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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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랑과 어긋난 길들

페미니즘은 여성이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확장시켜

「B사감과러브레터」 이어쓰기 ①사랑의 진실 ②B사감과 자매들 ③B사감과 운명의 화살 ④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 2 ⑤신여성 ⑥눈물

‘왜’와 ‘만약’을 허용하는 역사학적 상상력

코로나 시대의 역설

김소월 혹은 흰 달의 노래를 찾아서

일제강점기 장안을 사로잡은 유행가, 트로트

눈 오는 밤, 식민지 북국의 한 로맨티스트

‘디귿’ 없는 글쓰기

밀란 쿤데라, 두 번의 추방

앵앵시사(櫻櫻詩社) 문우들

민족혼의 숙소 현저동 101번지

쓸쓸하고 초라했던 만년의 자화상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고생은 참을 수 있지만 치욕은 참을 수 없었던 시인 부재(不在) 하는 방랑자 '예술의 목적은 인생’이라던 고독한 ‘원형적비평가’ 멋, 술 그리고 病

①나 세상 떠날 때,그가 울까봐 걱정이다 ②한 달 동안,감정적

엄마가 사준 옷

아빠를 중고로 팔아버렸어

①숭어 이야기 ②바보의 웃음 ③통증이 오는 시간

공포의 대상 혹은 욕망의 주체

팬데믹 시대, 인간의 존엄을 향한 작가들의 질문

부자를 만들어주는 요술책들

1980년대 영국 사회에 대한 세밀하고도 방대한 증언

되풀이 속에서 되풀이되는

또 다른 벽, 타문화와 역사에 대한 선이해

신석정 시인의 영역 시선집을 내며

대산세계문학총서,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2020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

가상인터뷰

김소월 혹은 흰 달의 노래를 찾아서

홍용희
평론가,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1967년생
저서 『김지하 문학연구』 『한국문화와 예술적 상상력』 『꽃과 어둠의 산조』 『아름다운 결핍의 신화』 『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 『현대시의 정신과 감각』 『고요한 중심을 찾아서』 등


김소월 혹은 흰 달의 노래를 찾아서
- 시인 김소월과의 대화



김소월(1902~1934)
1902년 8월 6일(음력) 평안북도 구성(龜城)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오산(五山)학교 중학부를 입학해 김억(金億)과 사제관계를 맺게 되고 한시, 민요, 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1920년에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등을 《창조(創造)》지에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3년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귀국하였다. 1925년에 그의 생전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매문사(賣文社)에서 간행되었다. 1926년 8월 평안북도 구성군에 동아일보 구성지국을 개설하여 이듬해 3월까지 지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4년 12월 23일 아편을 과다 복용하고 자살하였다. 1939년 스승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가 발간되었다. 1977년 《문학사상》11월호에 미발표 소월 자필 유고시 40여 편이 발굴, 게재되었다.



김소월이 등단 100주년을 맞았다. 그의 등단 이후 100년 동안 그만큼 우리 시사에서 독자들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폭넓게 받은 시인도 없을 것이다. 그의 시는 이해하기 이전에 이미 마음으로부터 깊은 감응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시를 마주하면 어느새 그의 시세계 속에 동화되어 위안과 정화와 치유를 얻게 된다. 우리 민족사의 그늘 깊은 삶의 정서를 그의 시세계만큼 간곡하게 노래하는 경우는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다시 찾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 김소월 시인과의 대담을 통해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그의 시와 시적 삶에 대해 재인식과 발견의 기회를 얻고자 한다.

■ 홍용희(이하 홍) :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의 시세계는 너무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시적 삶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편입니다. 또한 선생님 시에 대한 관행화된 독자들의 이해에 대해 창작 주체로서 하실 얘기가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대담에서 이러한 얘기들을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막상 가까이서 뵙게 되니 선생님의 인상이 평소에 접하던 사진과 다르다는 데 놀라게 됩니다.

