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좋은 언어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랑과 어긋난 길들

페미니즘은 여성이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확장시켜

「B사감과러브레터」 이어쓰기 ①사랑의 진실 ②B사감과 자매들 ③B사감과 운명의 화살 ④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 2 ⑤신여성 ⑥눈물

‘왜’와 ‘만약’을 허용하는 역사학적 상상력

코로나 시대의 역설

김소월 혹은 흰 달의 노래를 찾아서

일제강점기 장안을 사로잡은 유행가, 트로트

눈 오는 밤, 식민지 북국의 한 로맨티스트

‘디귿’ 없는 글쓰기

밀란 쿤데라, 두 번의 추방

앵앵시사(櫻櫻詩社) 문우들

민족혼의 숙소 현저동 101번지

쓸쓸하고 초라했던 만년의 자화상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고생은 참을 수 있지만 치욕은 참을 수 없었던 시인 부재(不在) 하는 방랑자 '예술의 목적은 인생’이라던 고독한 ‘원형적비평가’ 멋, 술 그리고 病

①나 세상 떠날 때,그가 울까봐 걱정이다 ②한 달 동안,감정적

엄마가 사준 옷

아빠를 중고로 팔아버렸어

①숭어 이야기 ②바보의 웃음 ③통증이 오는 시간

공포의 대상 혹은 욕망의 주체

팬데믹 시대, 인간의 존엄을 향한 작가들의 질문

부자를 만들어주는 요술책들

1980년대 영국 사회에 대한 세밀하고도 방대한 증언

되풀이 속에서 되풀이되는

또 다른 벽, 타문화와 역사에 대한 선이해

신석정 시인의 영역 시선집을 내며

대산세계문학총서,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2020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

기획특집

①사랑의 진실

구효서
소설가, 1957년생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비밀의 문』 『라디오 라디오』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소설집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도라지꽃 누님』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등

기획특집① B사감과 러브레터 이어쓰기


사랑의 진실


(B사감, 사내의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나의 천사, 나의 하늘, 나의 여왕, 나의 목숨, 나의 사랑, 나의 애를 말려 죽이실 테요? 나의 가슴을 뜯어 죽이실 테요? 내 생명을 맡으신 당신의 입술로……”
(넋두리가 끝날 겨를도 없이 갑작스레 앵돌아지는 B사감, 누군가를 뿌리치듯 연이어 손짓한다. 이번에는 톡톡 쏘는 여자 목소리로,)
“난 싫어요. 당신 같은 사내는 난 싫어요.”
(하다가 혼자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러더니 편지 한 장을 집어 들어 제 얼굴에 문지르며,)
“정 말씀이야요? 나를 그렇게 사랑하셔요? 당신의 목숨같이 나를 사랑하셔요? 나를, 이 나를.”
(하고 울먹인다.)
“에그머니, 저게 웬일이야?”
(첫째 처녀가 소곤거린다.)
“아마 미쳤나 보아. 밤중에 혼자 일어나서 왜 저러고 있을꾸?”
(둘째 처녀가 맞장구친다.)
“에그 불쌍해.”
(셋째 처녀가 손등으로 때아닌 눈물을 씻는다.)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관객의 박수소리가 어둠 속에 가득하다.

