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좋은 언어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랑과 어긋난 길들

페미니즘은 여성이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확장시켜

「B사감과러브레터」 이어쓰기 ①사랑의 진실 ②B사감과 자매들 ③B사감과 운명의 화살 ④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 2 ⑤신여성 ⑥눈물

‘왜’와 ‘만약’을 허용하는 역사학적 상상력

코로나 시대의 역설

김소월 혹은 흰 달의 노래를 찾아서

일제강점기 장안을 사로잡은 유행가, 트로트

눈 오는 밤, 식민지 북국의 한 로맨티스트

‘디귿’ 없는 글쓰기

밀란 쿤데라, 두 번의 추방

앵앵시사(櫻櫻詩社) 문우들

민족혼의 숙소 현저동 101번지

쓸쓸하고 초라했던 만년의 자화상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고생은 참을 수 있지만 치욕은 참을 수 없었던 시인 부재(不在) 하는 방랑자 '예술의 목적은 인생’이라던 고독한 ‘원형적비평가’ 멋, 술 그리고 病

①나 세상 떠날 때,그가 울까봐 걱정이다 ②한 달 동안,감정적

엄마가 사준 옷

아빠를 중고로 팔아버렸어

①숭어 이야기 ②바보의 웃음 ③통증이 오는 시간

공포의 대상 혹은 욕망의 주체

팬데믹 시대, 인간의 존엄을 향한 작가들의 질문

부자를 만들어주는 요술책들

1980년대 영국 사회에 대한 세밀하고도 방대한 증언

되풀이 속에서 되풀이되는

또 다른 벽, 타문화와 역사에 대한 선이해

신석정 시인의 영역 시선집을 내며

대산세계문학총서,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2020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

창작 후기

되풀이 속에서 되풀이되는

황인찬
시인, 1988년생
시집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 등

되풀이 속에서 되풀이되는

일역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


 


이제 겨우 세 권의 시집을 냈을 뿐이지만, 시집을 낼 때마다 항상 조급증에 시달린다. 빨리 내지 않는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원고가 묶이고 시집의 윤곽이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하면 마음이 급해져 일상이 무너지는 것이다. 원고를 모두 인쇄하여 어딜 가든 가방에 넣고 다니고, 지금까지 써온 시들을 돌아보며 그동안 쓰레기 같은 시를 써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밀려오는 자기혐오와 싸우는 데 기력을 거의 다 쓰는 나날이 시작되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시집을 묶기 전까지는 이전에 쓴 시들을 확인하지 않는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삶을 길게 보며 운영할 줄을 모르고, 눈앞에 닥친 일들만 생각하며 지나간 일들은 돌이킬 줄 모르는 나의 어리석음 탓이다.
그러니 시집을 내지 않는 한은 지나간 시간과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일상은 언제나 빠르고 바쁘게 우리를 앞으로 밀어낼 뿐이므로. 이번 시집의 제목을 『사랑을 위한 되풀이』라고 정한 것은 그런 까닭이다.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과거를 잊어버리고, 미래에 눈이 닿지 못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미래는 언제나 다음 주 언저리에 머물고, 그보다 먼 미래는 어쩐지 거창한 관념어처럼 느껴질 따름이다. 그러니 매일 같은 날이 되풀이된다는 감각으로부터 ‘되풀이’에 대한 생각이 시작되었다. 이번 시집에는 늦게 간 군대에서 썼던 시 몇 편이 들어가 있는데, 사실 군대에서 이 되풀이에 대한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군대야말로 구분되지 않는 일상의 반복을 온몸으로 견디고 버텨야 하는 곳 아니겠는가.
나는 여름이 시작될 무렵에 훈련소에 입소했는데, 그곳에는 무궁화가 잔뜩 피어 있었다. 그걸 보며 역시 군대에는 무궁화가 많구나, 무궁화는 생각보다 예쁘구나 따위의 생각을 했는데, 자대 배치를 받고는 꽃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잊고 지냈다. 그런데 이듬해 6월이 되자 영내의 여기저기에는 무궁화가 피기 시작했다.
벌써 여름이구나.
무궁화가 피고, 제비가 날아오는 것을 보며 한 생각이었다. 군에서의 하루는 정말 말도 안 되게 길어서 거의 시간이 멈춰 있는 것만 같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일주일이, 한 달이, 그리고 일 년이 지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여름이 다시 왔다는 생각을 하며, 내가 지난해 여름에도, 그리고 지지난해 여름에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구분되지 않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더 큰 반복을 발견하며 새삼스럽게 놀라고는, 매년 똑같이 놀라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또 놀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이다. 작은 반복 속에서 큰 반복을 깨닫게 되는 것, 이 삶이 거대한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매번 반복해서 깨닫는 것. 그것은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반복 속에 갇혀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일상이란 너무도 견고하여 스스로는 도무지 깰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라는 말이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그 반복을 반복하며 조금은 앞으로 나아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전봉건 시의 제목을 빌려 ‘사랑을 위한 되풀이’로 시집의 제목을 정한 것은 그런 이유다. 어쩌면 이번 시집을 읽은 이는 모종의 퇴행성을 읽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는 폐색된 인간을 읽을 수도 있으리라. 나 역시 나 자신의 왜소함을 매 순간 자각한다. 나는 미래가 없고 과거도 없는 사람처럼 매 순간을 겨우 버텨나간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내 또래는 이제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지 못한다. 믿을 수 있는 삶의 모델을 잃었고, 뒤를 돌아보면 모두 캄캄한 허공뿐이라, 내가 어떻게 저 위를 걸어왔는지마저 이해하지 못할 따름이다. 그것이 내가,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과거를 자주 생각하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끝없는 일상이란 끝없는 현순간을 의미한다. 구분되지 않는 날들 속에서 우리는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지 못하고 매 순간 같은 현재를 마주한다. 이번 시집에서 먹는 일이 그토록 자주 등장하게 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지금 이 순간의 기쁨, 지금 이 순간의 사랑, 그토록 허무하고 오래가지 못할 것을 겨우 손에 쥐고 안도하는 것이 지금 나의, 우리의 삶이다. 그러므로 사랑이고, 그러므로 되풀이다. 그것은 나란히 놓일 수밖에 없다. 이 전망 없는 삶을 견디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매일을 새롭게 마주하는 것이다. 결코 희망을 잃지 않고. 불가능한 것을 앞에 두고도 절망하는 대신 앞으로 나아갈 마음을 먹는 것, 그게 사랑이란 말의 뜻이라 나는 생각한다.

※ 필자의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는 재단의 대산창작기금을 받아 2019년 창비에서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