학이 되자마자 ‘웅녀 모드’로 쓰고 또 썼다.

응모를 염두에 두고 시를 쓰기 시작해서일까.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해, 시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썼던 습작들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높거나 감정이 앞서거나 어딘지 낯익거나 쓰다만 느낌이거나…… 그날도 도서관에서 끙끙대며 시를 쓰다 참담해져 잠시 머리를 식힐 겸 특수자료실에 화집을 보러갔다. 로댕의 화집이었다. 헌데 그의 조각품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칼레의 시민」에 이르렀을 때에는 내 머리에 딸깍, 하고 형광등이 켜졌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

그러니까 로댕의 「칼레의 시민」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순식간에 한 편의 시가 완성되고 있었다. “로댕은 곧바로 이 이야기 속에 무언가 위대한 일이 일어난 순간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시간과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독보적이고도 단순한 일이 그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는 시민들이 도시를 떠나는 순간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라고 릴케가 썼던 대로, 「칼레의 시민」은 나에게도 ‘무언가 위대한 일이 일어난 순간’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을 담고 있는 ‘이야기’는 이렇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초였던 1347년, 도보해협 가까이에 위치한 칼레시가 영국왕 에드워드3세의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칼레의 시민들에게는 도륙과 학살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왕은 시를 대표하는 여섯 사람의 목숨을 “자기 뜻대로 다루도록” 넘겨주면 칼레에서 철수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누가 시와 시민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것인가? 부유하고 명망 있는 시민 한 명이 먼저 일어섰다. 뒤를 이어 둘, 셋, 그리고 여섯! 이튿날 아침 왕의 요구대로, 그들은 속옷만을 걸친 채 교수형 밧줄을 목에 걸고 시와 요새의 열쇠를 들고 나아갔다.

로댕은 이 여섯 명의 시민들이 칼레를 ‘떠나는 순간’을 조형해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에 그들이 지금껏 살아왔던 삶뿐만 아니라 영웅적인 결단 뒤로 가려져 있던 인간적인 고뇌를 담아냈다. 온몸으로 ‘삶을 통과해 가는 자’의 결단이자 고뇌였을 것이다. 그들의 걸음은 내게 시간이라는 존재의 밧줄을 목에 걸고 ‘지나가는 자’의 선택과 숙명처럼 다가왔다. 그렇듯 죽음을 넘어서는 의로운 희생 혹은 투신이란 우리 현실에서도 자주 목도되었던 바,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자발적인 죽음 앞에서 다시 망설이고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 내면이었다.

「칼레의 바다」는 “1347년 영국 군대가 칼레를 점령했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민의 목숨을 구하려면, 여섯 명의 시민이/ 시의 열쇠를 가지고 와 사형을 받을 것을 요구했다”라는 제사(題詞)를 앞세웠다. 그 제사가 88년 1월의 내 방과, 80년 5월의 광주와, 1347년 8월의 칼레를 넘나들 수 있게 하는 고리 역할을 해주리라 믿었다. 그리고는 조각과 시와 역사를, 전쟁과 혁명과 문학을, 서정과 서사와 극을, 알레고리와 패러디와 고백을 버무리기 시작했다. 청어와 해당화가, 안개와 소금기와 비린내가, 달팽이와 파지(破紙)들이 보였다. 그 사이를 돌팔매와 기름병이, 밧줄과 열쇠가 오갔다. 여섯 명의 시민들이 걸어가는 듯, 극적 구조와 서사적 단편성을 강화하기 위해 6개의 연마다 번호를 매겼다. 어조나 목소리 또한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시 한 편이 거느릴 수 있는 세계가 갑자기 일망대해처럼 툭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때 나는 시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외부적인 평가와 무관하게, 시를 쓰는 입장에서 좋은 시란 쓰고 나서 뭔가가 쑥 빠져나가는 듯한, 하여 맑게 비워지는 듯한 느낌을 주곤 한다. 시적인 완성도와 무관하게, 이 「칼레의 바다」를 쓰면서 나는 뭔가를 본 것도 같고, 뭔가를 통과하거나 지나온 것도 같고, 뭔가가 해결되거나 치유된 것도 같았다. 한바탕 열병을 앓고 난 후 시야가 맑아지고 길이 멀리까지 보이는 느낌이랄까. 겨울방학이 끝나자마자 응모 시기가 가장 빠른 《문학사상》에 투고했다. 그리고는 덜컥 당선통보를 받았다. 쌍팔년 춘사월이었다.

상상이 실제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조각 하나가, 사진 몇 장이, 그리고 몇 개의 문장이 현실의 가치와 의미를 극대화할 수 있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과, 그 작품을 찍은 사진과, 그리고 간간이 인용되었던 릴케의 문장에 힘입어 나는 「칼레의 바다」를 보았다. 아직 1894년에서야 칼레의 시청 앞에 제막했다는 그 첫 번째의 「칼레의 시민」을 보지 못했다. 때로 상상했던 것 보다 초라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전부를 걸고 싶었던 시가, 내 이십대 초반을 짓눌렀던 ‘광주’로 상징되는 숱한 꽃무덤들이, 칼레시를 대표하는 여섯 명의 결단이 지나치게 극대화된 게 아닐까 불안해 한 적도 있다. 아니, 내 청춘 자체가 과장되고 포장되었는지도 모른다는 회의였을 것이다. 실은 시가, 시대가 그때처럼 뜨겁지 않다는 내 수정주의와 허무주의와 현실주의를 확인하는 일이 가장 두렵다. 다 「칼레의 바다」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