*

“대단해 100회 공연이라니.”
첫째 여자가 말했다.
“축하해.”
둘째 여자가 말했다.
“연기가 완전 달인의 경지야. 대사도 숨 쉬듯 자연스럽고. 무대 위에서 잔뜩 딴생각하면서 연기해도 관객들은 눈치를 못 챌 거야. 이제는 몸이 알아서 척척 연기를 해줄 테니까.”
첫째 여자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저절로 되는 연기가 어딨어. 100번 공연하면 100번 다 엄청 스트레스야. 무엇보다 100년 전 언어로 요즘 관객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게 가장 어려워.”
셋째 여자가 말했다. 조금 전 100회 공연을 끝낸 <B사감과 러브레터>의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였다. 지금까지 총 160여회 진행된 공연에서 그녀가 60퍼센트에 달하는 횟수의 주인공 역을 책임져 온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피곤해 보였다. 분장을 꼼꼼하게 지우지도 못한 채 극장 인근의 이탈리안 식당으로 끌려 나와 고등학생 때부터 절친인 첫째 둘째 여자의 축하주를 받고 있었다.
“작품이 100년이나 됐나?”
첫째 여자가 말했다.
“1925년 작품이니까 정확히는 95년. 하지만 100년이나 95년이나. 하여튼 당시의 어투 연기가 가장 어려워. 정 말씀이야요? 이런 거.”
셋째 여자가 말했다.
둘째 여자는 축하해라고 짧게 말한 뒤로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첫째 셋째 여자의 연기라는 말 때문이었다.
유례없는 인기를 끌며 롱런하는 연극의 주인공과 100회 공연을 축하하는 술자리였던 만큼 연기를 화제에 올리는 건 식상할 정도로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둘째 여자-그녀의 이름은 ‘려’였다-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랐다.
셋째 여자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들짝 발신인을 확인한 셋째 여자의 낯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태훈 씬가 보네.”
둘째 여자 려가 작게 말했고,
“피곤한 게 아니었군. 100회 공연 날인데 태훈 씨가 오지도 않고 전화도 없어서 쟤가 삐져 있었던 거였어.”
속삭이는 말로 첫째 여자가 맞장구쳤다.
“어쩌면 저렇게 낯빛이 갑자기 확 달라질 수 있을까?”
“하도 연기를 해서 이제는 저런 웃음도 연기처럼 보여.”
첫째 여자의 입에서 다시 연기라는 말이 나왔다.
려는 입을 다물었다.
려뿐만 아니라 첫째 여자도 셋째 여자의 남친을 태훈 씨라고 했다. 그의 이름은 태호였으나 <B사감과 러브레터>에 나오는 태훈 씨와 이름이 비슷했고 자신의 여친에게 살갑게 구는 모습이나 말투가 극중 태훈 씨와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두 친구가 그를 태훈 씨라고 부르는 것을 셋째 여자도 싫어하지 않았다.
실제로 셋째 여자의 남친은 연극 속 태훈이라도 되는 것처럼 태훈의 대사를 자주 써먹었는데 지금도 그러는 중이었다.
“나의 천사, 나의 하늘, 나의 여왕, 나의 목숨, 나의 사랑, 나를 살려 주어요. 미안해. 100회 공연에 당근 달려가고 싶었지. 고속버스도 일찌감치 예매해 놨었거든. 근데 부장 있잖아. 빌어먹을 우리 부장. 자기도 그 인간 알잖아.
부장이 갑자기 빡치는 바람에 여태 이렇게 꼼짝없이 잡혀 있어. 아, 하필 오늘 같은 날. 엉엉. 한 번만 살려 줘요, 한 번만. 응? 나의 목숨, 나의 사랑.”
려도 첫째 여자도 셋째 여자의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한마디로 닭살인 태훈 씨의 목소리를 들었다.
셋째 여자의 얼굴은 이미 꽃처럼 활짝 피어있었으나 남친에게서 나의 천사 나의 하늘을 더 듣고 싶었는지 여간해서는 곱게 응대하지 않고 샐쭉거렸다.
그들의 유치한 대화가 아니꼬울 만도 했으나 려와 첫째 여자는 그들의 통화가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태훈 씨의 말에 장난기가 가득하긴 해도 자기 여친에 대한 사랑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으니까.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는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는 거라고 려는 믿었다. 려는 태훈 씨를 두 번 보았는데 두 번 다 그런 느낌이었다. 첫째 여자도 대체로 려의 느낌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유치하게 굴어도 꼴사나워 보이지 않는 건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태훈 씨는 ‘대덕연구단지의 진’이라고 불릴 만큼 미훈남이었고 셋째 여자는 현재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배우였다. 고약한 B사감 분장만 지우면 갑자기 앰버 허드가 되는 미모. 둘이 함께 있을 때 어여쁜 건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어두운 펍이나 복닥거리는 광장시장 빈대떡 식당에서도 그들은 언제나 봄꽃처럼 환하게 빛났다.
남친이 없는 려와 첫째 여자로서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고 문득문득 견디기 힘든 질투를 느꼈으나 언제까지고 그들을 보호하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 또한 진심이었다.
“난 싫어. 오빠 같은 남자 난 싫거든.”
셋째 여자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녀의 투정은 금방 끝나지 않았다.
“얘 얘, 연극 끝났거든. 언제까지 그 지겨운 대사 외울 거니?”
첫째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셋째 여자가 자기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첫째 여자가 더 큰 소리로 말했다.
“태훈 씨! 얘 지금 완전 활짝 웃고 있거든요. 걱정 마요. 다음에 봐요, 태훈 씨. 그때 맛있는 거 사요.”