김소월


■ 김소월(이하 김) : 반갑습니다. 홍 선생과 대담을 약속해놓고도 내 시와 삶에 대해 직접 얘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하는 생각에 여러 번 후회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저 아래로부터 어떤 뜨거운 감회가 북받쳐 오르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서른두 해를 무엇으로 살았는가 할 때, 그래도 시가 있어 견뎠고, 시에서 살아갈 힘을 얻었는데, 그것이 또한 내 덧없는 서른두 해의 증거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합니다.
학생들 교과서나 세간에 알려진 내 얼굴들은 나도 낯설어요(하하하). 1987년에《문학사상》에서 소월시문학상을 제정하면서 그린 내 초상이나, 1990년에 정부에서 문화인물로 선정하면서 내 손자 얼굴을 본으로 해서 그렸다는 것이나 다 그래요. 그래도 이게 진짜 나였지 하는 사진이 영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오산학교 다닐 때 학생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이 있지요. 이 사진을 내 둘째 아들 은호가 보관하고 있다가 1966년 북한의《문학신문》에서 내 흔적을 취재하겠다고 왔을 때 건네주었다는군요. 6.25 전쟁 때 인민군으로 남한에 내려왔다가 정착한 삼남 정호도 이 사진을 어릴 때부터 보았던 아버지 사진이라고 확인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 사진을 아직 내 것으로 쓰지는 않더군요. 나는 그저 한복을 입고 영정처럼 초췌해야 나답다고 하는 것 같아요(허허허).

 홍  선생님의 초상화를 다시 그리는 것이 꼭 필요하겠군요. 이것은 단순히 선생님의 초상화를 실제 모습에 가깝게 복원한다는 의미를 넘어 선생님에 대해 관행화된 선입견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먼저 선생님의 유년기 생활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선생님은 시 「고향」에서 나고 자란 평안도 정주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바다와 산과 넓은 벌판이 두루 어우러진 수려한 곳으로, 선생님의 필명 소월도 고향의 풍취와 연관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공주 김씨 집성촌인 이곳에서 선생님의 집은 가장 크고 부유한 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김  내 고향마을은 공주 김씨 집성촌인데 120여호가 신작로를 사이에 두고 모여 살았어요. 마을 동쪽에는 옥녀봉, 진달래봉(남산봉)이 우뚝 솟아있고 서남쪽으로는 전답이 펼쳐져있었어요. 진달래봉 기슭에라도 올라가면 서해의 망망대해가 훤했어요. 진달래봉의 옛 이름이 소산(素山)이었지요. 소산에 달이 뜨면 온기는 없었지만 우리집 주변이 극락처럼 환했어요. 문단에 나올 때 나는 소산의 달을 떠올려서 이름을 ‘소월(素月)’로 적었어요.
우리집은 마을 사람들이 일봉댁이라고도 하고 큰집이라고도 불렀어요. 일찍 남편과 자식을 잃었던 증조모가 평생 부지런히 일만 하시면서 집을 일으켰지요. 집을 지으실 때 친정인 일봉에서 목재를 가져오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봉댁이라 불렀지요. 전체적으로 입구자(ㅁ)형 기와집이었어요. 집주변은 돌담이 가지런히 에워싸고 있었지요. 돌담을 따라 댓돌 밑으로 화단이 있었어요. 화단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피고 졌지요. 비가 오면 화단은 더욱 생기가 돋았어요. 꽃이 피면 비온 뒤 마당에 고인 물도 붉었던 기억이 선합니다.
할아버지 김상주 어른은 부지런하면서 추진력이 대단하고 신문물에 대해서도 적극적이었지요. 일찍 단발을 하고 개화장을 짚으며 서울을 자주 드나들었어요. 내가 8살 때에는 고대하던 금광개발에 성공해서 집안 형편도 훨씬 더 나아졌지요. 할아버지는 매사에 엄격하시긴 했지만 나에게는 참 많은 애정을 베풀어주셨어요. 특히 아버지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이후 어릴 때 서당공부부터 일본유학까지 일일이 신경쓰고 챙겨주셨어요.

