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좋은 언어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랑과 어긋난 길들

페미니즘은 여성이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확장시켜

「B사감과러브레터」 이어쓰기 ①사랑의 진실 ②B사감과 자매들 ③B사감과 운명의 화살 ④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 2 ⑤신여성 ⑥눈물

‘왜’와 ‘만약’을 허용하는 역사학적 상상력

코로나 시대의 역설

김소월 혹은 흰 달의 노래를 찾아서

일제강점기 장안을 사로잡은 유행가, 트로트

눈 오는 밤, 식민지 북국의 한 로맨티스트

‘디귿’ 없는 글쓰기

밀란 쿤데라, 두 번의 추방

앵앵시사(櫻櫻詩社) 문우들

민족혼의 숙소 현저동 101번지

쓸쓸하고 초라했던 만년의 자화상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고생은 참을 수 있지만 치욕은 참을 수 없었던 시인 부재(不在) 하는 방랑자 '예술의 목적은 인생’이라던 고독한 ‘원형적비평가’ 멋, 술 그리고 病

①나 세상 떠날 때,그가 울까봐 걱정이다 ②한 달 동안,감정적

엄마가 사준 옷

아빠를 중고로 팔아버렸어

①숭어 이야기 ②바보의 웃음 ③통증이 오는 시간

공포의 대상 혹은 욕망의 주체

팬데믹 시대, 인간의 존엄을 향한 작가들의 질문

부자를 만들어주는 요술책들

1980년대 영국 사회에 대한 세밀하고도 방대한 증언

되풀이 속에서 되풀이되는

또 다른 벽, 타문화와 역사에 대한 선이해

신석정 시인의 영역 시선집을 내며

대산세계문학총서,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2020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

단편소설

엄마가 사준 옷

박민규 소설가, 1968년생
장편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지구 영웅전설』 『누런 강 배 한 척』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소설집 『카스테라』 『더블』 등

엄마가 사준 옷


천사들이 얼마나 근육질인지
당신이 알까 모르겠다.

비단 천사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사후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근육인데
미스터 올림피아드 정도의 근육 없이는
누구도 감히
명함을 못내미는 곳이 이곳이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당신도 궁금했을 것이다.

내가 싹 다 말해주겠다.

지금부터, 낱낱이.

내 얘기가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장담은 못하겠다. 사람마다 경우가 다를지 몰라 하는 말이다. 그래도 경험자의 얘기니 또 모르지, 알아서 그닥 손해 볼 일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선 일러둘 말이 있다. 지옥이니 천국이니 그딴 건 없다는 사실이다. 그걸 몰라 뜯긴 돈이 얼마였나를 생각한다면 살아 행하는 대부분 일들이 얼마나 등신짓인지도 알 수 있겠지. 그래서 죽으면 어디로 가냐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싹 다 말해준다고. 내 경우엔

