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좋은 언어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랑과 어긋난 길들

페미니즘은 여성이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확장시켜

「B사감과러브레터」 이어쓰기 ①사랑의 진실 ②B사감과 자매들 ③B사감과 운명의 화살 ④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 2 ⑤신여성 ⑥눈물

‘왜’와 ‘만약’을 허용하는 역사학적 상상력

코로나 시대의 역설

김소월 혹은 흰 달의 노래를 찾아서

일제강점기 장안을 사로잡은 유행가, 트로트

눈 오는 밤, 식민지 북국의 한 로맨티스트

‘디귿’ 없는 글쓰기

밀란 쿤데라, 두 번의 추방

앵앵시사(櫻櫻詩社) 문우들

민족혼의 숙소 현저동 101번지

쓸쓸하고 초라했던 만년의 자화상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고생은 참을 수 있지만 치욕은 참을 수 없었던 시인 부재(不在) 하는 방랑자 '예술의 목적은 인생’이라던 고독한 ‘원형적비평가’ 멋, 술 그리고 病

①나 세상 떠날 때,그가 울까봐 걱정이다 ②한 달 동안,감정적

엄마가 사준 옷

아빠를 중고로 팔아버렸어

①숭어 이야기 ②바보의 웃음 ③통증이 오는 시간

공포의 대상 혹은 욕망의 주체

팬데믹 시대, 인간의 존엄을 향한 작가들의 질문

부자를 만들어주는 요술책들

1980년대 영국 사회에 대한 세밀하고도 방대한 증언

되풀이 속에서 되풀이되는

또 다른 벽, 타문화와 역사에 대한 선이해

신석정 시인의 영역 시선집을 내며

대산세계문학총서,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2020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

단편소설

엄마가 사준 옷

박민규 소설가, 1968년생
장편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지구 영웅전설』 『누런 강 배 한 척』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소설집 『카스테라』 『더블』 등

엄마가 사준 옷


천사들이 얼마나 근육질인지
당신이 알까 모르겠다.

비단 천사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사후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근육인데
미스터 올림피아드 정도의 근육 없이는
누구도 감히
명함을 못내미는 곳이 이곳이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당신도 궁금했을 것이다.

내가 싹 다 말해주겠다.

지금부터, 낱낱이.

내 얘기가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장담은 못하겠다. 사람마다 경우가 다를지 몰라 하는 말이다. 그래도 경험자의 얘기니 또 모르지, 알아서 그닥 손해 볼 일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선 일러둘 말이 있다. 지옥이니 천국이니 그딴 건 없다는 사실이다. 그걸 몰라 뜯긴 돈이 얼마였나를 생각한다면 살아 행하는 대부분 일들이 얼마나 등신짓인지도 알 수 있겠지. 그래서 죽으면 어디로 가냐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싹 다 말해준다고. 내 경우엔

로쿠롯

이란 곳으로 왔는데 정확한 스펠링은 아무도 모른다. 귀에 들어온 소리를 그대로 옮긴 것이니 그 점에 있어서는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어쨌거나 나는 죽었고(기억은 사라졌으나) 로쿠롯에서 깨어났다. 천국이나 지옥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심지어 일종의 주식회사라는 소문도 돌았으나 설령 주식이며 그런 게 있다 해도 나와는 거리가 까마득 먼 일이다. 내게 있어 로쿠롯은 수용소나 교도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느낌의 시설이다. 그렇다고 철창이 있거나 호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커다란 건물 내부에 구조물과 벽이 있고... 그 안에 모여, 혹은 흩어져 저마다(알아서)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축사(畜舍)와 비슷한 느낌인데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이곳을 ‘농장’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때문에 저마다의 영역이 있고 무리가 생기면 무리의 구역이 정해진다(물론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마치 동물 같다 여길지 모르겠지만
차라리 동물이면 좋겠다는 게 내 솔직한 생각이다. 생각을 해야 한다는 고통... 이 길고 끝없는 시간을 생각 없이 살 수 없는 이 고통이 로쿠롯의 유일한 ‘형벌’이기 때문이다. 불구덩이에 떨어진 것도 아니요 지옥의 사자가 등 뒤에서 채찍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그저 하릴없이 로쿠롯에 ‘있는’ 상황인 것이다. 나갈 수도, 신호를 보낼 수도 없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출입구나 창(窓)을 찾을 수 없으므로 이곳의 위치를 가늠할 길조차 없는 것이다. 외부에서 본다면 어쩌면 커다란, 폐쇄된 공장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땅속 깊은 어딘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어쩌면 바다 밑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이곳이 내가 도착한 사후세계다.
놀랍게도 이곳에 전기가 있다. 높디높은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유일한 조명이자 빛인데 그것이 또, 유일한 전기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손닿는 곳에 콘센트가 있거나 다른 가전(家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놀라우리만치 벽과 바닥이 전부인 이유는 그 무엇도 실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먹지 않아도 되니 식당이 필요치 않고 배설도 잠도 없으니 화장실, 침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기억이 삭제된 상태라 되새길 추억조차 없는 곳이 로쿠롯이다. 하물며 지시사항도, 통제도 없다. 어지간한 수준의 국가에서 그 혜택을 입고 사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통제가 없다니, 그건 곤란하잖아.

