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좋은 언어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랑과 어긋난 길들

페미니즘은 여성이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확장시켜

「B사감과러브레터」 이어쓰기 ①사랑의 진실 ②B사감과 자매들 ③B사감과 운명의 화살 ④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 2 ⑤신여성 ⑥눈물

‘왜’와 ‘만약’을 허용하는 역사학적 상상력

코로나 시대의 역설

김소월 혹은 흰 달의 노래를 찾아서

일제강점기 장안을 사로잡은 유행가, 트로트

눈 오는 밤, 식민지 북국의 한 로맨티스트

‘디귿’ 없는 글쓰기

밀란 쿤데라, 두 번의 추방

앵앵시사(櫻櫻詩社) 문우들

민족혼의 숙소 현저동 101번지

쓸쓸하고 초라했던 만년의 자화상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고생은 참을 수 있지만 치욕은 참을 수 없었던 시인 부재(不在) 하는 방랑자 '예술의 목적은 인생’이라던 고독한 ‘원형적비평가’ 멋, 술 그리고 病

①나 세상 떠날 때,그가 울까봐 걱정이다 ②한 달 동안,감정적

엄마가 사준 옷

아빠를 중고로 팔아버렸어

①숭어 이야기 ②바보의 웃음 ③통증이 오는 시간

공포의 대상 혹은 욕망의 주체

팬데믹 시대, 인간의 존엄을 향한 작가들의 질문

부자를 만들어주는 요술책들

1980년대 영국 사회에 대한 세밀하고도 방대한 증언

되풀이 속에서 되풀이되는

또 다른 벽, 타문화와 역사에 대한 선이해

신석정 시인의 영역 시선집을 내며

대산세계문학총서,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2020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

나의 아버지

부재(不在) 하는 방랑자

이애정
이동주 시인의 딸, 시인, 1963년생

이동주(1920~1979) 시인, 전남 해남 출생. 호남신문 문화부장, 서울연합신문 문화부차장 역임. 한국문협 시분과위원장, 사업간사, 부이사장 등 역임. 시집 『혼야』 『강강수월래』 등. 전통적인 서정세계를 확립하였으며 한국적인 정서를 섬세한 리듬으로 노래하였음.


 

이동주 시인, 그리고 아버지(이동주 시인)와 어머니(최미나 소설가) 사이의 늦둥이 무남독녀 딸. 나는 아버지와 열일곱 해를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아버지보다는 이동주 시인에 대한 기억이 더 선명하다.

부재(不在)의 보고서
17년을 살았다지만 아버지와의 기억은, 그중에서도 추억은 불과 3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집중되어 있다. 설명도 대책도 없었다. 이유라면 서울에 일주일만 있으면 숨이 막힌다는 거였다. 아버지는 거의 한 달에 20여 일은 집을 비우셨다. 길게는 석 달까지도 가장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어서 아버지가 먼저 연락을 주실 때까지는 그야말로 생사도 확인 하지 못했고 나와 어머니 둘이서 이사를 한 적도 있었다. 가출 끝에 돌아오는 비행 청소년처럼 어색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오실 때면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폭풍 잔소리를 하신다거나 아예 유령 취급하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잔뜩 주눅들은 표정과는 반대로 아버지의 손에는 전국에서 공수해온 선물로 가득 했고 띠동갑 연하 아내에게 극존대를 하셨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소설가 어머니를 자랑스러워 하셨고 어머니의 작품에 대해 선배 문인으로서의 격려를 잊지 않으셨다. 일본어 번역으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시는 어머니를 아버지가 곁에서 도와주시던 모습도 기억한다. 안도감도 잠시, 어머니와 내가 아버지의 가출을 잊었다 싶으면 아버지는 다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라지셨다. 이쯤 되면 아버지는 요샛말로 역대급 방랑자였다. 어머니와 나는 다시금 둘만 남았다.

 

반복되는 이별 속에서 아버지에게 날아드는 많은 책들, 전국 어느 곳에서 썼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청구서 따위를 줄줄이 받고 한 학기 등록금이 거의 다음 학기까지 연기된 적이 여러 번이다보니 창피함의 횟수만큼 나는 아버지를 미워했고 시인의 딸이라는 걸 숨기고 싶었다. 그렇다 해도 좁은 집안 가득히 쌓여있는 책들은 아버지가 이동주 시인임을 싫어도 인정하게 만드는 아버지의 사생아, 청구서는 아버지 부재에 대한 보고서 같은 것이었다.
당신은 가진 돈이 한 푼도 없을 때라도 누굴 만나게 되면 잠시 앉혀놓고 어디서 돈을 구해 오셨는지 차와 식사는 물론 교통비까지 쥐어 주셨다고 했다. 선물로 받은 그림이나 글씨도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시고 심지어 입고 있던 옷마저도 누가 좋다는 말만 하면 그건 그대로 그 사람의 것이 되었다.
1977년, 그때까지 여전히 아버지 이동주 시인은 수시로 부재중이셨는데 그 해 여름 문득 나타난 아버지가 어머니와 내게 한 번도 말씀하시지 않았던 가족 여행을 권하셨다. 장소는 아버지의 은둔처인 전남 해남 대흥사였다.
뜬금없긴 했지만 어머니와 나는 신이 나서 아버지와 동행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열흘 가량을 대흥사에 머무르며 암자에 앉아 당신의 문학 세계를 말씀해 주시기도 하고 어머니와 내손을 잡고 사찰의 구석구석을 보여주시며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에 대한 인연이 깃든 대흥사에 대해 세세한 설명도 하셨다. 날이면 날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여인이 어머니와 딸이라고 하셨고 모녀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보여주셨다. 그로부터 1년 후 아버지는 위암 선고 끝에 수술을 받게 되셨다. 어쩌면 아버지는 당신의 삶의 끝을 1년 전 이미 느끼셨던 것 같다. 뜬금없는 여행은 그러니까 긴 이별의 준비였던 것. 어린 딸의 충격을 우려했던 어머니가 말씀을 하지 않으셨으므로 나는 아버지가 그냥 몇 달은 집을 안 나가실 것으로만 생각하고 좋아했지 수술을 못할 정도로 퍼질 대로 퍼진 말기 암에다 아버지의 삶이 1년도 채 남지 않았으리라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어머니와 나를 걱정하셨다. 어머니의 기도 때문인지 당신이 암이란 것을 모르셨을 정도로 통증도 없으셨고 문예지에 작품도 연재하셨다.
아버지와 끝내 동행하지 못한 채 시인의 먼 길을 걷고 있는 내게 이동주 시인의 딸임을 무엇보다 감사하게 해주시는 아버지.
당신은 60이 되자마자 서둘러 떠나셨고 나는 홀로 남아서 아버지가 그립다.

1977년 여름 해남 대흥사에서 왼쪽부터 도수스님, 아버지, 어머니,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