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좋은 언어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랑과 어긋난 길들

페미니즘은 여성이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확장시켜

「B사감과러브레터」 이어쓰기 ①사랑의 진실 ②B사감과 자매들 ③B사감과 운명의 화살 ④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 2 ⑤신여성 ⑥눈물

‘왜’와 ‘만약’을 허용하는 역사학적 상상력

코로나 시대의 역설

김소월 혹은 흰 달의 노래를 찾아서

일제강점기 장안을 사로잡은 유행가, 트로트

눈 오는 밤, 식민지 북국의 한 로맨티스트

‘디귿’ 없는 글쓰기

밀란 쿤데라, 두 번의 추방

앵앵시사(櫻櫻詩社) 문우들

민족혼의 숙소 현저동 101번지

쓸쓸하고 초라했던 만년의 자화상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고생은 참을 수 있지만 치욕은 참을 수 없었던 시인 부재(不在) 하는 방랑자 '예술의 목적은 인생’이라던 고독한 ‘원형적비평가’ 멋, 술 그리고 病

①나 세상 떠날 때,그가 울까봐 걱정이다 ②한 달 동안,감정적

엄마가 사준 옷

아빠를 중고로 팔아버렸어

①숭어 이야기 ②바보의 웃음 ③통증이 오는 시간

공포의 대상 혹은 욕망의 주체

팬데믹 시대, 인간의 존엄을 향한 작가들의 질문

부자를 만들어주는 요술책들

1980년대 영국 사회에 대한 세밀하고도 방대한 증언

되풀이 속에서 되풀이되는

또 다른 벽, 타문화와 역사에 대한 선이해

신석정 시인의 영역 시선집을 내며

대산세계문학총서,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2020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

기획특집

⑥눈물

김세희
소설가, 1987년생
장편소설 『항구의 사랑』, 소설집 『가만한 나날』 등

기획특집⑥ B사감과 러브레터 이어쓰기


눈물



4월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얼마 전 쉰여덟이 된 김영혜는 옷을 차려 입고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갔다. 날씨가 무척 맑고 아름다운 날이었다. 대예배실의 긴 나무의자들은 아직 비어 있었다. 그녀는 기둥으로 시야가 막히지 않은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렇게 상쾌한 기분은 오랜만이구나…… 영혜는 창밖으로 사람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기분 좋은 아침이라고 생각했다.
그날은 특별히 학생부 성가대가 나와 특송을 불렀다. 십대 아이들이 수줍어하며 나와서 두 줄로 섰다. 그중에는 영혜의 손녀도 있었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참으로 듣기에 좋았고 영혜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어진 설교는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새로 온 부목사가 설교를 했는데,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성경 구절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기록한 대목이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는 신의 목소리를 들은 아브라함이 제발 그 뜻을 거두어달라고 애원하자, 신은 이 도시 안에 열 명의 의인이 살고 있다면 도시를 파괴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도시에는 의인 열 사람이 없었다. 부목사는 세상에 음탕함이 가득하다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한 시대가 되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오늘 당장 주님이 내려와 이 도시에서 열 명의 의인을 찾는다면, 성도님들이 그중 한 명이 될 수 있겠습니까?”