내 말이 그 말이다. 사후세계의 품위를 생각해도 이점은 여전히 불만으로 남아있는데(내게 있어) 개선의 여지는 1도 없다. 그러니 격이라든가 질서 자체가 없는 셈이다. 고인은 좋은 곳으로 가셨습니다. 두 손을 꼭 모으고 흐느끼며 떠올리는 막연한 장소... 그런 기대는 일찌감치 접는 것이 모두의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다만 첨언을 하자면(이건 내 생각인데), 통제를 하지 않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는 하다. 이곳에선 더 이상의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싸움이 난다거나, 설령 내가 누구를 목 조른다 해도 그러니 통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무도 더는 죽지 않고 누구도 더는 죽지 않으니 무슨 일이 난다 해도 보나마나 하나마나... 아무것도 변할 게 없다는 얘기 되겠다. 돼지처럼 꿀꿀거리진 않아도, 그래서 바글바글
모여있는 이곳을 농장이라 부른다. 그리고 ‘룸’이 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죽은 자들은 전부 룸에서 깨어나 농장으로 이감된다. 물론 룸도 우리가 붙인 명칭인데 쉽게 로쿠롯의 본관 사무실,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나 역시 그곳에서 눈을 떴다. 차가운 수술대 같은 곳에 누워 있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죽었다는 사실만큼은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부르르 몸을 떨며 지옥이니 천국 같은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팔다리는 미동도 하지 않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안정기 수명이 다했는지) 파르르 점멸하는 형광등을 바라보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다. 혹시 살아생전의 병원 수술실이 아닐까도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그런 느낌의 공간은 아니었다. 하기야 천국에 무슨 돈이 있겠는가. 세금을 걷을 리 없으니 이 정도 낙후된 시설이며 불편은 견디는 게 도리란 생각도 들었다. 곧 천사들의 안내가 있겠지, 했더니 과연 우루루 몰려오는 발자국 소릴 들을 수 있었다. 날개 소리가 아닌 발자국 소리였다. 천사들은 날개가 없었고... 만약 어깨를 부딪힌다면 내 몸이 박살날 것 같은 우락부락 근육돼지들이었다. 하나같이 멜빵이 붙은 작업복 바지에 장화를 신었는데 다들 웃통을 벗고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점멸하는 형광등을 배경으로, 그래서 여러 개의 방독면들이 빤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두려움을 느낄 새도 없이 곧바로 작업이 시작되었다. 속전속결이었다. 이, 작업이라 함은
내 머리 꼭대기를 메스로 절개한 후 통째로 피부를... 그러니 나라는 사람의 껍데기를... 잡아당겨 벗기는 것이었다. 특별한 기구를 쓴다거나 기본적인 마취도 하지 않았다. 지났으니 하는 말인데 죽은 사슴의 가죽을 벗기는 공정도 차마 이 정도의 주먹구구는 아닐 것이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목소리가 나오지도 않았지만). 차라리 죽여 달라 생각이 전부였지만 나는 이미 죽음이라는 카드를 써버린 직후였다. 천사들은 닥터나 간호사보다는... 푸줏간의 수제소세지 장인이나 고속도로 공사 현장의 인부들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쫙~ 쫙 숙련된 팀워크로... 따로 신호 없이도 그래 거긴 하나, 둘, 셋 하는 느낌으로 부욱~ 내 가죽을 통으로 벗겼다. 무지막지 근육돼지들은 말해 무엇하며 메스로 톡, 톡... 그러니 당겨진 가죽과 생살의 경계... 미처 끊기지 않은 부분을 자르는 천사가 있었는데 그놈이 제일 미웠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열 개의 발가락들이 바들바들 가죽과 작별을 하고 나자 놈들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정신 차리라는 듯 내 좌우 잇몸(뺨)을 번갈아 치고는 한 천사가 말했다.

움봐쀍화~

놈들이 쓰는 언어를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목소리에도 이두근 활배근 돌 같은 근육이 잡힌 느낌이어서 덜덜덜, 나는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곧바로 놈들은 가죽을 벗긴 내 몸에다 니스칠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니스인지 뭔지 알 길은 없지만 페인트 붓으로 슥슥 칠한 투명한 도료란 것만은 확실하다(차후에야 이것이 피부의 역할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쇼크로 나는 기절 같은 걸 했다 깨어났는데 눈앞엔 여전히 천사가 서있었다. 움봐쀍화뿕콰슯부~ 트랜지스터 라디오 같은 기계를 손에 쥐고 놈은 쉴 새 없이 지껄였는데 처음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가... 마치 주파수가 맞아가듯 차츰차츰 말귀가 트이기 시작했다. 너는 죽어 여기로 왔고, 이곳은 로쿠롯이라고 했다. 알겠지? 놈이 물었다. 마치 수압 높은 수도를 틀기라도 한 듯 쏴아~ 빠르게 말하고는 다시 확, 꼭지를 잠그듯 알겠지? 묻는 게 놈의 말버릇인데... 대답이 늦으면 바로 좌우 잇몸에서 번갈아 불꽃이 튀었다. 너의 기억은 모두 삭제되었고 알다시피 이곳을 나가는 그날까지 ‘피부’는 우리가 보관한다. 알겠지? 이 순간부터는 너도 언어를 쓸 수 있고 또 여기선 모두가 동일한 언어를 쓸 것이다. 로쿠롯에 할당된 채널은 152번, 따라서 앞으로 너희들이 쓰게 될 말은 체코어이다. 알겠지?

알다마다요.

목소리가 나왔는데 절로 체코어였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체코어고 나발이고 말귀가 열리고 말이 통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지덕지였다. 따라와, 알겠지? 묻고픈 말이 한가득인데도 다짜고짜 놈을 따라 어둑한 복도를 걸어야 했다. 그리 긴 복도가 아닌데도 걷는 일이 고역이었다. 가죽이 홀라당 날아간 육신은 비틀대기 일쑤였고 이것이 과연 내 몸인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천사의 뒤를 따르던 그 순간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자각하고 있었다. 놈의 설명과는 달리, 내 기억의 전부가 삭제되지 않았다는 사실... 삭제를 한다고는 했는데, 아마도 부욱~ 북 내 껍데기를 벗길 때처럼 거칠게 일을 했음을... 따라서 듬성듬성 기억의 밑동과 뿌리들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요행인지 불행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빌어먹을, 천사놈들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때문에 나는 ‘체코’가 - 가본 적은 없겠으나 ­ 지도 어딘가에 박힌 나라 이름임을 알 수 있었고, 어쩌면 로쿠롯이 체코에 있거나 그 지하... 내지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체코 당국에 전기세를 납부하는 시설이 아닐까, 추리를 하기도 했는데 그야말로 부질없는 짓이었다. 최근 로쿠롯에선 소위 ‘채널 정비’가 있었는데, 때문에 그날 이후로 다들 중국 광둥어를 쓰게 된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형광등 너머 암흑의 천장에서 울려퍼지던 안내 방송... 귀와 머릿속을 헤집는 굉음과 몇 초간 지속되는 고막의 압력... 그리고 곧바로 농장의 모두가 정든 체코말을 버리고 중국 광둥어로 대화를 하게 된 것이었다. 어쩌면 밀린 전기세 때문에 사업장을 중국으로 옮긴 건지도 모르지만... 이런 건 하나 중요치 않다. 정말 중요한 건 내가 체코를, 또 중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을 여전히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기억이 남아있다는 것... 어쩌면 로쿠롯에서 이는 단단한 근육을 가지는 것보다 중요한 일일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놈을 따라 들어선 곳은 보다 커다란 또 다른 룸이었는데, 거기엔 수십 명
니스칠을 마친, 역시나 가죽이 홀라당 벗겨진 죽은 자들이 모여 있었다. 마치 대형 병원의 휴게실 같은 그 장소에서 우리는 꽤나 긴 영상을 봐야 했는데 근육돼지... 아니, 천사의 수압 높은 수돗물 콸콸 설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이것은 로쿠롯에서 허용하는 유일한 너희들의 생전 ‘기억’이다. 둘째, 너희는 모두 이 사건과 관련된 사망자들이다. 셋째, 너희는 이 영상을 공동의 기억으로 간직해야 하는데 누가 누구인지 신원을 알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알겠지?