 홍  소월(素月), 흰 달은 18세 청춘의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야위고 창백한 저녁 어스름의 느낌입니다. 실제로 선생님의 시적 삶은 ‘흰 달’의 성정을 운명처럼 지니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선생님의 유년기는 겉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이 다복하고 풍요로워 보입니다. 식구도 증조모, 조부모, 숙부, 고모, 머슴 등을 합해 열한 명이나 되었다지요. 그러나 선생님 댁의 평안은 불안한 평안이었지요. 당시 한반도에 침탈한 외세의 폭력이 선생님 댁까지 헤집고 있었지요.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에 승리하면서 더욱 호전적으로 점령자의 위세를 부렸지요. 선생님의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기찻길 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들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폭력을 당한 이후 정신이상자가 되어간 것도 이 무렵이었지요.

 김  그렇습니다. 내가 3살이고 아버지 나이 21살이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지요. 신의주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는 경의선 공사가 정주 인근에서 한창일 때였어요. 아버지는 집에서 일하던 막실이를 데리고 나귀 등에 음식을 싣고 처가에 다니러 가던 길이었다고 해요. 일본목도꾼들이 그 음식을 뺏으려고 달려들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호통을 쳤지만 역부족이었지요.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후 차차 육신의 상처는 나았지만 정신은 제대로 돌아오진 않았어요. 자주 헛것을 보시고 헛소리도 하시고, 밤에도 산이나 강으로 나다니시고, 새나 나무를 물끄러미 보시다가 대화를 나누듯 중얼거리기도 하시고. 누구를 해치시거나 하진 않았지만 여간 답답한 노릇이 아니었지요. 온 집안에 근심이 떠나질 않았어요. 불안한 어둠이 집안 한가운데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버지가 늦은 밤이 되어도 돌아오시지 않으면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아버지를 찾아 나서곤 하셨어요. 그러나 그것도 얼마 안가서 아버지는 점점 없는 존재처럼 되어갔어요. 집안에서 아버지 얘기는 금기처럼 되어가고. 그럴수록 아버지는 내 가슴 속에 더 강하게 자리 잡았어요. 늦은 밤에 대문을 여닫는 소리까지 놓치지 않고 들리고…… 아버지가 보고 듣는 헛것이 궁금하고……

 홍  아버지의 존재감이 미약해질수록 아들인 선생님의 가슴 속에서는 더욱 강렬하게 자리잡아가고 있었군요. 그리고 어느새 아버지가 보고 듣고 말하는 초현실적인 세계까지 감각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탓일까요? 저는 선생님이 10대에 이미 동굴처럼 깊은 울림의 시를 쓴 것에 대해 아버지의 복화술이란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선생님의 삶은 아버지 따라가기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는지요? 어디에도 흔적이나 기록이 남아있지를 않습니다.

 김  그렇지요. 아버지는 우리 집뿐만이 아니라 공주 김씨 문중에서도 언급이 금기시된 부재하는 존재였으니까요. 그 점은 죽음까지도 마찬가지였지요. 내가 오산학교에 다니던 어느 초여름날이었어요.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날이었지요. 기별이 왔어요. 아버지가 집을 나가서 돌아오시지 않는다고. 나는 자취방도 안 들르고 바로 본가로 갔지요. 아무도 아버지 얘기를 하지 않는 거예요. 나는 할아버지에게 소리쳤어요. 왜 찾지도 않으시냐고. 할아버지는 저를 한참보시더니 한마디 하셨어요. 니 애비는 가야할 곳에 잘 갔을 것이라고. 내가 할아버지방을 나오자 그때서야 할아버지는 혼자 흐느껴 울었어요.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내 꿈에 자주 오셨어요. 달밤에 강변에 서 계셨지요. 아버지가 강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시면서 강물은 회오리가 되고 이내 달이 되어 떠올랐어요. 나에게 일본은 어떤 역사적 이해 이전에 우리 아버지를 망치고 집안을 망친 원초적 상실과 슬픔을 가져다 준 대상이었지요.

