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집 묶을 원고를 넘길 무렵 시골의 한 폐가를 샀다. 타지에 오래 살다보면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료할 때가 있다. 7년 째 버려진 폐가를 사서 황토를 체에 쳐서 곱게 만든 것을 짚을 섞어 반죽한 후 10센티 이상 여러 번 발랐다. 토방을 깨어 아궁이를 만들었다. 뒷산의 죽은 대나무를 끌고 내려와 두 달 이상 불을 지펴서 말렸다. 황토란 놈으로 오래 버려진 시간들을 덮어 함께 말렸다. 아직은 맨 윗집이어서 바라보는 풍경이 모두 우리 것이다. 화장실 문을 열고 볼일을 보면 앞산도 함께이다. 노동의 시간 속에 살아나는 풍경들을 벗 삼아 새해를 맞으니 7번째 시집이 나왔다. 연애사든 가족사든 세상을 향한 간절함이든 정의와 신을 향한 간구이든 그 언어와 문장이 이 세상 누구도 아직 쓰지 않는 말을 받아서 외치고 적어야 시다, 라고 주장하고 싶다. 깊은 철학 해학 슬픔 분노 환희를 토해낼 때도 그 기둥과 흙 모래 철근 중 하나라도 아! 예술이네! 외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런데 그것이 쉬운가. 그 어려운 일을 아직도 포기 못했다. 헌 집을 새 집 만들면서 시집까지 묶다 보니 내 혼이 아직 돌아올 기력이 없어서 이번 시들이 그저 가엾다.
친절한 로봇씨
가난끼리
공유하는 금쪽같은 서러움
그 밥벌이의 뒷다리를
로봇에게 빼앗겨버리면 어쩌지?
걱정 하는데
가난이
존재하므로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
울려 퍼지는 목소리 와장창 요란도 하다
스며들 땐 은밀한
가난만은
가난의 앞길만은
기계도 막지 못할 것이라는 가설을
로봇 식으로 일러주었다
물 론
오래된 장롱
차마 버릴 수 없어 門 두 쪽을 떼어내어
새 아파트 첫 문을 삼았다 물론
다른 집은 모두 첫 번째 문이 쇠문인데
우리는 나무 門이다 물론
우리도 두 번째 문은 쇠문이다
안방을 호령하던 시간들이 끝나고
문지기가 된 오래된 장롱의 신세처럼
우리 어머니와 조카 지숙이도
영구차에 실려 산으로 갔다 물론
누구든
걱정되는 얼굴이 있을 때는 문
사물의 처지라도
부럽겠지
귀한 서류뭉치 보석 이불 옷가지
아무나 들을 수 없는 비밀한 유언 약속 고백
걱정들은 모두 절친이었으나
격렬한 싸움 폭력적 언사를 새길 때마다
가깝다는 것이 얼마나 함께 아픈 일인가 느꼈겠지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지켜내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면
살 시간이
살 이유가 길어질 수도 있겠구나, 물론
검버섯이 피고 눈이 짓이겨지도록
무엇이든
떨어져야 했다 2월 마지막 날 지숙이와 5월의 첫날 내
어머니 금옥씨와
떨어졌다 지숙의 고운 피부와 쑥 빠진 이목구비, 금옥씨는
지덕체를 주고
떠났다 시월부터는 폐가의 시간들을 떨어내기 시작했다
마당은 묵정밭
파묻힌 운동화에서 옛 주인의 발이 자라고 깨진 유리는
죽어서도 서슬이 퍼랬다
사라진 마당, 지붕을 찾아내려고 한없이 쳐내자 숨진 줄
알았던 마당
공중이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살아 붐비는 웃음소리
따 먹는 내 손가락
사이로 마당과 지붕이 솟고 불이 흐르고 물이 샘솟는 집
한 채
쳐내고 불사르고 닦아주며 오래된 고독과 허기를 달래고
먹이자
벽들이 천정이 창문이 까르르 산 시간이 되고 웃자고 한
귀퉁이 오네요
사람은 왜 울자고 오는가, 잠시 아득한데 앙칼진 목소리
대신 몸의
마디마다 산소를 담아 키우는 자루, 해와 달 노을과 별의
자루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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