돌출된 안구.
시뻘건 근육과 생살...
군데군데 뼈가 보이는
처참한 육신으로

때문에 모두가 열중해서 영상을 시청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니 나를 포함, 여기 모인 전부가 ‘미국인이라는’ 방증인데... 한 백인 남자가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흑인 소년과 시비가 붙는다. 경찰로 보이지만 실은 경찰이 아닌 그 남자가 느닷없이 총을 꺼내 소년을 사살한다). 그는 흑인들의 조직적 범죄에 맞서는 자경단원인데 죽은 소년은 열여섯의 평범한 학생이었다(심지어 우등생이었다). 남자는 끝까지 자신의 행동이 정당방위였음을 주장하지만 흑인사회가 주축이 된 여론은 이를 결코 믿지 않는다. 이어지는 흑인들의 시위에도 재판부(백인으로 구성된)가 끝내 그를 무죄 석방하자 폭동이 일어난다. 흑인들의 습격으로 지역 백인 자경단원들 다수가 사망한다. 그리고 자경단의 보복으로 또 다수의 흑인들이 사망한다. 걷잡을 수 없게 된 폭동과 경찰의 진압... 총격과 시가전으로 숱한 사망자들이 발생한다. 영상 마지막에는 사망자 전원의 명단과 사진이 차례차례 공개되었다. 그러니 가죽을 홀라당 하고 여지껏 영상을 지켜본 모두의 명단이었다. 젠장할! 누군가 체코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영어인지 체코어인지 실은 분간도 가지 않았다. 보복과 혐오로 서로를 죽인 미국인들이 체코어로 열불을 토해내며 한동안 소란이 일었는데... 그제서야 천사놈들의

또 로쿠롯의, 꿍꿍이를 알 수 있었다. 이제 누구도 스스로를 기억하지 못하고, 더는 누구도 상대가 흑인지 백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는 알게 되었고... 하물며 여기 있는 모두가 5102구역으로 공동 이감된다고 했다. 알겠지? 근육돼지의 목소리는 야멸찼다. 그리고 마치 돼지를 몰고 가듯 천사들은 우리를 구보로 이동시켰다. 허나아 두울 서이 너이 핫둘서이너이 핫둘셋넷! 잘도 구령을 붙여가며 근육돼지들이 왼발, 왼발~ 발을 구르자 얼떨결에 모두가 비틀대며 뛰어야 했다. 이른바 ‘농장’은 가죽을 홀라당한 우리가 뛰어가기엔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먼 곳이었다. 당연히 끔찍한 육신의 고통이 따랐지만 나의 정신적 괴로움과 비탄, 분노는 이를 훨씬 상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나에겐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천국도 막나가는 곳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왼발, 왼발~ 달리는 동안 스물스물 기억의 실뿌리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나는 순수 혈통의 백인이고... 자경단원이었다. 이름이나 신원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으나 펍(Pub)에서 나누던 우리끼리의 대화... 테이블의 분위기와 주변 공기의 느낌을 되새길 수 있었다. 나의 분노... 우리들의 혐오... 어쩌면 나는 소년을 사살한 당사자... 사건의 주인공인지도 몰랐다. 혼란과 원망이 밀려들었다. 무엇보다 ‘믿었던’ 사후세계가 이 같은 탁상행정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이렇게 가죽을 홀랑 까서 한곳에 섞어두면 뭐,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할 줄 알았나? 하도 어이가 없어 껍데기를 잃은 불알이 마하파이브(요요 기술의 한 가지)를 타는 요요처럼 출렁거렸다. 당장 이곳의 책임자를 만나 생각을 고쳐주고 싶었지만 왼발, 왼발~ 눈앞의 근육돼지가 일단 너무 무서웠다.
농장에는 문이 없었다. 높다란 절벽 같은 곳에서 그냥 우리를 밀어 떨어뜨리는 것이 입장(入場)이었다. 아무도 죽지 않으니 위험하다고 할 순 없지만...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피치 못할 이유로 탁상행정을 할 수밖에 없다면... 하다못해 잘 지내라,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노력해라... 이 같은 싸구려 덕담, 입에 발린 소리라도 늘어놓는 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젠장할, 경험이 부족해 이러나 했더니 우리만 여기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주 잠깐 절벽 위에서 농장을 내려다 본 그 순간... 얼마나 많은 죽은 자들이 이미 이곳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건 뭐, 돼지가 따로 없었다. 꽤엑~ 체코어로 비명을 지르며 구르고 구르고 구르고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쿠션이 1도 없는 쎄맨 공구리였다. 심지어 천사들은

 

그리고 그 후,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로쿠롯에서의 진짜 생활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절벽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나는 긴 시간 의식을 잃었는데 불행 중 다행을 말하라면 기억... 그 여파로 더 많은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꿈을 꾸었다. 의식을 잃었기에 꿈꾸는 게 가능했고... 살아생전의 꿈, 소중한 유년기의 기억이었다. 엄마와 함께였다. 내 작은 고사리 손을 엄마가 꼭 쥐고 있었고... 함께 걷는 길 위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도 어릴 때 살던 동네가 분명했다. 시장 골목이었다. 코너를 낀 상가 벽을 따라 작은 화단이 보였는데
미키마우스 같고 스누피 같은 꽃들이 바람과 햇살, 나비와 어울려 장난을 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슬로우로 보이는 꿈이었다. 그래서 온갖 빛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듯 위태로이 움직이는 꿈이었다. 내 한 손엔 커다란 사탕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작은 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작은 별(Twinkle, twinkle, little star) 동요를 배운 직후라 그랬을 것이다. 반짝반짝 작은 별을 쭙쭙, 소리 내어 빠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체코어가 아니라 알아듣진 못했으나 대신 반짝반짝... 나를 비추는 별 같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숱 많은 금발을 동여맨 엄마의 머리띠도 눈에 익은 것이었다. 늘어나고 줄어드는 탄성이 신기해 늘 내 손을 떠나지 않던 장난감의 하나였다. 그리고 낯이 익은 동네 사람들... 이름을 모를 리 없으나 누구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 얼굴들이 차례차례 인사를 건네왔다. 그들이 끌고 나온 개와도 엄마는 인사를 나누었다. 큰 개는 무섭지만 작은 개는 귀엽다고 엄마가 말했는데 어떤 강아지보다 귀여운 건 사실 ‘너’라는 말을 내 귀에 속삭였다. 나는 킥킥 웃음이 터져 나왔고, 내 간지런 귀들이 부풀고 부풀어 미키마우스의 귀보다도 커진 기분이었다. 미키는요? 귀엽지. 스누피는요? 스누피도 귀엽지. 그런데 엄마, 저 사람은 죽었나요? 저건 사람이 아니란다, 마네킹이라는 인형이지. 처음으로 마네킹을 본 날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처음으로 내 옷을 사준 날이었다. 그날의 하늘처럼 옅고 푸른, 하늘색 셔츠였다.

