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여행지에 여행자가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고 있는 상태를 일컫는다. 그렇기에 누구나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다녀가는 유럽임에도 그들이 체감한 유럽의 온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돌아온 여행자에게 으레 묻는 한 가지 질문과 나의 전형화 된 대답을 통해 ‘유럽’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곱씹어볼 수 있었다. 바로 유럽에 가기 전부터 예상했던, “여행(유럽)은 어땠냐?”는 질문이다. 질문을 받아서 응하는 내내 내가 서두에 밝힌 것은 단기여행, 문학기행, 정해진 일정, 단체생활 등등 이 기행의 조건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었다. 팥 앙금 없는 빵만을 우적우적 씹는 기분으로 여행기를 듣는 이들은 ‘유럽’이 없는 여행기를 힘들게 듣고 있었을 것이다. 이 나라와 저 나라의 차이들을 곱씹으며 언젠가 다시 되돌아가겠다는 기이한 포부를 밝히는 여행자들의 말을 들었을 때의 지루함과 마찬가지로 돌아온 여행자의 ‘말’을 듣고 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행자의 상투(常套)를 피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어려움뿐만 아니라, 이 기행문이 덤덤하게 ‘유럽’에서부터 시작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는 10일간 동료들과의 ‘공동생활’ 속에서 매일의 여행을 준비하던 시간들이 더 굵직하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낮 시간 동안 내내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가야하는 일정이 있었기에 몇 년간의 불규칙적인 식습관과 수면시간을 규칙으로 알던 몸은 쉽게 공동생활의 리듬에 적응하였다. 느슨한 공동생활임에도 이 리듬은 10일간 우리를 동여매는 생활이었다. 매일 숙소를 옮겨야하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숙소에 도착하면 먼저 양말과 속옷을 빨래했다. 그리고 가장 잘 마를 수 있는 공간의 틈을 찾는 것이 의례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숙소에는 새 비누와 샴푸, 수건이 늘 구비되어 있었지만 들고 간 세면도구를 아껴 사용하는 것 또한 생활이었다.
▲ 독일 베를린돔 앞에 선 필자
우리는 삼시세끼를 든든히 먹어야하는 한국인이었기에, 개인시간이 주어지는 날에도 끼니때가 되면 모였다. 그리고 주식 외에 여러 가지 과일과 샐러드, 요거트, 물을 곁들여 사먹기도 하였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언제든지 균형 잡힌 집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외식을 할 때는 늘 먹고 싶은 음식을 먹었을 뿐 음식의 균형에 대해 고려하지 않게 된다. 비타민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한국에서와 달리 유럽이 그토록 건조하다고 느꼈던 것은 언제든지 차려진 균형 잡힌 식단을 너무 당연하게 먹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의 감각은 이렇듯 어떤 당연함을 당위로 삼아 누군가의 노동을 좀먹고 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8~9시간의 시차가 나는 여행지였기에 아침 인사는 오늘 잠은 잘 잤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단지 어색함을 무마하려는 질문만은 아니었는데, 시차를 견뎌내고 있는 몸과 견뎌내지 못하고 있는 몸의 상태들이 단순히 궁금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건강하지 못해 안달이 난 한국에서의 몸이 아니라, 유럽에 당도하면서 서서히 바뀌는 몸은 유럽과 만나는 하나의 매개가 되었다. 12시간의 비행기 안, 내가 마치 몸만 겨우 들어가 있는 조그만 사각형 우리 속의 닭이 된 것 같다고 흘린 말에 한 동료는 닭은 알을 낳는 생산성이라도 있지 않느냐고 되받아쳤다. 수상이라는 사건을 통해 한데 모였던 우리에게 유럽이란 어쩌면 서로의 무능함을 확인하는 곳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에펠탑 앞에 모인 수상자들
2. 여행자의 비용
그들의 거대한 유산들, 풍광들을 바라보는 와중에 “우리가 감히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 여행을 해도 정말 괜찮은 걸까?”라는 질문을 동료에게서 듣는다. 누구에게 하는 질문인지 모를 이 말은 “여행에는 비용이 든다”라는 김애란 작가의 옛 대산대학문학상 기행문 속 한 문장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다. 비용을 들이는 방식을 통해 여행지는 비로소 여행자가 거닐 땅을 내어준다. 독일, 프랑스, 런던의 어디를 딛고, 무엇을 보아야 제대로 그 나라를 경험해봤다고 할 수 있을까? 런던에서 주어진 자유시간 동안 내가 짠 동선이 어제 함께 거닐었던 동네의 바로 옆 동네였다는 걸 도착한 뒤에야 깨달았을 때, 런던의 관광지역인 피카디리 라인(Piccadilly Line)을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는 나의 우둔함일까, 약속한 시간의 문제였을까?