로쿠롯

이란 곳으로 왔는데 정확한 스펠링은 아무도 모른다. 귀에 들어온 소리를 그대로 옮긴 것이니 그 점에 있어서는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어쨌거나 나는 죽었고(기억은 사라졌으나) 로쿠롯에서 깨어났다. 천국이나 지옥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심지어 일종의 주식회사라는 소문도 돌았으나 설령 주식이며 그런 게 있다 해도 나와는 거리가 까마득 먼 일이다. 내게 있어 로쿠롯은 수용소나 교도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느낌의 시설이다. 그렇다고 철창이 있거나 호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커다란 건물 내부에 구조물과 벽이 있고... 그 안에 모여, 혹은 흩어져 저마다(알아서)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축사(畜舍)와 비슷한 느낌인데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이곳을 ‘농장’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때문에 저마다의 영역이 있고 무리가 생기면 무리의 구역이 정해진다(물론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마치 동물 같다 여길지 모르겠지만
차라리 동물이면 좋겠다는 게 내 솔직한 생각이다. 생각을 해야 한다는 고통... 이 길고 끝없는 시간을 생각 없이 살 수 없는 이 고통이 로쿠롯의 유일한 ‘형벌’이기 때문이다. 불구덩이에 떨어진 것도 아니요 지옥의 사자가 등 뒤에서 채찍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그저 하릴없이 로쿠롯에 ‘있는’ 상황인 것이다. 나갈 수도, 신호를 보낼 수도 없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출입구나 창(窓)을 찾을 수 없으므로 이곳의 위치를 가늠할 길조차 없는 것이다. 외부에서 본다면 어쩌면 커다란, 폐쇄된 공장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땅속 깊은 어딘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어쩌면 바다 밑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이곳이 내가 도착한 사후세계다.
놀랍게도 이곳에 전기가 있다. 높디높은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유일한 조명이자 빛인데 그것이 또, 유일한 전기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손닿는 곳에 콘센트가 있거나 다른 가전(家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놀라우리만치 벽과 바닥이 전부인 이유는 그 무엇도 실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먹지 않아도 되니 식당이 필요치 않고 배설도 잠도 없으니 화장실, 침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기억이 삭제된 상태라 되새길 추억조차 없는 곳이 로쿠롯이다. 하물며 지시사항도, 통제도 없다. 어지간한 수준의 국가에서 그 혜택을 입고 사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통제가 없다니, 그건 곤란하잖아.

내 말이 그 말이다. 사후세계의 품위를 생각해도 이점은 여전히 불만으로 남아있는데(내게 있어) 개선의 여지는 1도 없다. 그러니 격이라든가 질서 자체가 없는 셈이다. 고인은 좋은 곳으로 가셨습니다. 두 손을 꼭 모으고 흐느끼며 떠올리는 막연한 장소... 그런 기대는 일찌감치 접는 것이 모두의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다만 첨언을 하자면(이건 내 생각인데), 통제를 하지 않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는 하다. 이곳에선 더 이상의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싸움이 난다거나, 설령 내가 누구를 목 조른다 해도 그러니 통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무도 더는 죽지 않고 누구도 더는 죽지 않으니 무슨 일이 난다 해도 보나마나 하나마나... 아무것도 변할 게 없다는 얘기 되겠다. 돼지처럼 꿀꿀거리진 않아도, 그래서 바글바글
모여있는 이곳을 농장이라 부른다. 그리고 ‘룸’이 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죽은 자들은 전부 룸에서 깨어나 농장으로 이감된다. 물론 룸도 우리가 붙인 명칭인데 쉽게 로쿠롯의 본관 사무실,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나 역시 그곳에서 눈을 떴다. 차가운 수술대 같은 곳에 누워 있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죽었다는 사실만큼은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부르르 몸을 떨며 지옥이니 천국 같은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팔다리는 미동도 하지 않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안정기 수명이 다했는지) 파르르 점멸하는 형광등을 바라보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다. 혹시 살아생전의 병원 수술실이 아닐까도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그런 느낌의 공간은 아니었다. 하기야 천국에 무슨 돈이 있겠는가. 세금을 걷을 리 없으니 이 정도 낙후된 시설이며 불편은 견디는 게 도리란 생각도 들었다. 곧 천사들의 안내가 있겠지, 했더니 과연 우루루 몰려오는 발자국 소릴 들을 수 있었다. 날개 소리가 아닌 발자국 소리였다. 천사들은 날개가 없었고... 만약 어깨를 부딪힌다면 내 몸이 박살날 것 같은 우락부락 근육돼지들이었다. 하나같이 멜빵이 붙은 작업복 바지에 장화를 신었는데 다들 웃통을 벗고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점멸하는 형광등을 배경으로, 그래서 여러 개의 방독면들이 빤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두려움을 느낄 새도 없이 곧바로 작업이 시작되었다. 속전속결이었다. 이, 작업이라 함은
내 머리 꼭대기를 메스로 절개한 후 통째로 피부를... 그러니 나라는 사람의 껍데기를... 잡아당겨 벗기는 것이었다. 특별한 기구를 쓴다거나 기본적인 마취도 하지 않았다. 지났으니 하는 말인데 죽은 사슴의 가죽을 벗기는 공정도 차마 이 정도의 주먹구구는 아닐 것이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목소리가 나오지도 않았지만). 차라리 죽여 달라 생각이 전부였지만 나는 이미 죽음이라는 카드를 써버린 직후였다. 천사들은 닥터나 간호사보다는... 푸줏간의 수제소세지 장인이나 고속도로 공사 현장의 인부들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쫙~ 쫙 숙련된 팀워크로... 따로 신호 없이도 그래 거긴 하나, 둘, 셋 하는 느낌으로 부욱~ 내 가죽을 통으로 벗겼다. 무지막지 근육돼지들은 말해 무엇하며 메스로 톡, 톡... 그러니 당겨진 가죽과 생살의 경계... 미처 끊기지 않은 부분을 자르는 천사가 있었는데 그놈이 제일 미웠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열 개의 발가락들이 바들바들 가죽과 작별을 하고 나자 놈들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정신 차리라는 듯 내 좌우 잇몸(뺨)을 번갈아 치고는 한 천사가 말했다.