눈을 뜨니 로쿠롯이었다.
마치 아폴로 11을 타고 달, 같은 곳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바람도 중력도 없다는 달의 표면에
엄마가 사준 옷을 깃발로 꽂아놓고 말이다.

셔츠를 입지 않아서인지 로쿠롯이 새삼 춥게만 느껴졌다. 어슬렁 주위를 걷고 있는 인체 해부학 표본 같은 것들이... 굳이 자각을 하지 않아도 이곳이 사후세계 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돈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마찬가지, 흉측한 내 몰골을 파악하며 나는 한동안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적응을 위해 애쓰면 애쓸수록 공포가 밀려들었다. 더 이상의 죽음도 없다면서 뭔 놈의 공포냐고? 그건 당신이 살 만한 세상...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키가 미키고 스누피가 스누피인 세상에 있어 그런 것이다. 진짜 공포가 뭔지 말해줄까? 미키가 미키인지 알 수 없고 스누피가 스누핀지 알 수 없는 세상... 피부색 구분 없이 다 같은 몰골의 인간들이 모여 있는 세상이다.

뭘 봐?

지금 빤히 나를 노려보는 저놈이 흑인인지 백인인지 알 수 없다는 공포... 서로를 확인할 길 없는 혼돈의 지옥이 로쿠롯인 셈이었다. 철창에 갇힌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기억을 깡그리 잃었다면 침이나 질질, 세상 편하게 놀고 자빠지겠지만... 문제는 나처럼 ‘기억이 남은’ 자들이었다. 눈앞의 이놈이 깜상(nigga)이 아닐까? 혹시 저 놈이 뭔가 눈치 챈 게 아닐까? 설마 여기까지 와서 복수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싹둑, 잘리고 밑동만 남은 기억은 불안을 가져다주었고 수(數)적으로 어쩌면 열세일지 몰라... 밑도 끝도 없는 불안은 고립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총이, 총이 지금 내 손에 없다는 것이 더 바싹, 피를 말리는 일이었다.

뭘 보냐고, 이 새꺄.
너 자꾸 쳐다보면 우리 엄마한테 다 일러버린닷!

꿈에서 덜 깬지라 덜떨어진 소리를 뱉고 말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나. 죽어서도 앞날 걱정이 구만리란 사실에 나는 그만 눈물이 났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정말로 눈앞이 깜깜했다. 이런 나를 구해준 것이 ‘토끼 존(John the rabbit)’이었다. 이름은 물론 자신이 지어 붙인 것이고, 나처럼 ‘하얀 기억(백인의 기억)’을 가진 로쿠롯의 인도자였다. 한 무리의 죽은 자들에게 잡혀 부근의 벽인지 담인지 뒤로 끌려갔는데 엄마라니, 그런 말을 어떻게 알았나?
혹시 기억나는 게 있나? 존이 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신입들이 입장하는 절벽 아래가 인도자 존의 구역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진짜 백인을 가려내는 일... 그리고 그를 백인만의 단체로 인도, 보호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기억이 중요했다. 기억은 피부 자체를 털려버린 로쿠롯에서 자신의 피부색을 입증할 유일한 단서이자 증거물이었다. 애석하지만 모두를 구원할 수는 없는 법이라네, 존은 말했다. 그래서 기억은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남는 것이고... 자신은 너무너무너무 오래 이 일을 해왔기 때문에 거짓과 참된 기억을 분간하고 심사하는 심판관이라고도 했다. 처음엔 나도 그를 경계했는데 그가 백인인지, 아니면 백인인 척하는 흑인인지를 분간할 길이 없어서였다. 때문에 나는 인종을 드러내는 어떤 표현 없이