 

*

려는 끝끝에게서 연기를 강요받고 있었다.
“마지못해 하는 연기 같잖아. 연기라는 게 티가 나. 연기가 뭐야? 진짜가 아니지만 진짜처럼 하는 거잖아.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돼? 진짜보다 열배 백배에 해당하는 진짜를 머릿속에 갖고 있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 자연스럽게 동작으로 흘러나오는 거지. 연기란 그런 거야.”
연기라는 말만 들어도 려는 토할 것 같았다. 끝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콩코드 광장 단두대 앞에 서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니야. 아직은 아니잖아. 프티 트리아농 궁전에서 밤마다 방탕한 파티를 여는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라고. 그런데 네 표정이 죽상이잖아. 금방이라도 목이 달아날 것처럼.”
보다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끝끝이 권한 『프랑스 대혁명사』까지 읽은 려였다. 그러나 연기는 그가 원하는 쪽으로 나아지지 않았다. 나아질 수 없었다.
일주일에 세 차례씩 무대에 오르며 <B사감과 러브레터> 한 작품을 9개월 가까이 쉬지 않고 100회 째 연기해 내는 친구의 강행군이 려로서는 놀라울 뿐이었다.
하지만 배우는 친구가 어려서부터 꿈꾸었던 거였고, 그래서 배우가 되었고, 좋은 작품을 만나 성공적인 공연을 이어나가는 것이었다. 힘이 들수록 더욱 힘을 내는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려는 연기에 재주나 취미가 없었으며 따라서 배우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기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거절할 수도 없었다. 꿈이라면 지독한 악몽이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으론 끝나지 않았다. 끝끝은 점점 ‘리얼한 자발적 연기’를 원했고 연기지도라는 명분으로 끔찍한 협박을 가해왔다.
“좋아, 그럼 먼저 단두대부터 가자. 니 얼굴이 죽상이니까 죽는 걸로 하자. 자, 콩코드 광장의 단두대다. 남편인 루이 16세가 죽었던 처형대에서 너도 곧 목이 잘려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갈 거다. 수만의 분노한 군중과 병사들이 너를 에워싸고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다. 너는 마스카라가 더럽게 번진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개같이 애원한다. 살려주세요. 뭐든 다 할게요, 뭐든. 그래, 저들을 분노케 한 대가로 저들에게 뭔가 멋진 걸 보여줘야지. 보상해 줘야지. 울며 애원하며 옷을 하나씩 벗는다…….”
려는 끝끝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연기지도라는 것도 철저하게 문자로만 이루어졌다. 사실 려는 끝끝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다만 문자라는 이름의 악마였다.
가장 어려운 것은 목소리 연기였다. 그가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이거나 울 수는 있었으나 대사를 만들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카메라 설치와 촬영, 괴상한 의상과 분장도 려 스스로 해야 할 몫이었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죽을힘을 다해 대사를 만들어 소리를 질러도 끝끝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참혹한 욕설과 더 높은 수위의 노출 요구였다.
텔레그램의 알바 모집 게시글에 속아 몇 개의 사진을 찍어 보낸 것이 악몽의 시작일 줄 몰랐다. 이런 악몽이 계속된다면 차라리 극단적 선택을 꿈꾸는 것이 낫겠다고 려는 요즘 들어 자주 생각했다. 연기라는 말을 들을 때면 더욱 그랬다.

*

사흘 뒤 세 여자는 같은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났다. 려가 만나자고 했다. 여간해서는 만남을 먼저 제안하는 려가 아니었기 때문에 두 친구는 가벼운 기대와 호기심을 안고 모임 장소에 나왔다.
려는 용기를 내어 두 친구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은 오래되었지만 끝끝의 협박이 무서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나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더 잃을 것이 없게 되었으므로.
두 잔째 맥주를 마시던 셋째 여자가 화장실에 간다더니 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인기녀였다. 팬들의 사인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가 돌아오는 대로 끝끝방에서 당한 그동안의 피해 사실을 낱낱이 말해야겠다고 려는 굳게 마음먹었다. 첫째 여자도 려의 표정에서 심상찮은 낌새를 읽은 것 같았다.
셋째 여자는 생각보다 늦어졌다. 여전히 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기다리다 못한 첫째 여자가 일어섰다. 려도 따라 일어섰다.
셋째 여자는 화장실 쪽 홀 끄트머리의 테이블 모서리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있었다.
첫째 여자와 려가 다가갔을 때 셋째 여자는 무너져 내리며 바닥에 무릎을 찧었다.
“저게, 저게 웬일이래니?”
셋째 여자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손님들이 홀 안의 텔레비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화면이 흔들려 압송되는 범인의 모습이 분명치 않았으나 첫째 여자도 려도 그를 모를 리 없었다. 그것은 태훈, 아니 태호 씨였다.
“미쳤나 봐. 태훈 씨가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첫째 여자가 말했다.
기자는 그를 태호 씨라고 했으나 이름 앞에 끝끝방을 붙여 끝끝방 김태호 씨라고 했다.
“조금도 불쌍할 것 없어.”
려가 손등으로 눈물을 씻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