 홍  선생님의 시 「엄마야 누나야」가 하염없이 평화롭지만 “강변”, “뒷문 밖의 갈잎” 등의 이미지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느껴지곤 했는데 이런 배경 탓이지 않을까 생각되는군요. 아버지께서 그토록 처연한 어둠, 소외, 상실의 현실 속에서 환한 달빛의 충만한 세계로 걸어 들어가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선생님의 시가 많은 경우에 살아서도 늘 죽음 쪽을 향해 있었던 까닭도 이러한 문맥에서 이해되고요.
선생님 시세계의 중심음은 사랑이라고 할 것입니다. 죽음까지 파고드는 사랑이 주조음을 이룹니다. 선생님의 사랑은 대략 3가지 층위로 나누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를테면, 블루와 레드 그리고 무채색입니다. 저는 오순, 채란, 아내 홍실단이 각각 이에 대응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특히 「초혼」, 「진달래꽃」 등은 오순과의 인연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홍용희

 김  내 시는 대부분 내가 썼다기보다 내게 와서 쓰여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내 시라고 해서 내가 나서서 잘 안다고 설명하기는 어렵지요. 남산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어요. 음악시간에 오순이 노래를 하면 목소리가 참 낭랑하면서도 따스했지요. “고적한 잠자리에 홀로 누어도 “그녀의 노래를 떠올리면” 내 잠은 포스근히 깁피”들었으니…… 함께 뒷산에서 먼 바다를 내려다보곤 했어요. 바다에 흰 눈이 닿으면 그 순간 그만 죽고 마는 것을 같이 목격하곤 했지요.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다가 하얗게 반짝이는 것은 죽은 눈들이 내는 빛 때문이라고 말했지요. 남산학교를 마칠 무렵이었어요. 오순이는 참 결이 여리고 고와서 우리집같이 어둠이 언제 온 집안을 뒤덮을지 모르는 곳에 살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할아버지의 강권으로 나는 홍실단과 혼인을 하게 되었지요. 내가 남산학교를 마치던 해였어요. 내 꼭 열다섯 나던 때군요. 할아버지가 사업하면서 알던 홍씨 집안의 딸이었지요. 아내는 키가 크고 성격이 참 어질었지요. “착한 일하신 분네는 천당” 간다고 내가 말하곤 했지요. 채란은 「팔베개노래」에서 이미 밝혀두었듯이 진주 사람인데 내가 일본을 다녀온 후 할아버지 광산일을 도우며 권태로워 할 때…… 내게 사랑은 언제나 처음같고 언제나 어리석었고…… 회한만 남아요……

 홍  오순은 그 후에 만날 기회가 없었나요.

 김  없었지만 그렇다고 없었다고 할 수도 없지요.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 되어 나타났으니……

 홍  젊은 나이에 그만 죽음을.

 김  훗날 이웃마을에 살던 우리네보다 한참 나이든 남자와 혼인을 했는데, 얼마 안 있어 죽었지요. 그 남자한테 맞아서 죽었다는 말이 들려왔어요(말이 빨라진다). 혼인은 했지만 나를 잊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녀의 이름을 설움에 겹도록 불렀소. 어느새 “서산마루”에 올라가 불렀어요. 이승과 저승 사이가 너무 넓어, “부르는 소리는 빗겨가” 기만 했어요.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를 마저 하지 못했”으니, 그 죽음을 어찌 받아들이겠어요.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홍  선생님 시 「진달래꽃」은 「초혼」 다음에 놓이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초혼」이 죽은 자를 부르며 죽음을 두루 주변에 알리는 고복의식이라면 「진달래꽃」은 상여가 떠나가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사뿐히 즈려밟”는 걸음걸이는 ‘넋의 걸음걸이’이지 사람의 걸음걸이는 아닌 것으로 느껴집니다.

