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하노이에 도착한 건 새벽녘이었다. 베트남 북쪽 끝에서 기차로 9시간을 달려온 참이었다. 서늘한 새벽 공기를 맞으며 열차에서 내리자, 부지런한 택시기사들이 플랫폼까지 들어와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아무 택시나 타고 친구 집에 가서 쉬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일렀다. 불청객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날이 밝을 때까지 대합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대형 티브이 화면에서는 뉴스 진행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티브이를 보거나 여행 가방에 기대 졸거나, 또 누군가는 지도를 펼쳐놓고 다음 여행지를 찾아보기도 하는, 하노이 역 대합실은 여느 곳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도착한 이들과 떠날 사람들이 한데 모여 각자 시간의 공백을 메우며 머무는 곳, 목적지는 달라도 여행자의 흥분과 설렘이, 여독과 뒤섞여 술렁이는 대합실은 또 하나의 여행지다. 그곳에서는 이상하게도 시간이 단속적으로 흐르는 느낌이다.
지친 몸을 배낭에 기댄 채 나는 카메라에 담긴 사진을 뒤적여 보았다. 흘러간 시간이 사진 속에서 형체를 드러내자 왠지 뿌듯해졌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여행객들의 식상한 표현을 나는 ‘보는 것이 믿는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로 옮겨놓으며 그동안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댄 일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마저 시들해지자 카메라를 다시 배낭에 넣었다. 그때였다. 통로를 가운데 둔 옆 좌석, 대각선 방향으로 비스듬히 앉은 서양인 커플이 눈에 잡힌 건…….

처음엔 젊은 배낭족인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반백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한 노부부였다. 그들은 여행용 배낭을 각자 발치에 내려놓은 채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일순간, 대합실 풍경이 그 책 읽는 노부부를 소실점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들이 넘기는 책장 소리가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가라앉히고 그들 모습은 사원의 벽화처럼 숙연한 분위기를 일깨웠다.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과거 아니면 미래의 어느 한 곳에 툭 떨어진 느낌이었다. 저 흔들림 없는 자태, 시간과 주위 환경에 초연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니 좀 더 현실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저들은 힘든 배낭여행에 무슨 배짱으로 저토록 두툼한 책을 챙겨 넣을 생각을 했을까? 짐을 핑계로 나는 얇은 여행책자 외에 책은 아예 넣질 않았다. 그들의 배낭은 내 것보다 크지도 않았고 여느 젊은이의 것과 비교해 작지도 않았다. 또한 그들은 종이책으로 상징되는 구세대로 비치지도 않았다.

비현실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도 생생한 노부부의 모습 위로 또 하나의 여행지 기억이 겹쳤다. 하롱베이 유람선에서 만난, 세 자녀가 딸린 프랑스인 가족……. 한때 식민지 경험 때문인지 이 나라 여행 도중 만난 서양인 중에서는 프랑스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 그들 가족은 영화에서 본 것처럼 수다스러웠고 식탐이라도 하듯 먹는 걸 즐겼다. 테이블에 모여 먹고 마시고 유쾌하게 떠들어대다가 그들은 각자 흩어졌다. 갑판 위에서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부부는 갑판 위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사춘기 딸은 긴 의자에 누워 일광욕을 하면서 책을 뒤적였다. 뛰어다니며 장난을 쳐대던 개구쟁이들도 놀다 지치면 으레 한쪽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곤 했다. 여행 중인데도 그들 손엔 저마다 작은 문고판 책이 들려 있었고 짬만 나면 습관처럼 그걸 펼쳐보았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듯.

그들은 문명의 이기(利器)가 아니라 문명의 원본을 손에 쥐고 있었다. 수백, 아니 수천 년 인류문화를 유지시켜온 원조 격의 매체라 할 수 있을 그것. 그것이 어린아이와 중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세대에서 세대로 여전히 굳건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급속하게 사라져가는 모습, 그것을 나는 이국땅에서, 더욱이 나처럼 여행 온 외국인에게서 낯선 여행 풍경처럼 맞닥뜨린 것이다. 서점이 문을 닫고 출판사가 폐업 위기에 처하는 현실과 무관치 않은 직업을 가진 작가인 나조차 여행 내내 손에서 놓지 않은 건 휴대폰과 디지털 카메라였다.

내가 카메라에 담은 근사한 볼거리들, 내 여행은 그것들을 보기 위한 것이었을까?
새것의 출현에 우리의 눈이 사로잡혀 있는 동안 우리의 등 뒤에서 급속하게 사라져가는 것들은 얼마나 될까?
이런 저런 물음이 꼬리를 물었다. 노안(老眼)이 와도 오래 전에 왔을 노부부가 이국땅의 역 대합실에서 새벽녘 묵묵히 책장 넘기는 모습을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