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좋은 언어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랑과 어긋난 길들

페미니즘은 여성이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확장시켜

「B사감과러브레터」 이어쓰기 ①사랑의 진실 ②B사감과 자매들 ③B사감과 운명의 화살 ④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 2 ⑤신여성 ⑥눈물

‘왜’와 ‘만약’을 허용하는 역사학적 상상력

코로나 시대의 역설

김소월 혹은 흰 달의 노래를 찾아서

일제강점기 장안을 사로잡은 유행가, 트로트

눈 오는 밤, 식민지 북국의 한 로맨티스트

‘디귿’ 없는 글쓰기

밀란 쿤데라, 두 번의 추방

앵앵시사(櫻櫻詩社) 문우들

민족혼의 숙소 현저동 101번지

쓸쓸하고 초라했던 만년의 자화상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고생은 참을 수 있지만 치욕은 참을 수 없었던 시인 부재(不在) 하는 방랑자 '예술의 목적은 인생’이라던 고독한 ‘원형적비평가’ 멋, 술 그리고 病

①나 세상 떠날 때,그가 울까봐 걱정이다 ②한 달 동안,감정적

엄마가 사준 옷

아빠를 중고로 팔아버렸어

①숭어 이야기 ②바보의 웃음 ③통증이 오는 시간

공포의 대상 혹은 욕망의 주체

팬데믹 시대, 인간의 존엄을 향한 작가들의 질문

부자를 만들어주는 요술책들

1980년대 영국 사회에 대한 세밀하고도 방대한 증언

되풀이 속에서 되풀이되는

또 다른 벽, 타문화와 역사에 대한 선이해

신석정 시인의 영역 시선집을 내며

대산세계문학총서,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2020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

나의 아버지

'예술의 목적은 인생’이라던 고독한 ‘원형적비평가’

조광권
조연현 시인의 장남, 청계천포럼 대표, 1947년생

조연현(1920~1981) 평론가, 시인. 삼척 출생. 잡지협회 회장, 한양대학교 국학연구소 소장 역임. 저서 『문학과 사상』 『문학개론』 『한국현대작가론』 『문학적 인생론』 『한국현대문학사』 『여백(餘白)의 사상』 등. 탁월한 인상비평의 영역을 구축하고 순수문학론적 입장에서 전통을 적극 옹호하였음.

 

나의 아버지 석재(石齊) 조연현은 경남 함안에서 일본의 조선 강점이 심화되던 1920년 7월 26일 생육신의 한 분인 어계(漁溪) 선생 조려(趙旅)를 중(中)시조로 하는 함안 조씨 통판공(通判公)파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증조부께서는 아들 삼 형제를 두셨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맏이였다. 생전에 아버지가 하신 말씀에 따르면 어릴 적에 등굣길 양쪽의 논밭이 모두 우리 땅이라고 할 정도로 증조부는 천 석 이상을 경작하신 부농이었고 면장도 지냈다고 한다. 지금도 함안에는 증조부의 송덕비가 서있는데 흉년이 들었을 때 마을을 위해 하신 일들을 많은 동네 분들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자수성가하여 재산을 일구고 마을을 위해 구휼에 앞장섰던 증조부와는 달리 할아버지의 형제 세분은 앞다투어 그 많은 재산을 다 탕진하여 지금 남아있는 것은 함안의 선산뿐이다. 할아버지는 일제하에서 동경의 대학을 두 군데나 다녔고 승마에 테니스까지 했다고 한다. 주택 사업하느라, 두 집 살림하느라 물려받은 재산을 거의 탕진하고 돌아가실 무렵에야 할머니가 계신 우리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때가 내가 초등학생일 때였다. 아버지는 외동으로 어릴 적부터 몸이 작고 병약했고 평생 50kg를 넘지 못했다. 그래서 어릴 때 동네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젊을 때 축구선수를 했던 체격 좋은 사촌 형이 늘 아버지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나까지 우리 삼대는 당시 고려대학교와 같은 뿌리인 명문 사학의 하나인 보성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아버지는 보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중앙, 배재 등 여러 학교를 전전했다. 보성학교를 다니면서 동인지를 냈는데 거기에 실은 시 때문에 퇴학당했기 때문이었다. “내 얼굴은 말랐다 식민지처럼 말랐다”라고 썼으니 무사할 리가 만무하였을 것이다. 증조부 눈에 이 병약하고 문학한답시고 현실에 무능한 손자가 강제징용되어 일본군에라도 가면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 임시방편으로 세무서 서기로 취직을 시켰다고 한다. 세무서 서기로 있으면서 강제징용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두어 편 쓴 것이 노무현 정부 시절에 친일파 인명사전에 올라간 이유가 되었다. 아버지가 고인이 되신 지 어언 40년이 흘렀고 이제는 해방 후 우리 문단과 현대사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문단이 주체가 되어 역사적 인물의 공과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된다는 생각을 이 기회를 빌려 간곡히 말씀드린다.