 김  그래요. 이 시를 연구하고 읽는 독자들이 자꾸 이별시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사별을 이별로 믿고자하는 시지요. 그렇습니다. 나는 오순의 상여를 멀찍이 바라보면서도 결코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나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이라고 거듭 반복했지요. “나보기가 역겨워” 어디론가 멀리 떠나가는 것이지 절대 죽은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다짐하듯 믿고자 했어요. 그녀는 절대 그렇게 죽어서는 안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초혼」과「진달래꽃」을 쓰고부터는 「먼후일」, 「풀따기」, 「금잔디」 등등의 시들이 흘러나왔지요. 꿈이나 그리움 속에서는 만날 수 있었으니.

 홍  너무 분위기가 격정적이 되어서, 좀 다른 얘기를 해보기로 하지요. 선생님의 각별한 시의 스승으로 시인 김억 선생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오산중학교 때 스승으로서 시를 읽고 고쳐주고 등단도 시켜주신 분이었지요.

 김  예. 오산중학교 때 영어선생님이셨어요. 선생님도 오산 출신이시고. 나의 인도삼촌과도 친구사이이고, 사모님은 우리 집안과 먼 친척벌이기도 했어요. 외국어 실력도 좋고 모든 시를 설명할 수 있을 법한 논리력이 대단했지요. 시를 보여드리면 열정적으로 읽으시면서 고쳐주시곤 했어요.

 홍  좀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선생님의 시론 「시혼」을 읽으면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만, 김억 선생님과 인연이 좋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선생님 시를 민요조 시인이라며 조선의 지역적 울타리 속에 가두려하고, 파인 김동환의 전언에 비추어 보면 선생님이 「시혼」을 쓴 이후 중앙문단활동을 내심 어렵게 했고, 심지어 선생님 사후에는 맡겼던 작품을 자신의 작품으로 발표도 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김  다 지나간 일이지요. 인간사가 가까울수록 그런 거고. 안서 선생님이 나에게 민요시인이란 말을 맨 처음 썼지요. ‘시인이면 시인이지 민요조 시인은 무엇이냐고’, 당시 안서 선생님 처남이면서 내 오산학교 후배였던 정익이에게 퍼붓고는 했는데 그게 다 소문이 났더군요(허허허).
나는 외국문학 읽기를 좋아했어요. 아마도 어둠이 짙었던 우리 집안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배재고보를 다닐 때 모파상 소설을 번역하고, 일본 유학시절엔 베를렌이나 아서 시먼스 시는 줄줄 외우고 다녔지요. 독일어를 하지 못해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의 죽음의 절실함을 원어로 읽지 못한 아쉬움은 지금도 남아요. 안서 선생님 번역 작업에 참여도 하고 한시 번역도 해보고 참 좋은 기억들이었어요. 내 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지요.
안서 선생님의 월평을 읽고 한 1년간 전전긍긍하며 참다가 1925년 5월에「시혼」을 발표했어요. 많이 서운해 하셨지요. 서로 오랫동안 적조했어요. 그런 일이 없었다면 중앙 문단의 발표도 더 있었겠지만…… 10여년 흘렀을까. 안서 선생께서 한시 번역시집 『망우초』를 우편으로 보내주셨어요. 거기에 선생님의 시「삼수갑산」이 실렸는데, 참 반가웠어요. 선생님 시가 훨씬 자연스러워져서 더 반갑고 좋았어요. 나는 「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三水甲山韻)」을 써서 답신을 보내기도 했지요. 내 죽은 이후 조시도 쓰시고 하셨지만 이재(利財)에 밝았다는 둥 비방도 적지 않았더군요. 이제와 원망은 없어요. 고마운 분이고 모두 연민의 마음이 들고.