움봐쀍화~

놈들이 쓰는 언어를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목소리에도 이두근 활배근 돌 같은 근육이 잡힌 느낌이어서 덜덜덜, 나는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곧바로 놈들은 가죽을 벗긴 내 몸에다 니스칠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니스인지 뭔지 알 길은 없지만 페인트 붓으로 슥슥 칠한 투명한 도료란 것만은 확실하다(차후에야 이것이 피부의 역할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쇼크로 나는 기절 같은 걸 했다 깨어났는데 눈앞엔 여전히 천사가 서있었다. 움봐쀍화뿕콰슯부~ 트랜지스터 라디오 같은 기계를 손에 쥐고 놈은 쉴 새 없이 지껄였는데 처음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가... 마치 주파수가 맞아가듯 차츰차츰 말귀가 트이기 시작했다. 너는 죽어 여기로 왔고, 이곳은 로쿠롯이라고 했다. 알겠지? 놈이 물었다. 마치 수압 높은 수도를 틀기라도 한 듯 쏴아~ 빠르게 말하고는 다시 확, 꼭지를 잠그듯 알겠지? 묻는 게 놈의 말버릇인데... 대답이 늦으면 바로 좌우 잇몸에서 번갈아 불꽃이 튀었다. 너의 기억은 모두 삭제되었고 알다시피 이곳을 나가는 그날까지 ‘피부’는 우리가 보관한다. 알겠지? 이 순간부터는 너도 언어를 쓸 수 있고 또 여기선 모두가 동일한 언어를 쓸 것이다. 로쿠롯에 할당된 채널은 152번, 따라서 앞으로 너희들이 쓰게 될 말은 체코어이다. 알겠지?

알다마다요.