베를린, 파리, 리옹, 런던 모두 강을 끼고 있는 도시들이다. 강을 경계로 관광지와 거주지가 확연히 갈라지는 지역의 갈라짐이 신기하다. 지도를 볼 일이 거의 없었던 내게 도시의 지도를 펼쳐들고, 내가 있는 위치를 가늠해보고, 이동하는 일은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처음으로 나침반의 쓸모를 생각해보기도 하였으며, 지하철 노선도와 지도를 번갈아 보고 지리를 읽는 일은 그 자체로 흥미로웠다.
▲파리 리옹역에서
런던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문학기행 전체 일정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여행 내내 도시의 새벽을 걷겠다는 다짐이 번번이 실패한 뒤, 기어코 이 날은 2시간 일찍 숙소에서 나와 여태 가보지 못한 방향을 향해 걸었다. 맞고 걸을 수 있을 정도의 비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런던 거주자들은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로봇처럼 조깅을 했다(파리 어디에나 흡연자들이 있다면, 런던에는 비흡연·조깅자들이 있다!). 지연 언니와 나는 몇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다 마침내 지쳐버린 사람들처럼 거의 말없이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블랙프라이어스 다리(Blackfriars Bridge)를 건너갔는데, 강을 건넌 이곳은 이미 차들이 도로를 에워싸고 이동하는 사람들의 수가 비교적 많은 걸로 보아 이미 시간이 꽤 지난 걸 알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오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다리를 찾아 건너왔다. 그런데 이쯤에 있어야 할 숙소가 보이지 않았고 기행 기간 동안 길을 헤맨 적이 없던 나는 짐짓 그 도시 속에서 당황했다. 도시는 항상 공사 중이었고, 건물은 비슷비슷하며 도로는 상하좌우로 뻗어 있기에 숙소 건물의 특이점을 잡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정해진 일정 없는 방랑과 방황을!”이라 외치며 나섰던 아침 산책길에서 비에 쫄딱 젖은 신발을 끌고 더 멀리 방황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 런던의 명물 더블데커 버스
3. 국경이 아닌, 일상의 반경을 넘는다는 것.
돌아갈 때를 대비해 기념품과 선물을 메지메지 쟁여 헤아리는 데만 애를 쓰느라 도시를 다니는 데 대비책이 부족했다. 모든 곳이 잘 정비되어있던 독일에서 유럽의 중국이라 불리는 파리에 갔을 땐 해방감이 들었다. 베를린에서 작가 요코 다와다와의 인터뷰 일정을 무사히 넘기고 건너간 도시이기도 했거니와 텃세를 부리는 백인들이 많이 없었기에 관광하러 온 동양인 여성이라는 의식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도시의 쓰레기들, 그걸 먹고 자라는 살찐 비둘기 떼, 담배꽁초들, 흡연자, 갱스터무리, 노숙자들을 통해 파리를 기억한다. 위험하다는 주의를 몇 번이나 들었지만 그럼에도 다시 찾아가고 싶은 곳은 파리이다. 돌아온 뒤, 스트리트 뷰(Street view)를 통해 가보지 못한 파리의 거리를 몇 번의 클릭으로 쫓아가본다. 하늘과 땅, 360도로 회전해서 파리의 모습을 낱낱이 보여주는 위성사진을 통해 가고 싶은 곳을 가보지만 금방 지치고 만다. 일상을 벗어난 시간에서 돌아온 이들이 곧잘 겪는 후유증을 잘못 겪어내고 있는 듯하다. 세련된 국가명이 표기된 각지의 상품들도 어느새 빛이 바래졌고 더 이상 ‘여행’에 대해 묻는 이들도 없다. 국경을 넘어 다녀온 여행을 통해 일상의 자연스러움을 목격했다면, 자연스러움이 은폐하고 있는 누군가의 노동과 관계들을 다시 보살피는 일은 그 곳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도되어야 하지 않는가? 여행을 준비하는 자처럼, 여행지에 개입하는 기술을 내가 딛고 선 일상 속에서 부려본다. 한 선배의 말처럼 일상의 반복되는 동선을 뚫어내는 것, 개인의 원칙들을 통해 이를 재배치하는 자야말로 다시 여행을 시작하는 자이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