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좋은 언어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랑과 어긋난 길들

페미니즘은 여성이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확장시켜

「B사감과러브레터」 이어쓰기 ①사랑의 진실 ②B사감과 자매들 ③B사감과 운명의 화살 ④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 2 ⑤신여성 ⑥눈물

‘왜’와 ‘만약’을 허용하는 역사학적 상상력

코로나 시대의 역설

김소월 혹은 흰 달의 노래를 찾아서

일제강점기 장안을 사로잡은 유행가, 트로트

눈 오는 밤, 식민지 북국의 한 로맨티스트

‘디귿’ 없는 글쓰기

밀란 쿤데라, 두 번의 추방

앵앵시사(櫻櫻詩社) 문우들

민족혼의 숙소 현저동 101번지

쓸쓸하고 초라했던 만년의 자화상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고생은 참을 수 있지만 치욕은 참을 수 없었던 시인 부재(不在) 하는 방랑자 '예술의 목적은 인생’이라던 고독한 ‘원형적비평가’ 멋, 술 그리고 病

①나 세상 떠날 때,그가 울까봐 걱정이다 ②한 달 동안,감정적

엄마가 사준 옷

아빠를 중고로 팔아버렸어

①숭어 이야기 ②바보의 웃음 ③통증이 오는 시간

공포의 대상 혹은 욕망의 주체

팬데믹 시대, 인간의 존엄을 향한 작가들의 질문

부자를 만들어주는 요술책들

1980년대 영국 사회에 대한 세밀하고도 방대한 증언

되풀이 속에서 되풀이되는

또 다른 벽, 타문화와 역사에 대한 선이해

신석정 시인의 영역 시선집을 내며

대산세계문학총서,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2020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

근대의 풍경

일제강점기 장안을 사로잡은 유행가, 트로트

김문성
국악평론가, 이북5도 문화재위원, 충남무형문화재전문위원, 예경 전국국악대회평가위원, 1971년생
공저서 『경기잡잡가』 『경기음악』 『경기잡가』 등


일제강점기 장안을 사로잡은 유행가,
트로트



#1. 1928년 가을 어느 날. 신파극단 취성좌의 공연 1부가 끝나자 단성사를 꽉 메운 관객들의 얼굴이 상기됩니다.
취성좌 공연의 꽃인 ‘막간 공연’이 시작된 것입니다. 채 스무 살도 안 된 배우 이애리수가 앳된 목소리로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로 시작하는 <황성옛터>를 부릅니다. 나라 잃은 설움을 하소하듯 관객들은 목청껏 따라 부릅니다. 1920년대 후반 유행가라는 이름으로 상륙해 장안을 들썩이고, 대중을 사로잡은 트로트 음악이 만들어낸 새로운 풍경입니다.

#2. 1932년 일본 동경 간다(神田). 경성에서 온 두 여가수가 호텔방에서 일본어 가사를 열심히 외우고 있습니다.
유행가 몇 곡을 녹음하고 바로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예정에 없던 호텔 생활을 무려 50일간 하게 됩니다. 이들의 노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던 유명한 시인 사이조 야소[西条八十]가 빅타사를 설득해 붙잡아 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이애리수, 강석연은 조선 최고의 가수다. 노래 몇 곡 취입하고 보내기엔 너무 아깝다. 일본어 음반도 발매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애리수, 강석연은 뜻하지 않게 일본에 “강제진출”하는 조선의 첫 여가수가 됩니다.
사이조 야소는 이 기간 여섯 곡의 노래를 만드는데, 이미 발표된 강석연의 <남대문타령>과 이애리수의 <고요한 장안>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 건너 온 트로트 음악이 일본으로 역유입되며 유행하는 초기 한류가 시작된 것입니다. 훗날 유명한 방열 농구감독은 강석연이 자신의 어머니라고 밝혔습니다.






#3. 1933년 영등포에 자리한 일본 기린맥주 경성 공장. 본격적인 맥주 출시를 앞두고 이색적인 홍보마케팅을 선보입니다. 한국의 남녀 가수 두 명을 섭외해 각각 ‘미스기린’과 ‘기린보이’로 명명(네이밍)하고, <인생의 꽃밭> 등이 들어있는 음반을 발매합니다. ‘기린맥주를 사시는 분께는 미스기린과 기린보이가 부른 고급 음반을 선물로 드립니다’라는 광고를 냅니다.
하지만 막걸리에 익숙한 대중들은 기린 맥주보다도 ‘미스기린’과 ‘기린보이’가 누구인지에 더 관심을 보였습니다. 미스기린은 조선권번 최고의 무희로 이름을 날리며 1933년 유행가 <포구의 달빛>으로 데뷔한 가수 최향화였으며, 기린보이는 시에론 전속 가수 김창배였습니다.
신인 가수의 얼굴에 가면을 씌우거나 미스콜럼비아 같은 예명으로 데뷔시켜 짧은 시간에 대중의 관심을 높이는 일본 빅타와 콜럼비아사의 티저 마케팅 전략이 대성공을 거두자 우리나라에서도 음반사간 ‘예명’을 활용한 전략이 경쟁적으로 도입됩니다.
1933년 5월 시에론 레코드사는 영화 <아름다운 희생>이 인기를 끌자 주제가 <청춘행> 음반을 신인가수 미스시에론(나선교) 이름으로 발매합니다. ‘미스시에론이 녹음한 1원짜리 음반을 사면 60전짜리 영화 입장권을 준다’는 네이밍 전략이 성공을 거두자 이후 오케, 폴리도루 등 음반사들이 경쟁적으로 이를 도입하며, 이듬해 콜럼비아는 가수 미스코리아의 얼굴을 가리는 광고를 내기에 이릅니다. 왕수복은 ‘미스폴리도루’, 김선초는 ‘미스조선’, 종로권번 출신 장옥조는 ‘미스리갈’, 박세명은 ‘미스터콜럼비아’로 불렸으며, 태평 소속 손혜경, 박산홍, 최남용은 각각 ‘미스서울’, ‘미스태평’, ‘미스터태평’으로 활동했습니다.