목소리가 나왔는데 절로 체코어였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체코어고 나발이고 말귀가 열리고 말이 통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지덕지였다. 따라와, 알겠지? 묻고픈 말이 한가득인데도 다짜고짜 놈을 따라 어둑한 복도를 걸어야 했다. 그리 긴 복도가 아닌데도 걷는 일이 고역이었다. 가죽이 홀라당 날아간 육신은 비틀대기 일쑤였고 이것이 과연 내 몸인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천사의 뒤를 따르던 그 순간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자각하고 있었다. 놈의 설명과는 달리, 내 기억의 전부가 삭제되지 않았다는 사실... 삭제를 한다고는 했는데, 아마도 부욱~ 북 내 껍데기를 벗길 때처럼 거칠게 일을 했음을... 따라서 듬성듬성 기억의 밑동과 뿌리들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요행인지 불행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빌어먹을, 천사놈들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때문에 나는 ‘체코’가 - 가본 적은 없겠으나 ­ 지도 어딘가에 박힌 나라 이름임을 알 수 있었고, 어쩌면 로쿠롯이 체코에 있거나 그 지하... 내지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체코 당국에 전기세를 납부하는 시설이 아닐까, 추리를 하기도 했는데 그야말로 부질없는 짓이었다. 최근 로쿠롯에선 소위 ‘채널 정비’가 있었는데, 때문에 그날 이후로 다들 중국 광둥어를 쓰게 된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형광등 너머 암흑의 천장에서 울려퍼지던 안내 방송... 귀와 머릿속을 헤집는 굉음과 몇 초간 지속되는 고막의 압력... 그리고 곧바로 농장의 모두가 정든 체코말을 버리고 중국 광둥어로 대화를 하게 된 것이었다. 어쩌면 밀린 전기세 때문에 사업장을 중국으로 옮긴 건지도 모르지만... 이런 건 하나 중요치 않다. 정말 중요한 건 내가 체코를, 또 중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을 여전히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기억이 남아있다는 것... 어쩌면 로쿠롯에서 이는 단단한 근육을 가지는 것보다 중요한 일일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놈을 따라 들어선 곳은 보다 커다란 또 다른 룸이었는데, 거기엔 수십 명
니스칠을 마친, 역시나 가죽이 홀라당 벗겨진 죽은 자들이 모여 있었다. 마치 대형 병원의 휴게실 같은 그 장소에서 우리는 꽤나 긴 영상을 봐야 했는데 근육돼지... 아니, 천사의 수압 높은 수돗물 콸콸 설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이것은 로쿠롯에서 허용하는 유일한 너희들의 생전 ‘기억’이다. 둘째, 너희는 모두 이 사건과 관련된 사망자들이다. 셋째, 너희는 이 영상을 공동의 기억으로 간직해야 하는데 누가 누구인지 신원을 알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알겠지?

돌출된 안구.
시뻘건 근육과 생살...
군데군데 뼈가 보이는
처참한 육신으로

때문에 모두가 열중해서 영상을 시청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니 나를 포함, 여기 모인 전부가 ‘미국인이라는’ 방증인데... 한 백인 남자가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흑인 소년과 시비가 붙는다. 경찰로 보이지만 실은 경찰이 아닌 그 남자가 느닷없이 총을 꺼내 소년을 사살한다). 그는 흑인들의 조직적 범죄에 맞서는 자경단원인데 죽은 소년은 열여섯의 평범한 학생이었다(심지어 우등생이었다). 남자는 끝까지 자신의 행동이 정당방위였음을 주장하지만 흑인사회가 주축이 된 여론은 이를 결코 믿지 않는다. 이어지는 흑인들의 시위에도 재판부(백인으로 구성된)가 끝내 그를 무죄 석방하자 폭동이 일어난다. 흑인들의 습격으로 지역 백인 자경단원들 다수가 사망한다. 그리고 자경단의 보복으로 또 다수의 흑인들이 사망한다. 걷잡을 수 없게 된 폭동과 경찰의 진압... 총격과 시가전으로 숱한 사망자들이 발생한다. 영상 마지막에는 사망자 전원의 명단과 사진이 차례차례 공개되었다. 그러니 가죽을 홀라당 하고 여지껏 영상을 지켜본 모두의 명단이었다. 젠장할! 누군가 체코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영어인지 체코어인지 실은 분간도 가지 않았다. 보복과 혐오로 서로를 죽인 미국인들이 체코어로 열불을 토해내며 한동안 소란이 일었는데... 그제서야 천사놈들의

