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좋은 언어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랑과 어긋난 길들

페미니즘은 여성이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확장시켜

「B사감과러브레터」 이어쓰기 ①사랑의 진실 ②B사감과 자매들 ③B사감과 운명의 화살 ④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 2 ⑤신여성 ⑥눈물

‘왜’와 ‘만약’을 허용하는 역사학적 상상력

코로나 시대의 역설

김소월 혹은 흰 달의 노래를 찾아서

일제강점기 장안을 사로잡은 유행가, 트로트

눈 오는 밤, 식민지 북국의 한 로맨티스트

‘디귿’ 없는 글쓰기

밀란 쿤데라, 두 번의 추방

앵앵시사(櫻櫻詩社) 문우들

민족혼의 숙소 현저동 101번지

쓸쓸하고 초라했던 만년의 자화상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고생은 참을 수 있지만 치욕은 참을 수 없었던 시인 부재(不在) 하는 방랑자 '예술의 목적은 인생’이라던 고독한 ‘원형적비평가’ 멋, 술 그리고 病

①나 세상 떠날 때,그가 울까봐 걱정이다 ②한 달 동안,감정적

엄마가 사준 옷

아빠를 중고로 팔아버렸어

①숭어 이야기 ②바보의 웃음 ③통증이 오는 시간

공포의 대상 혹은 욕망의 주체

팬데믹 시대, 인간의 존엄을 향한 작가들의 질문

부자를 만들어주는 요술책들

1980년대 영국 사회에 대한 세밀하고도 방대한 증언

되풀이 속에서 되풀이되는

또 다른 벽, 타문화와 역사에 대한 선이해

신석정 시인의 영역 시선집을 내며

대산세계문학총서,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2020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

글밭단상

②바보의 웃음

정홍수
평론가, 1963년생
평론집 『소설의 고독』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 산문집 『마음을 건다』 등

글밭단상②

바보의 웃음

최근 카프카의 「변신」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라는 첫 문장은 너무도 유명해서, 그 강렬함으로는 『안나 카레니나』의 서두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와 거의 쌍벽을 이루는 듯하다. 그거야 어쨌든, 그레고르가 날벼락처럼 딱딱한 등껍질을 가진 자신을 발견했을 때 사실 「변신」의 이야기는 이미 ‘죽음’이라는 이야기의 끝을 준비해놓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레고르만이 이를 모르는데, 처음에는 혼란과 당혹감이, 그리고 나중에는 점차 곤충의 몸에 익숙해져가는 그의 의식이 상황의 정확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 아니, 늘 자신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그레고르의 선한 마음 때문이라는 게 더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죽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존재인 것이다. 가족들의 경우는 일종의 ‘자기기만’에 빠져 예정된 비극의 수순을 짐짓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여기에는 과학적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의 카프카의 정밀하고 냉연한 언어가 기여한 바가 크다. 덕분에 폐기와 망각으로 예정된 그레고르의 절박한 운명이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말하자면, 「변신」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죽음’을 연기(延期)하고 있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 점을 의식하면 할수록 독자는 깊은 연민 속에 그레고르의 운명을 따라가게 되고, 결말에 이르러 말 그대로 벌레 한 마리를 치워버리는 듯한 무심한 가족 비극의 완성에 전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착하디착한 그레고르 잠자는 정말 그렇게 망각될 수 있는 것일까. 모든 근사한 이야기가 그런 것처럼 우리는 이들 가족의 뒷이야기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봄날의 소풍을 떠나며 ‘새로운 꿈과 계획’에 부풀어 있던 남은 가족의 바람과는 달리 말이다. 그런데 혹 카프카가 써놓은 또 다른 짧은 소설 「가장의 근심」이 그 후일담은 아닐까. 그 이야기에 나오는 ‘납작한 별 모양의 실패’(실패 한가운데에서 작은 막대가 두 개 튀어나와 서 있을 수도 있고, 가끔은 묻는 말에 대답도 하고, 웃기도 한다), ‘오드라덱’이라는 알 수 없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상한 사물은 대개는 나무토막처럼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는 존재 같다. 그래서 가장은 근심한다. “그는 명백히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죽은 후까지도 그가 살아 있으리라는 상상이 나에게는 거의 고통스러운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오드라덱이 종종 나타나는 장소가 ‘다락방’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오드라덱의 흉하게 일그러진 모습이 “사물들이 망각된 상태 속에서 갖게 되는 형태”일 거라고 말한 바 있다(「프란츠 카프카」,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옮김). 그렇다면 “폐가 없는 듯이 웃는” 오드라덱은 곤충이 되어 폐기되고 망각의 저편으로 던져진 그레고르 잠자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너무 착해서 죽을 수도 없는 존재가 아닌가. 이야기는 또 이렇게 이어지는 것일까.
벤야민은 「카프카론」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한 편을 소개한다. 어느 시골 주막, 안식일 저녁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는데, 한쪽 구석의 걸인 같은 뜨내기손님 한 사람을 빼면 모두 마을 주민들이다. 돌아가면서 각자의 소원을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마지막에 걸인에게 차례가 왔다. 그는 왕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적국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바람에 내의 차림으로 왕궁을 나와 산을 넘고 숲과 언덕을 넘으면서 밤낮으로 쫓긴 끝에, 지금 여기 주막의 구석 자리에 안전하게 도착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서 묻는다. 당신이 그 소원의 이야기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내의 한 벌이요.”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남루한 내의 한 벌을 가리킨 것인데, 그렇다면 그의 소망은 이미 실현되어 있는 셈이 아닌가. 나는 이보다 더 선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벤야민은 카프카에게는 다음 두 가지가 분명했다고 쓴다. 도와주기 위해서는 누군가 한 사람은 바보가 되어야 하며, 어떤 바보의 도움만이 진정한 도움이라는 것. 그레고르 잠자도, 벤야민 이야기 속의 걸인도 바로 그 바보의 형상인 것만 같다. 오드라덱으로 변신해서 우리를 향해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소리로 웃고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