 

아버지는 말이 많은 분이 아니었기에 인생살이에 대하여 직접 훈계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인인성사(因人成事)’를 가훈으로 말했다. 모든 일의 성사는 결국 사람관계에 있다는 뜻으로 나는 이것을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 사이에 신의를 지키며 살아야 된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아랫사람이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지극히 경계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40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버지 차를 몰던 기사 안 씨가 집안 대소사 때면 정릉 꼭대기 집까지 어머니를 뵈러 찾아온 것이라든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 아버지의 동국대 제자였던 전 마산 MBC 사장, 시인 최원 선생이 산소까지 동행하면서 나를 친동생처럼 걱정해 주는 것을 지켜보면서 생전의 아버지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본다.
나는 체질적으로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성질이 급하다고 할까, 기다리는 것을 지극히 싫어한다. 본인이 남을 기다리는 것을 싫어함은 당연하고 남을 기다리게 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당연히 어떤 약속이던 약속시간 전에 가서 기다리고 오늘 할 일을 절대 내일로 미루지도 않는다. 또 공과 사의 구별이 철저하여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섞지 않고, 사익을 위해 공공의 것을 이용하는 사람을 혐오하였다. 그리고 말 많은 것을 싫어하여 늘 결론부터 이야기했고 말 많은 사람은 신뢰하지 않았다. 신체 중 특히 위장이 약하여 절대 과식하는 법이 없고 늘 8할 정도의 양으로 만족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한번은 맛있는 빵집이 있다며 빵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많은 기대를 하며 따라갔는데 빵 한 개를 시켜 반을 나누어먹자 하신 일을 종종 웃으며 얘기하셨다.
아버지는 체질적으로 약골이라 늘 골골하면서도 학교, 글 쓰는 일, 문단의 대소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느라 자주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져 어머니를 놀래키곤 했다. 대부분의 문단 분들이 좋아하는 술도 못하고 운동을 못하니 유일한 취미는 바둑이었다. 휴일이면 바둑 두는 문단 원로들의 담배연기가 집안을 가득 채웠고 어머니는 음식 해 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급수가 비슷한 나와 바둑을 둘 때는 내기 바둑 두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만원이라도 따면 너무 즐거워하셨는데 그 점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국내 여기저기 강연 가시는 것과 해외여행도 좋아하셨다.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하면서 그렇게 다니셨는데 본인의 여행 수상을 “벙어리 해외여행”이라 명하셨다.
공교롭게도 할아버지, 아버지, 나까지 3대가 모두 종교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딱히 어떤 초월적 존재를 강하게 부정하지도 않았다. 인생살이나 문학을 대함에 있어서도 어떤 주의, 주장에 함몰되는 것을 극히 경계하셨는데 종교에 있어서도 그런 태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버지는 당신의 수상집에서 자신이 종교를 갖지 못한 이유를 자신의 정신적 기질에서 기인한다고 하면서도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 종교를 믿는 사람의 생활이 훨씬 아름다워 보인다고 고백한 바 있다. 아버지가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를 유독 좋아한 이유가 그의 종교에 대한 자세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이 신이 없어도 절대자만큼 선(善)해질 수 있다는 소위 인신사상(人神思想)을 그의 거의 모든 소설에서 구현하려 노력하였다. 아버지는 도스토옙스키를 평하면서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 “원형적 인간”이란 표현을 썼다.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너무나 현실적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보기에는 도스토옙스키에 비하면 아무리 훌륭한 작가도 거의가 작가가 아니며 스도토옙스키가 인간을 아는 것에 비하면 아무리 훌륭한 작가도 인간을 모른다”라고 하셨다.

제13회 3·1문화상 시상식 기념사진  

로마 여행에서의 아버지

 

아버지에게 문학은 무엇이었을까, 왜 그렇게 평생 글 쓰는 일에 몰두하였을까라는 우문을 해볼 때가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버지는 흔히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문학 지망생들에게서 볼 수 있는 감성적인 욕구에 의해서 문인이 된 것은 아니다. 위인이나 영웅을 흠모하고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한 분이었으나 일제하의 사회적 조건과 병약한 체질 등 신체조건이 따라주지 못하자 그러한 욕망을 글로써 푼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버지는 “예술이나 학문은 목적이 아니고 방법이다. 목적은 언제나 인생이다. 인생을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예술이나 학문이라 해서 소중히 다룰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라면서 “예술지상주의는 현실지상주의다”라고 수상집에서 말하고 있다. 또 아버지는 평론에 대하여 “비평이 단순한 가치 판단이 아니라 그것은 역시 인생의 표현이라는 이 간단한 진리를 체득하는 데 나는 실로 많은 세월을 거쳤다”라고 수상집에 밝히고 있다. 나더러 굳이 평론가로서의 아버지에 대해 말하라면 나는 “원형적 평론가”라고 부르고 싶다.
아버지는 체질적으로 고독하고 외로운 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긍정적이고 유쾌한 인간관계를 많이 만들려고 노력하셨다. 아버지는 수상집에서 “고독의 자각적 과정은 대개 두 방향에서 비롯된다. 그 하나는 자기가 군중의 수준보다 아래이므로 발생되는 고독과, 자기가 군중의 수준보다 너무 높기 때문에 발생되는 고독이 그것이다”와 “사람들이 고독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대개 혼자의 세계 속에서가 아니라 여럿의 세계 속에서이다……. 절실한 고독은 항상 군중 속에서 자각된다……” 등 고독에 대하여 예리한 분석을 많이 했는데, 문단과 가족들이 아버지의 고독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았을까 궁금하다.
이제 다시 아버지와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나는 아버지와 이별하며 “이별은 살아가야만 하는 인생에서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삶의 한 형태이다. 그러므로 이별은 하나의 종결인 동시에 하나의 출발이요 발단이다”라는 아버지 수상집의 문장을 묘지명 말미에 새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