또 로쿠롯의, 꿍꿍이를 알 수 있었다. 이제 누구도 스스로를 기억하지 못하고, 더는 누구도 상대가 흑인지 백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는 알게 되었고... 하물며 여기 있는 모두가 5102구역으로 공동 이감된다고 했다. 알겠지? 근육돼지의 목소리는 야멸찼다. 그리고 마치 돼지를 몰고 가듯 천사들은 우리를 구보로 이동시켰다. 허나아 두울 서이 너이 핫둘서이너이 핫둘셋넷! 잘도 구령을 붙여가며 근육돼지들이 왼발, 왼발~ 발을 구르자 얼떨결에 모두가 비틀대며 뛰어야 했다. 이른바 ‘농장’은 가죽을 홀라당한 우리가 뛰어가기엔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먼 곳이었다. 당연히 끔찍한 육신의 고통이 따랐지만 나의 정신적 괴로움과 비탄, 분노는 이를 훨씬 상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나에겐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천국도 막나가는 곳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왼발, 왼발~ 달리는 동안 스물스물 기억의 실뿌리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나는 순수 혈통의 백인이고... 자경단원이었다. 이름이나 신원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으나 펍(Pub)에서 나누던 우리끼리의 대화... 테이블의 분위기와 주변 공기의 느낌을 되새길 수 있었다. 나의 분노... 우리들의 혐오... 어쩌면 나는 소년을 사살한 당사자... 사건의 주인공인지도 몰랐다. 혼란과 원망이 밀려들었다. 무엇보다 ‘믿었던’ 사후세계가 이 같은 탁상행정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이렇게 가죽을 홀랑 까서 한곳에 섞어두면 뭐,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할 줄 알았나? 하도 어이가 없어 껍데기를 잃은 불알이 마하파이브(요요 기술의 한 가지)를 타는 요요처럼 출렁거렸다. 당장 이곳의 책임자를 만나 생각을 고쳐주고 싶었지만 왼발, 왼발~ 눈앞의 근육돼지가 일단 너무 무서웠다.
농장에는 문이 없었다. 높다란 절벽 같은 곳에서 그냥 우리를 밀어 떨어뜨리는 것이 입장(入場)이었다. 아무도 죽지 않으니 위험하다고 할 순 없지만...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피치 못할 이유로 탁상행정을 할 수밖에 없다면... 하다못해 잘 지내라,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노력해라... 이 같은 싸구려 덕담, 입에 발린 소리라도 늘어놓는 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젠장할, 경험이 부족해 이러나 했더니 우리만 여기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주 잠깐 절벽 위에서 농장을 내려다 본 그 순간... 얼마나 많은 죽은 자들이 이미 이곳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건 뭐, 돼지가 따로 없었다. 꽤엑~ 체코어로 비명을 지르며 구르고 구르고 구르고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쿠션이 1도 없는 쎄맨 공구리였다. 심지어 천사들은

 

그리고 그 후,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로쿠롯에서의 진짜 생활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절벽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나는 긴 시간 의식을 잃었는데 불행 중 다행을 말하라면 기억... 그 여파로 더 많은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꿈을 꾸었다. 의식을 잃었기에 꿈꾸는 게 가능했고... 살아생전의 꿈, 소중한 유년기의 기억이었다. 엄마와 함께였다. 내 작은 고사리 손을 엄마가 꼭 쥐고 있었고... 함께 걷는 길 위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도 어릴 때 살던 동네가 분명했다. 시장 골목이었다. 코너를 낀 상가 벽을 따라 작은 화단이 보였는데
미키마우스 같고 스누피 같은 꽃들이 바람과 햇살, 나비와 어울려 장난을 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슬로우로 보이는 꿈이었다. 그래서 온갖 빛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듯 위태로이 움직이는 꿈이었다. 내 한 손엔 커다란 사탕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작은 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작은 별(Twinkle, twinkle, little star) 동요를 배운 직후라 그랬을 것이다. 반짝반짝 작은 별을 쭙쭙, 소리 내어 빠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체코어가 아니라 알아듣진 못했으나 대신 반짝반짝... 나를 비추는 별 같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숱 많은 금발을 동여맨 엄마의 머리띠도 눈에 익은 것이었다. 늘어나고 줄어드는 탄성이 신기해 늘 내 손을 떠나지 않던 장난감의 하나였다. 그리고 낯이 익은 동네 사람들... 이름을 모를 리 없으나 누구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 얼굴들이 차례차례 인사를 건네왔다. 그들이 끌고 나온 개와도 엄마는 인사를 나누었다. 큰 개는 무섭지만 작은 개는 귀엽다고 엄마가 말했는데 어떤 강아지보다 귀여운 건 사실 ‘너’라는 말을 내 귀에 속삭였다. 나는 킥킥 웃음이 터져 나왔고, 내 간지런 귀들이 부풀고 부풀어 미키마우스의 귀보다도 커진 기분이었다. 미키는요? 귀엽지. 스누피는요? 스누피도 귀엽지. 그런데 엄마, 저 사람은 죽었나요? 저건 사람이 아니란다, 마네킹이라는 인형이지. 처음으로 마네킹을 본 날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처음으로 내 옷을 사준 날이었다. 그날의 하늘처럼 옅고 푸른, 하늘색 셔츠였다.