 홍  기본적으로 선생님 시는 세계조선시인을 지향했지요. 아서 시먼스의 시집 체제가 『진달래꽃』의 본이 되기도 하고. 전통적 율격의 내면화 속에서 해외 시의 감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안서 선생과의 관계에 집중해보면, 천재 제자를 가진 스승의 번뇌가 적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안서 선생이 친구 유봉영에게 쓴 편지에 수록된 「못니저」가 선생의 손을 거치자 수정의 메아리처럼 완전체가 되었잖아요. 안서 선생의 자존감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겠지요. 선생님이 안서의 제자가 된 것은 죽음 이후인 것 같습니다. 안서께서 선생님에 대해 4편의 회고를 쓸 때만큼은 선생님을 자신의 제자로 마음껏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선생님이 스승 안서의 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서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저는 안서와 선생님의 사제 관계에서 선생님보다 안서가 더 치명적인 피해자였다는 생각입니다. 시인으로서 선생으로서 자존감에 균열이 일어날 때 그 재능 또한 제대로 발양하지 못하게 되지요. 삶의 균형감각도 깨어지고.

 김  아하! 그런 생각은 못했는데, 홍 선생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네요. 살면서 알고도 죄를 짓고 모르고도 그러고……

 홍  1934년 9월에 안서 선생께 쓴 편지를 보면 정주를 떠나 구성에서의 10여년 삶을 짐작해볼 수 있게 합니다.
“세기는 저를 버리고 혼자 앞서서 다라간 것 같사옵니다. (……) 사(死)의 유혹에 박덕한 신세를 구슬프게도 울던 그 달빛 그 월색이 백주(白晝)와 지지 않게 밝사옵니다”라는 문구가 등장합니다. 죽음의 매혹에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과연 그 해 12월 23일 밤 10시경, 만 32살에 선생님은 아무도 목격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니 스스로 남몰래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저만치 겨울 밤의 언 땅을 사뿐사뿐 즈려 밟고 떠나가셨지요. 선생님의 죽음에 대한 신문기사들이 남아있습니다만 그것으로 정확한 사인을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김  홍 선생 지적처럼 나는 살아서도 늘 죽음 쪽을 향해 있었지요. 죽은 자의 소리를 듣고, 죽은 자에게 말을 걸고, 죽은 자를 그리워하고 노래해왔지요. 내 시를 낳은 원천은 내 안의 죽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죽음도 나의 육신의 죽음과 함께 죽은 셈이지요. 죽음은 삶은 물론이고 죽음도 끝내는 것입니다. 나는 내 안에 살던 죽음의 정체는 아버지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내 시는 내 몸 속 아버지의 복화술이라는 앞에서의 지적이 옳다고 생각돼요. 지독한 외로움, 소외, 그늘…… 20대 후반부터 내 안의 죽음은 점점 더 커졌어요. 막내가 태어난 해였지만 내 안의 죽음은 나를 살 수 없게 했지요. 춥고 적막한 겨울밤이었어요. 한밤중이 되면서 숲은 심해처럼 깊고 고요했어요. 평소에 관절염이 심해서 조금씩 먹곤 하던 아편을 말아서 입에 넣었어요. 내 몸 속의 아버지가 걸어 나갔어요. 아니 그건 아버지가 아니라 나였어요. 내 발걸음에 마른 잎들이 부딪히면서 언 땅과 함께 서걱거렸어요.

 홍  선생님은 살아서는 늘 죽음 쪽을 향해있었지요. 그러나 죽어서는 다시 삶 쪽을 향해있습니다. 산 자들에게 말을 걸고 산 자들을 위로하고 산 자들을 달빛처럼 정화시킵니다. 선생님은 “죽음에 가까운 산마루에서서 야비로서 살음의 아름다운 빨래한 옷이 생명의 봄 두던에 나부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시편들이 세월이 갈수록 더욱 살아나는 배경이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 부디 영원한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