엄마가
처음으로 옷을 사준 얘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아름다운 얘기로군, 참으로 놀랍고도 눈부신 기억일세... 그가 중얼거렸다. 존은 잠시 고개를 들어 형광등을 바라보았고, 이토록 풍부한 ‘기억자’를 만난 것이 무척이나 오랜만이라며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고는 곧바로 존은 나를 백인으로 규정했다. 백인은 백인을 알아보는 법이라네. 아무리 순간의 기억이라 해도 말일세... 때문에 형제여, 하고 그가 나를 껴안는 순간 달에서 떨어진 옅고 푸른 하늘색의 셔츠가 따스이 내 몸을 감싸는 기분이었다. 로쿠롯에 온 걸 진심으로 환영하네. 두툼한 그의 손이 내 등을 두드리는 순간 나는 울컥, 목이 메었다.
확실한 백인으로 보이는 여섯을 더 데리고, 토끼 존은 우리를 ‘십자성단’으로 인도했다. 머나먼 길을 걷는 내내 나는 그의 말벗이 될 수 있었고, 때문에 로쿠롯에 대한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십자성단은 구역의 이름이라고 했다. 더불어 우리가 건설하려는 왕국의 이름이라고도 했다. 지금도 두 분의 지도자가 계시다네. 생전의 여러 기억들은 물론, 자신의 이름까지 기억하는 최고 레벨의 기억자들이시지. 두 분의 존함을 미리 새겨두는 것도 좋을 걸세. 한 분은 레오폴 2세), 다른 한 분의 존함은 헨드리크 페르부르트)시네. 오로지 백인들로만 이루어진
또 장차, 로쿠롯을 환하게 밝힐 백인들의 왕국... 그 위대한 나라의 왕위에 오를 분들이시지. 자네도 느꼈겠지만 우리의 사후세계도 완전한 곳은 아니라네. 특히나 인구 분포로 보자면 압도적으로 껌둥이들이 많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러니 기억을 지우고 피부를 벗기는 천사들의 행위를 비판만 해서는 안 된다 이 얘기네. 만약 기억을 유지하고 피부를 고이 간직한 채 온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겠는가 말일세. 우리에게 총이 있나, 채찍이 있나.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게지. 존은 살아생전 아프리카와 신대륙을 오가는 노예선의 선원이었다고 했다. 선원이요? 그렇다네, 어쩌면 애초부터 인도자가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르지. 천사들이 끝내 내 기억을 지우지 못한 이유도 분명 그 때문일 거라 생각하네. 그래, 그 냄새... 노예선의 선원들만 맡을 수 있는 그 지독한 냄새가 끝까지 머릿속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을 테니 말일세. 자네, 혹시 ‘샴페인 따기’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 물론 실제로 샴페인을 터트린다는 얘기는 아니고 그 끔찍한 작업을 선원들이 빗대어 부르던 말이라네.
그날 나는 갑판에서 샴페인을 따고 있었네. 내가 생생히 기억하는... 바로 그날 말일세. 노예 무역이란 게 뭔가. 공들여 잡은 노예들을 팔아 끝장 이윤을 남기려 덤비는 일 아닌가. 그런데 하도 전염병이 돌고 오는 도중에 노예들이 죽어버리니 이거야 원, 수지가 맞아야 말이지. 그래서 원인이 뭔가, 알아보니 배 밑바닥에 빼곡히 이것들을 실어 오는데 똥도 지리고 오줌도 지리고... 나뭇바닥이 썩도록 이것들이 지려대니 거기서 병균이 생기고 병이 퍼지면서 몰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고안한 것이 똥구멍 마개였다네. 미연에 이를 방지하자,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똥을 못싸게끔 틀어막아 버리자... 아프리카엔 야자라는 열매가 있는데 질긴 섬유질이 칭칭 감긴 그 열매의 씨로 우선 놈들의 똥구멍을 꽉 틀어막는다네. 그리고 바다를 건너
신대륙에 도착하면 누구든 나서서 그 마개를 따야 했지. 이렇게 턱, 갑판 난간에 놈들의 엉덩이를 걸쳐 놓고 말이지.
그러니까 해를 향해... 또 바다를 향해 말일세. 오, 참으로 그 끔찍함이란... 시커먼 엉덩이 사이를 헤집어 야자씨를 쥐는 순간 이미 진동이... 뭐랄까, 마치 용암으로 들끓는 지옥문의 고리를 쥔 기분이랄까... 손에도 귀가 있는지 부글부글 물 끓는 소리 같은 것이 손을 울리고 어깨를 울리며 온몸으로 전달된다네. 놈들의 똥구멍은 또 어찌나 단단히 그걸 물고 있는지... 있는 힘을 다해 당겨도 뽑힐까 말까 하는 마개를... 그래도 끝내 코르크 마개를 빼듯 잡아 빼면 말일세... 대체 어떤 소리가 나는지 아는가? 그야말로 함포를 사격하는 소리... 악마의 나팔소리와 함께 시커먼 물대포가 바다를 향해 터져 나간다네. 그리고 그 냄새란... 아아... 결국 나는 작업을 다 못 끝내고 들것에 실려 하선을 해야 했네. 여인숙에서 며칠을 끙끙 앓아누웠지. 그 냄새... 반년이 지나도록 손에서는 망할 놈의 그 냄새가 지워지지 않았다네. 그게 믿겨지는가? 아무리 손을 씻고 소독약을 문질러도 말일세. 뭐? 두 달이 넘도록 틀어막으면 얼마나 많은 똥이 쏟아져 나오냐구? 장담컨대, 만약 이러한 비법을 과거에도 알았다면 제임스 타운)이 불타 사라질 일도 없었을 걸세. 암, 그렇고말고.
선택받은 십자성단의 형제들... 그러니까 토끼 존이 들려준 여타 ‘기억자’들의 기억엔 어떤 공통점이 존재했는데... 시대와 상관없이 이른바 세간에서 ‘인종 차별’이라 일컫는 일들, 즉 그러한 연유로 죽은 자들의 이야기란 점이었다. 그러니 로쿠롯은 그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수용한 일종의 교화시설인 셈이었다(추측컨대). 검은 미로와 오렌지의 국경)... 로쿠롯의 중심을 지나는 머나먼 길을 걸어오면서 존과 나는 서로에게 최고의 말벗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모순된 말이지요.
인종 갈등이나, 인종 차별과 같은 정의는
같은 인간끼리
다시 말해 동등한 인간의 경우에 한해
적용해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내 말이 그 말이네.
그러니 이곳에 같은 인간이랍시고 깝치는
껌둥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만약 모두의 기억이 살아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는 게지.
아닌 게 아니라 로쿠롯은 지금도 전쟁 중이라고 존이 말했다. 끝내 해명할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그거라네. 세상을 만든 그분께서 왜 저토록 무도한 종(種)들을 우리와 섞어 놓으셨나 하는 점일세. 살아생전도 모자라 우리가 사망한 후에도 말이지. 더 큰 비극은 심지어 저들 중에도 선택받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네. 검은 기억을 가진 자들... 우리처럼 그 기억의 일부를 가지고 온 자들 말일세. 그들도 결국 자신들의 세력을 꾸리고 말았네. 때문에 로쿠롯은 서로가 지닌 그, 기억의 전쟁터인 셈이지.
같은 편을 어떻게 구분하나. 또 죽음이 없는 곳에서의 공격... 전투는 어떤 식으로 행해지나가 궁금했는데 얼마 안가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여기가 바로 십자성단일세. 전체적인 풍경은 엇비슷해도 왠지 기분에... 형광등이 더 희게 보이는 숭고한 영역, 십자성단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위대하신 두 지도자 레오폴 2세와 헨드리크 페르부르트 경을 알현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백인의 증표, 원(圓, kyklos)을 손바닥에 새기는 의식을 치러야 했다. 말 그대로의 원이었다.



알고 보니 모두의 손바닥에 새겨진 표식이었다. 의식은 간단했는데 빨대처럼 생긴 특이한 대롱을 손바닥에 대고 조금씩 원을 그려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대롱에서 곱고 하얀 가루가 흘러나오고... 그 가루가 가느다란... 둥근 선을 이루면 그걸로 끝이었다. 황송하옵게도 레오폴 2세께서 직접 시술을 해주셨다. 가루가 살 속에 스며들면 이처럼 검은색 선으로 변할 걸세, 자세한 존의 설명도 뒤따랐다. 토끼 존의 손바닥에도 똑같은 원이 있었다. 그러니 다 같은 형제의 ‘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미칠 듯한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손바닥 중앙에 작은 분화구가 솟아올라... 천년을 기다린 불의 화산이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순간의 고통이 아니라 근 일주일, 땅속 모든 용암을 토해내듯 지속되는 그 고통에 비하면 부욱, 북 근육돼지들이 내 가죽을 벗길 때의 고통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는 쉴 새 없이 까무러치기를 반복했고 결국 마지막 연기를 토해 낸 화산이 꺼지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대체 이것이 무엇입니까? 내 질문에
소금, 바로 우리의 땀이고 눈물이고 무기이기도 하지. 존이 말했다. 소위 ‘소금공장’이란 곳을 견학시켜주며 존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도열한 수백 명의 형제들이 오로지 땀을 흥건히 흘리기 위해 하루 종일 근력 운동을 하고 있었다. 요약하자면 그 땀에서 얻은 소금을 다시 인체에 뿌릴 경우, 천사들이 발라놓은 도료가 소금을 흡수하고... 그 피막을 지나면서 소금은 알 수 없는 독성을 띠게 되는데... 그것이 살과 근육을 태워버리는(말이 그렇다는 거다)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얘기였다.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알아낸 비법이라네. 손바닥에 뿌린 가느다란 선이 그 정도의 고통을 주는데 한번 생각해보게나, 소금가루를 뒤집어쓴다면 어느 정도의 고통을 겪게 될지 말일세.