#4. 1936년 서울 오케레코드사의 오디션 현장. 전국에서 모인 예비가수 지망생 수백 명이 오디션을 위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립니다. 부산에서 올라온 앳된 15세의 여학생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사장인 이철, 작곡가인 손목인과 박시춘, 그리고 훗날 남편이 되는 고복수 앞에서 당차게 트로트를 부릅니다. 그리고 특등으로 합격합니다. <알뜰한 당신>, <외로운 가로등> 같은 명곡을 남긴 황금심의 발굴기입니다. 연극판이나 권번이 아닌 이른바 오디션을 통해 본격적으로 가수가 배출됩니다. 물론 황금심의 남편 고복수는 이보다 앞서 1933년 콜럼비아사가 주최한 가요제를 통해 데뷔했습니다.
오디션에는 실패했으나 이를 악물고 노력해 성공신화를 거둔 가수도 있습니다. <오빠는 풍각쟁이야>로 공전의 히트를 친 박향림은 오케레코드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태평레코드에서 데뷔한 케이스입니다. 유명인 찬스를 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시 출중한 외모로 오빠부대를 몰고 다닌 최남용은 지인이자 같은 개성 출신인 이애리수의 소개로 쉽게 가수가 될 뻔 했으나, 사장의 요구로 오디션을 거친 뒤에야 본격적으로 데뷔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유랑극단의 막간공연 무대를 통해 데뷔하기도 합니다. 초기 대표적인 유행가수 신카나리아와 이난영은 막간공연을 통해 데뷔하였습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트로트의 바이블로 평가받으며, 이듬해 일본에서 <이별의 뱃노래>로 리바이벌되기도 했습니다.
입소문을 들은 음악가가 직접 발탁한 경우도 있습니다. 트로트의 전설로 평가받는 남인수, 김정구, 장세정은 경쟁 방식이 아닌 발탁을 통해 가요계에 데뷔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 전문 가수의 등장은 왕수복, 선우일선, 이화자처럼 권번을 통해 배출된 기생가수의 쇠락으로 이어집니다. 유행가 대중화 초기에 가수 부족 현상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한 방편이기도 했던 기생의 활약은 그러나 창법에서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전문 가수들에게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5. 뽕짝? 트로트? 유행가! 풍금소리와 잘 어울리는 창가나 장구장단에 어울리는 민요와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진 이 노래들을 오늘날에는 ‘뽕짝’1) 혹은 ‘트로트’로 분류합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는 탱고든, 재즈든, 폭스 트로트든 우리 것이 아닌 리듬을 품은 노래는 모두 유행가로 불렸습니다. 대세는 일본 전통음악과 폭스 트로트가 만나 탄생한 엔카의 영향을 받은 유행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많은 유행가들이 만들어지면서 훗날 트로트-엔카 원조 논쟁이 불거지기도 합니다.
1920년대 중후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음악가들이 서양의 음악과 우리의 민요를 섞는 작업을 시도합니다. 왈츠를 많이 사용하는데 왈츠나 우리 민요 모두 3박 계통이어서 이 둘의 조합은 결코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만난 음악은 주로 신민요라는 이름으로 대유행합니다.

 

그러나 2박 계통의 엔카 리듬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도저히 어깨춤을 낼 수 없는 너무도 낯선 박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2박 대신 3박의 유행가를 만들어 냅니다. 윤심덕 <사의 찬미>를 비롯해, <낙화유수>, <황성옛터>, <타향살이> 같은 트로트 명곡이 모두 3박 계통입니다. 사용된 음계도 우리 음계와 유사합니다. 어색함은 덜면서 트로트 리듬에 익숙해진 대중들은 차차 2박 계통의 노래도 쉽게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트로트 음악이 우리에게 이식된 과정입니다.
트로트 유행 초기 단조 중심의 유행가들은 주로 젊은 층의 감성을 자극해 패배주의와 염세주의의 정서를 확산하는 주범으로 몰리며 일제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이 만주전쟁을 일으킨 이후에는 활달하고 흥겨운 느낌이 강한 장조 중심의 트로트 곡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들 곡 중 상당수는 오늘날 친일 가요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1) 뽕짝은 ‘일본(本/뽕. 일본) + 작(作. 노래)’처럼 ‘일본 것’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으며, 이론가 박용구는 ‘일본 + 짝(덩이. 짐짝, 게다짝)’의 뜻으로, 일본의 유행가를 비꼬는 데서 시작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면 2박자 계통인 트로트를 양풍으로 반주할 때 ‘쿵짝 쿵짝’하는 소리가 마치 ‘뽕짝 뽕짝’하듯 들려 이를 뽕짝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모두 60년대 소위 ‘왜색문화’ 배격 운동 과정에서 생겨난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