눈을 뜨니 로쿠롯이었다.
마치 아폴로 11을 타고 달, 같은 곳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바람도 중력도 없다는 달의 표면에
엄마가 사준 옷을 깃발로 꽂아놓고 말이다.

셔츠를 입지 않아서인지 로쿠롯이 새삼 춥게만 느껴졌다. 어슬렁 주위를 걷고 있는 인체 해부학 표본 같은 것들이... 굳이 자각을 하지 않아도 이곳이 사후세계 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돈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마찬가지, 흉측한 내 몰골을 파악하며 나는 한동안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적응을 위해 애쓰면 애쓸수록 공포가 밀려들었다. 더 이상의 죽음도 없다면서 뭔 놈의 공포냐고? 그건 당신이 살 만한 세상...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키가 미키고 스누피가 스누피인 세상에 있어 그런 것이다. 진짜 공포가 뭔지 말해줄까? 미키가 미키인지 알 수 없고 스누피가 스누핀지 알 수 없는 세상... 피부색 구분 없이 다 같은 몰골의 인간들이 모여 있는 세상이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여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1) 이는 2012년 2월 미국 플로리다에서 발생한 조지 짐머만 사건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당시 자경단원이던 히스페닉계 백인 짐머만이 순찰 도중 ‘후드티를 입은 흑인’이란 이유로 17세의 트레이본 마틴과 시비 끝에 그를 사살한 사건인데 백인으로만 구성된 배심원단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인종 갈등의 후폭풍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다.

2) 글쎄, 동명이인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19세기 초반 아프리카 콩고에 식민지를 건설했던 벨기에의 국왕이다. 콩고에서 생산되는 고무가 큰 이윤을 가져다주자 식민지 콩고의 원주민들에게 작업 할당량을 부과, 이를 채우지 못할 경우 손목을 자르는 형벌을 가했던 인간이다. 4세~ 15세 사이의 어린이들까지 노동에 동원되었고 역시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손목을 잘려야 했다.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나중엔 연좌제를 도입, 할당량을 못 채울 시 가족과 마을 사람들까지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1천만~3천만 사이로 추정되는 콩고인들이 이 시기에 학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3) 역시나 동명이인일지 모르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인, 학자, 언론인이었으며 1958년 총리직에 오르면서 악명 높은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하고 철저히 고수했던 인물이다. 1966년 의회 회의실에서 모잠비크계 이민자이자 혼혈인 차펜다스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철저한 인종분리자이자 인종차별자였던 그의 전공은 놀랍게도 ‘사회복지학’이었다.

4) 1607년 개척되어 미대륙 최초로 대의제 정부(1619년)가 세워졌던 미국 이민사의 주요 거점이자 초기 정착지.
또한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들어온 관문이기도 하다. 제임스 타운은 1608년, 1676년, 1698년 각기 세 차례의 화재로 전소, 복구를 반복했고 이후 주정부 소재지가 윌리엄즈버그로 옮겨지며 쇠퇴한 지역이다.

5) 십자성단의 단원들이 지어붙인 로쿠롯의 지명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