나는 답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때문에 소금공장에서 일하는 형제들은 다들 어마어마한 근육의 소유자들이었다(천사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힘든 사역(使役)을 하는 만큼 이들은 모두 영예로운 직위에 올라있었고 각자의 표정에도 자랑스러움과 강인함, 또 긍지가 묻어나 있었다. 자, 이제 껌둥이들을 보러 가볼까? 오렌지의 국경을 다시 넘어 존은 금단의 영역, 다시 말해 ‘선택받은’ 흑인들의 보금자리로 나를 안내하였다. 영역을 침범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 경계의 구조물을 타고 올라 놈들을 관찰할 수 있는 높은 지대로 데려간 것이었다. 나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이곳 로쿠롯에 실제로 깜상들이 존재한다니... 천사들이 베푼 특혜인가? 아니면 실수인가? 육안으로도 확인 가능한 검은 피부의 죽은 자들이 그곳에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설마 그럴 리 있겠는가. 미소를 지으며 존은 말했다. 저것은 전투의 결과라네. 우리의 용맹한 공격에 온몸이 검어진 것이지. 우리가 발명한 무기는 그래서 여러모로 유용하다네. 설사 빗맞아도 몸의 일부가 변색되니 차후에도 놈들을 쉽게 구분할 딱지를 붙이는 셈이니까 말일세. 다시 말해 천사들이 아무리 껌둥이를 없앤다 해도
더는 문제될 게 없다, 이 얘길세. 우리가 나서서 저렇듯 다시금 껌둥이로 만들면 그만이니까. 이제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좀 오는가? 존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소금을 뒤집어썼다는 상상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는데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인도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야 쓰겠는가). 손바닥을 달군 십자성단의 표식을 얻고 나자 나도 어느새 결의와, 신념을 가진 전사로 거듭난 기분이었다. 그럼, 놈들은 어떤 무기를 씁니까?
자경단원의 기억을 살려 내가 묻자 놈들에겐 별다른 무기가 없네, 존이 답했다. 다만 징그러울 정도로

그 수가 많을 뿐이지.

하여 복귀한 나는 정식으로 십자성단의 전투원이 되었다. 온갖 위험을 불사하고 시도 때도 없이 전투를 치러야 하는 일종의 군인이었다. 조를 이뤄 적진에 침투하는 일도 잦았고 게릴라처럼 매복해있다 소금세례... 놈들을 아주 고릴라로 만드는 전과(戰果)를 올리기도 했다. 때로 고통에 나뒹구는 여자와 애들을 볼 때도 있었으나 내 사전에 후회란 있을 수 없었다. 이 모두는 십자성단의 왕국 건설을 위함이고... 이는 결국, 보다 나은 사후세계를 위한 일이니까. 처음엔 궁수처럼 대롱을 들고 다녔는데, 경력이 붙고 계급이 올라가자 드디어 나만의 글러브를 소유할 수 있었다. 대롱은 알다시피 훅훅(안에 소금을 넣고) 입으로 불어 적을 사격하는 무기인 반면, 글러브는 그야말로 치명상을 가하는... 근접해서 옛다, 소금받아라~ 한 움큼 손에 쥔 소금으로 상대를 발라버리는 일종의 중화기였다. 만약 실물을 본다면 이게 무슨 중화기야? 그냥 장갑이잖아, 실망할 게 뻔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로쿠롯의 환경을 경험한다면 차마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못할 것이다. 앞서 말한 소금이 형제들의 ‘피땀’이라면, 대롱이나 글러브는 그야말로 형제들의 ‘살’인 셈이었다. 십자성단의 선택받은 자들 중엔 기억이 아예 없는, 머리가 텅 빈 형제들도 꽤나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약간의 남겨진 흰 피부를 붙이고(천사들의 실수로) 로쿠롯에 들어온 자들이었다. 토끼 존의 예리한 안목은 이 ‘확실한’ 백인들을 놓치는 법이 없었고... 소금이 묻어도 아무렇지 않은 인간 본연의 피부는 이곳에서 소금을 다루고 나르는 도구, 용기, 무기로 제작되는 귀하디 귀한 소재였다(만약 글러브가 없다면 우선 내 손이 남아나지 않겠지). 때문에 나는 형제들의 피와 땀, 살로 무장한 검투사가 된 기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내 활약은 엄청났다. 사후세계의 특성상 적을 죽이진 못하지만

지난 세월
2만 명에 이르는 깜상들을
실제로 ‘검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파우더 악마.
내게는 그런 별명이 붙었다.

그리고 로쿠롯은
예전에 비해 훨씬 ‘분명한’ 곳이 되었다.
이제야 좀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은가?

존도 고갤 끄덕였다. 이곳이 사후세계가 아니라면 나도, 토끼 존도 서로의 주름살을 바라보며 자네도 많이 늙었군... 한탄할 정도의 시간이 지난 셈이다. 그러니 그 사이, 또 얼마나 많은 죽은 자들이 이곳으로 건너 왔겠나. 인간을 만들어 이곳에 보내는 건 신일지 몰라도, 인간의 색을 정하고 칠하는 건 우리들의 몫인 것이다. 오랜 전투원 생활을 마감하고 지금 나는 존과 함께 근무를 서고 있다. 어느 날 중국 광둥어로 언어가 바뀌고 나서인데... 십자성단이 드디어 신성(神聖) 제국임을 선포하면서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세력이 확장되면서 이제 확연히 우리가 우위를 점하게 되자 아예 입구에서 흑백을 가려 버리자, 다시 말해 좀 더 일을 수월하게 처리하는 여건을 마련한 셈이었다. 세상 시간으로 따지자면 적어도 수십 년만의 귀환일 텐데, 농장의 입구와 절벽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어리버리
굴러 떨어져 정신을 못 차리는 죽은 자들을 선별해 옛다, 소금을 치대는 일에도 이제는 도가 텄다. 그런데 인도자님, 이곳에 오니 갑자기 잊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문득 토끼 존에게 고민을 토로한 것은 그리도 평화롭고 어찌 보면 무료한 어느 날이었다. 저 절벽을 보고 있자니 말입니다... 예전에 분명 천사가 그런 말을 했거든요. 여길 나갈 때까지 너희들의 피부는 우리가 보관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나간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그리고 여길 나간 사람이 있기는 했습니까? 그러자 바보, 하고 토끼 존이 대답했다. 천사들은 원래 아무 말이나 막 던진다네. 여지껏 여길 나간 사람이 없는데 그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나는 금시초문이라네.

그러면 그렇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방만한 새끼들... 무작정 여기다 사람들을 떨궈놓고 여지껏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놈들을 생각하니 오랜 세월 잊었던 분노가 다시금 끓어올랐다. 따지고 보면 길고 지루했던 전투... 혹독한 테러도 어쩌면 놈들의 방만한 운영, 내지는 경영의 결과라는 생각도 들었다. 소금 싸대기, 소금 허리케인, 소금 쓰나미(내가 개발한 필살기들의 명칭들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그게 다~ 뭐하는 짓들이었나, 이 말이다. 먹기 위해 농작을 할 일도, 다른 물질이 있어 공장을 돌릴 일도 없는데... 하다못해 심부름시킬 가게도 없는 이곳에서 흑인을 흑인으로 만들어서 뭐합니까? 쓸모도 없는데 말입니다, 했다가 실은 좌천을 당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다른 할 일이 없잖은가.

존은 그렇게 말했는데 뭐든 해야만 하는 게 인간이라네, 설사 죽었다 하더라도 말일세... 라는 말과 세트를 이룬 답변이었다. 물론 일리 있는 말이긴 하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지금에 와서 내 깨달음은 하난데... 뭘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근육돼지든 또 누구든... 이곳을 만들고 주식을 통째로 가졌을 그... 하여튼 말이다. 물론 눈앞에 있으면 찍소리도 못하겠지만 ‘격리’라는, 통제의 기본조차 모르는 ‘하여튼’이 나는 원망스러웠다. 희미하게 머릿속을 맴도는 자경단원(자랑스런)으로서의 일반 상식... 다시 말해 인류 보편의 그런 걸 생각해도 이건 진짜 아니지 않나, 아무리 사후세계가 막나간다 해도... 글쎄, 그 잘난 뜻은 알겠는데... 차라리 나에게 맡겨주면 더없이 민주적이면서도 합리적인 프로그램을 보란 듯이, 어떤 예산의 낭비 없이 운영할 자신이 있다는 것 이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말하자면 정해진 시간 운동을 시키고... 그래, 노역이면 또 어떤가? 뭐가 되었건 일정한 작업을 하고... 잘 짜인 커리큘럼으로 우리의 문제에 대해 건전한, 그리고 진정성이 느껴지는 토론을 하고... 그러니까 전부 내려놓고... 그래, 설령 내가 죄인이라 쳐도 이왕 사후세계에 온 김에 좀, 울지 뭐. 얼렐레 울렐레 흑흑거리며 제가 여기 와 뼈저리게 느낀 것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 뭐, 이런 말들을 줄줄 읊고 말로야 뭘 못해. 오, 실로 끔찍했던 제 삶을 돌아보건대 과연 어떤 자들이 나의 혐오를 부추겼던가, 진정한 나의 이웃 형제는 누구였던가... 오, 검은 형제여 제발 나를 용서해주게나. 그러니 막~ 참회의 눈물... 그런 거 하면서 부둥켜안고... 우선 보고서에 쓸 말이 얼마나 차고 넘칠 것이며 안 보일 때... 그러니까 우리끼리는 킥킥, 지랄하고 자빠졌네. 야릇한 눈꼬리로 어머, 왜 이러세요. 누가 당신 무시했다고 그래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그러고 장사 한두 번 하나 뒤에서 킥킥, 우리끼리는... 말하자면 그런 정상적인 사회생활... 사회적 유희를 보다 심도 있게 체득한 후 이제 저는 새 백인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새 삶을 살겠습니다. 내 가죽 돌리도~ 하는 곳이면 대충 되는 거 아닌가, 이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놈들

뭘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내가 믿었던 신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의 형상을 따서 인간을 만들었니 어쨌니 그 소리는 기억이 난다. 지금의 내 입장을 말하자면 이보다 개소리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을 몰라도 이토록 모르는 사람이 무슨 인간을 만들었다고 생색을 내냐 이 말이다. 꽤엑~ 우당탕 쾅쾅... 중국 광둥어로 비명을 지르며 또 한 무리의 죽은 자들이 이곳으로 굴러 떨어진다. 이제는 몰라, 존이 말했듯 다른 할 일도 없고 해서... 나는 본부에서 조달된 글러브를 챙겨 들고 일어선다. 옜다, 소금 받아라~ 너 깜상, 너도 깜상, 너도 깜상... 이제는 몰라, 대충 소금을 처발라 주고 나는 낄낄 우월감을 만끽한다. 이런 사후세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몰라도

못난 놈
이 지저분한 새끼
밟아주는 재미는 여전히 쏠쏠하다.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추리는 저 높은 곳... 이다. 형광등 너머 어둠 속에서 그래, 누군가가 우리를 굽어 살피듯... 실은 몰래 관찰하고 있을 거란 ‘내 생각’이다. 그렇다면 또 행동거지가 달라야겠지. 힌트야 얼마든지 있는 것 아닌가. 예컨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그거야말로 우리 백인들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보고 계십니까? 킥킥, 이거 왜 이러실까. 다~ 안다구요~ 하지만 그런다고

누가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는 게 문제다, 이 말이다. 그러니 이리 조지고 저리 조지고... 깜상들을 조져 봐야 하나마나 보나마나... 보나마나한 로쿠롯의 천장을 오랜만에 올려다본다. 어지간하면 등 좀 갈지... 좌측에서 세 번째, 17번째 저 등 말이다. 아이쿠, 눈이야.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깜짝 놀라 하마터면 글러브를 놓칠 뻔했는데... 사위가 한 번 번쩍하더니 온통 깜깜한 암흑이 되고만 것이었다. 존~ 하고 나는 우선 존을 찾았다. 다행히 근처에서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황하지 말게나, 아무래도 이것이 그... 정전(停電)이란 것인가 보네.

정전이요?
나도 들어서 아는 현상이라네, 다른 기억자들로부터 말일세.
이런 일이 또 있었습니까? 내가 묻자
자신도 처음 겪는다는

인도자의 답변이 돌아왔다. 방만한 새끼들... 다시금 열이 딱, 받으며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게 다 뭐겠는가. 탁상행정에 방만한 운영... 게다가 전기세 체납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 것이다. 전기세도 못내는 주제에... 그런데 그 순간 퍼더덕, 퍼덕 하는 날개 소리가 어둠 속에 가득하였다. 존~ 하고 다시금 인도자를 외쳐 부르지만 더는, 토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눈을 뜨니 사위가 온통 ‘빛’으로 가득하였다.
이곳은 어디인가. 주위를 둘러보니 그저 빛 속에 토끼 존과 내가 누워있었다. 잠시 후 의식이 돌아온 존도 이런 곳이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죽은 것도 아닐 텐데 이게 뭔 일이래? 다행히 남아있는 백인의 표식을 확인하고 얼렐레 울렐레 우리는 대책을 논의했다. 존은 이 상황에서도 십자성단이 무사할까? 제국 걱정에 여념이 없었다. 정전을 기회 삼아 껌둥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어쩌지? 그러고 보니 글러브를 두고 왔습니다, 연결된 낭(囊)에는 소금이 한 말일 텐데... 나도 걱정을 토로하였다. 그때 빛 속에서 퍼더덕, 퍼덕 하는 날개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천사들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다시 보는 근육돼지들은... 그새 한 겹은 더, 근육을 붙인 듯한 몸집이었고 터질 듯한 다리에 빨간색 망사 스타킹과 거들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날개... 날개를 달고 있었다.

나갈 때가 되었다고

광둥어로 천사들이 말했다. 예? 어디로요? 역시나 광둥어로 물었는데 답변은 해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알던 천사들과는 끕이 다른 놈들인 듯했다. 그러니 날개도 있고... 푸~화~ 말소리에 숨소리가 섞이는 방독면은 그대론데 목소리가 아주 오페라고 소프라노였다. 둘 다 똑바로 서~ 합창을 하더니 페인트붓으로 쓱쓱, 말하자면 용해제 같은 것을 바르기 시작했다. 녹아서 떨어지는 니스칠 피막을 보니 그래, 그간 정이 들기도 했구나... 마음이 씁쓸하였다. 기다려, 알겠지? 그렇게 우리를 홀랑 벗겨놓고 다시 푸드득, 빛 밖으로 사라졌는데 기다리라고 하니 기다려야지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자 세탁소에서 옷이라도 찾아오듯 두 벌의 가죽을 든 천사가 빛 속으로 들어왔다. 정말이지 세탁소 커버가 씌워진 우리들의 피부였다. 손세탁 금지, 물세탁 금지, 염소세제 금지, 다림질 금지, 온리 드라이크리닝... 취급주의, 냉장 보관요... 잡다하게 붙어있는 라벨을 뒤져 보관일자와 넘버를 확인하고... 또 어떤, 그들만의 절차를 마친 후 확인에 확인... 책임자 서명란에 사인을 끝낸 후에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내 껍데기
가죽
피부를
돌려받았다. 꺼내서 입으라고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말했다. 스스로가 힘들면 도와준다고도 했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쥐었지만... 선뜻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와 달리, 존은 부리나케 커버를 벗기기 시작했다. 지퍼를 열자 드라이크리닝 냄새가 확, 풍겼고 시간이...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획, 돌린 토끼 존과 눈을 마주쳤는데...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이었다. 그리고 놀라 주위를 살피는 눈이었다. 어쩔 줄 모르기는 나도 마찬가진데 뭐야, 그거... 뭐냐구?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너 깜상이었어?

야, 이 씨발름아~

존의 손에 들린 시커먼 피부를 보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침을, 소금 같은 침을 튀겨가며 존을 향해 돌진했다. 물론 천사가 싸움을 허락할 리 없었다. 천사들이 나를 뚜까패는 와중에도 이거 제 거 아닌데요? 존은 개소릴 늘어놓았다. 저 족속이 원래 저런 족속이다. 확인에 확인을 거친 절차를 눈으로 보고서도 말이다. 옷이나 빨리 입어.
근육돼지들이 다그치자 퍽이나 잽싸게 존은 자신의 가죽을 당겨 입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딱 맞는, 검은색 정장이었다. 너도 빨리 입으라고 천사가 말했다. 이상하게 흑흑, 눈물이 나왔는데 아무리 노려봐도 존은 이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눈물을 씹으며 나는 커버를 열었다.

잠깐만요.
이거는 진짜 내 꺼 아닌데요?

이거는... 동양인인가 뭔가 하는, 그 피부잖아요. 볼멘소리로 나는 항의를 했다. 그런 건 모르겠고 우리는 규정대로 일을 할 뿐이라며 확인에 확인에 확인을 거친 서류를 놈들이 내밀었다. 존도 무어라 내게 소리쳤는데 같은 광둥어고 나발이고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돌겠네.
빨리 입기나 하라고 천사가 역정을 냈다.

텅 빈 머리로 나는
여전히 가죽을 손에 쥔 채 멍하니 서있었다.
어느 세탁소에 맡겼는지 손질이 잘 된 피부였고
어쩌면 그래

엄마가 처음으로
내게 사준 옷이었다.

뭐 그랬나 싶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광둥어가
입에 착착 붙기도 했고


1) 이는 2012년 2월 미국 플로리다에서 발생한 조지 짐머만 사건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당시 자경단원이던 히스페닉계 백인 짐머만이 순찰 도중 ‘후드티를 입은 흑인’이란 이유로 17세의 트레이본 마틴과 시비 끝에 그를 사살한 사건인데 백인으로만 구성된 배심원단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인종 갈등의 후폭풍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다.

2) 글쎄, 동명이인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19세기 초반 아프리카 콩고에 식민지를 건설했던 벨기에의 국왕이다. 콩고에서 생산되는 고무가 큰 이윤을 가져다주자 식민지 콩고의 원주민들에게 작업 할당량을 부과, 이를 채우지 못할 경우 손목을 자르는 형벌을 가했던 인간이다. 4세~ 15세 사이의 어린이들까지 노동에 동원되었고 역시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손목을 잘려야 했다.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나중엔 연좌제를 도입, 할당량을 못 채울 시 가족과 마을 사람들까지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1천만~3천만 사이로 추정되는 콩고인들이 이 시기에 학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3) 역시나 동명이인일지 모르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인, 학자, 언론인이었으며 1958년 총리직에 오르면서 악명 높은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하고 철저히 고수했던 인물이다. 1966년 의회 회의실에서 모잠비크계 이민자이자 혼혈인 차펜다스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철저한 인종분리자이자 인종차별자였던 그의 전공은 놀랍게도 ‘사회복지학’이었다.

4) 1607년 개척되어 미대륙 최초로 대의제 정부(1619년)가 세워졌던 미국 이민사의 주요 거점이자 초기 정착지.
또한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들어온 관문이기도 하다. 제임스 타운은 1608년, 1676년, 1698년 각기 세 차례의 화재로 전소, 복구를 반복했고 이후 주정부 소재지가 윌리엄즈버그로 옮겨지며 쇠퇴한 지역이다.

5) 십자성단의 단원들이 지어붙인 로쿠롯의 지명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