무테안경이 희게 빛나는 바람에 단상 위 부목사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몇 살일까. 영혜는 생각했다. 많아야 마흔 정도 되었을 듯했다. 저 사람 안에는 화가 가득하다…… 뭐 때문에 저렇게 화를 내는 걸까. 영혜는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같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 감탄하자고, 우주만물의 섭리 앞에 겸허한 마음을 갖자고 말해도 좋을 텐데.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는 이런 상쾌한 아침에 감사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신앙이 다 무슨 소용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나쳤다는 마음이 들어 영혜는 혼자 뜨끔했다.
생각을 멈추고 영혜는 설교에 귀를 기울여보려 애썼다. 그러나 부목사는 여전히 화를 내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틀어도, 길거리를 걸어도, 어디를 둘러보아도 음탕함이 가득하다고 성을 냈다. 마음의 평화를 구하러 교회에 나왔는데 꾸지람만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영혜는 다시금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저런 사람일수록 더 믿을 수가 없어. 한밤중에 자기 방에서 혼자 무얼 하는지 모를 일이지…… 자기 마음에 음탕함이 가득하니 어딜 봐도 그런 것만 보이는 법이라고.
영혜는 성가대 쪽으로 시선을 던져 손녀의 모습을 찾았다. 손녀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목사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었던 영혜의 얼굴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영특한 데다 어린 나이에도 기품이 있어 영혜가 특별히 아끼는 손녀였다. 그녀는 흐뭇한 마음으로 손녀를 바라보며 장차 저 아이가 무엇이 되려나, 어떤 사람이 되려나 상상해보았다.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면서 대학 캠퍼스를 바삐 걸어 다니겠지. 연애도 하고 이별도 할 테지. 세상이 달라졌으니까. 얼마나 좋을까. 영혜는 길고 참혹한 전쟁이 끝나고 찾아온 이 번영의 시기에 청춘을 맞은 아이들에게 부러움을 느꼈고 곧바로 주책이라고 스스로 꾸짖은 다음 다시 손녀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손녀도 짝을 만나 아이를 낳고 삶의 절정을 지날 것이다. 지금은 피어나는 중이지만 언젠가는 시들어갈 것이다. 영혜는 나이든 손녀가 지금 자신의 자리에 앉아 그 애의 손녀를 바라보는 장면을 떠올려보았고, 잠시 자신이 미래의 손녀가 된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누구나 시간이 흐르면 늙게 되고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과거 그 나이였던 자신을 떠올리게 된다는 건 불변의 진리지만, 그걸 자기 자신과 가까운 이들에게 적용하면 왜 이렇게 낯설고 오묘한 감정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영혜는 생각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상쾌한 바람을 얼굴에 느끼며 김영혜는 손녀의 나이였던 자기 자신을 떠올렸다. C여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화장실도 자유로이 갈 수 없을 만큼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꽁꽁 묶어두는 학교였는데도 김영혜의 기억 속에서는 그곳에 있던 때가 가장 생기 넘치던 시절로 남아 있었다. 당시 기숙사 사감은 B여사라는 여자였는데, 남자라면 마귀를 보듯 치를 떨어서 부모와 친동기간이라 해도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 그 무렵 기숙사의 최대 화제는 ‘러브 레터’였다. 여학생이라면 누구나 러브 레터를 받아보는 게 소원이었지만, 실제로 받게 되면 B여사에게 반나절은 닦달당할 각오를 해야 했다. B여사는 러브 레터를 받은 여학생을 앉혀두고 정신이 쏙 빠질 정도로 닦아세운 뒤 “사내는 여성을 잡아먹으려는 마귀”라고 말했고, 어린 양을 구해 달라고 기도를 올리곤 했었다.
영혜는 오랜만에 B여사를 떠올렸다. 당시엔 중늙은이처럼 보였지만 돌이켜보면 지금 단상 위에 있는 부목사 정도의 나이였다. B여사는 영혜가 마지막 학년일 때 학교를 떠났는데, 영혜 자신도 그 일에 관련이 있었다. 관련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실은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이들의 얼굴이 흐려졌고 B여사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건 기숙사 복도를 걸어가던 비쩍 마른 실루엣과, 주근깨투성이 얼굴, 쌀쌀맞은 표정 정도였다. 하지만 잊히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가을날 밤, 한밤중에 캄캄한 기숙사 복도를 살금살금 걸어가던 긴장감은 이상하리만치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전후의 사정도 기억나지 않고 왜 그랬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무 바닥을 내디딜 때 발바닥에 전해지던 미세한 삐걱거림까지 기억났다.
그때 복도에 있던 사람은 영혜 하나가 아니었다. 같은 방을 쓰던 마리아와 성미가 영혜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기숙사 어디선가 나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자다 깨어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이다. 한밤중에 방 밖에 나서는 건 금지된 일이었지만 가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사내와 여자가 사랑의 말을 속삭이며 키스가 너무 길다느니, 그만두라느니, 옥신각신 사랑싸움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그 소리의 출처는 곧 밝혀졌는데, 놀랍게도 사감실이었다. 열여덟 살이던 영혜는 앞뒤를 재어볼 겨를도 없이 이끌리듯 다가가 방문을 빠끔히 열었다.
이후 일들은 40년이 흐른 지금도 강렬하게 남아 있지만, 어쩐지 실제 일어났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언젠가 소극장에서 관람한 연극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그날 밤 세 여학생이 본 것은 1인극이었다. 전등불 아래 안경을 벗은 B사감이 사내의 목소리로 키스를 갈구하며 입술을 쭉 내밀고 있었고, 그러더니 급작스럽게 몸을 홱 돌려 토라지는 몸짓을 하며 한껏 꾸며낸 높은 목소리로 “난 싫어요. 당신 같은 사내는 난 싫어요.” 하고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러더니 곧 침대 위에서 편지 한 장을 집어 들어 “정말 나를 그렇게 사랑하셔요?” 하며 흐느꼈다. 짧은 순간 영혜는 B여사가 러브 레터를 받은 걸까? 숨겨둔 연인이라도 있는 걸까? 생각했다. 그러나 침대 위에 흩어진 종이들은 기숙생에게 온 러브 레터들이었다. 그걸 깨달은 동시에 싸늘한 전율이 발끝까지 퍼져나갔다.
길어야 5분 정도가 지났을까. 갑자기 B여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빠끔히 열린 문틈을 보았다. 세 여학생은 그대로 달아났다. 불 꺼진 방으로 들어와 후닥닥 각자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이불을 목까지 당겼을 때 영혜의 얼굴에는 어찌된 일인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환갑을 앞둔 영혜는 서늘한 교회당 안에서 새삼스레 곰곰이 생각해보았고, 동시에 그날 밤 일을 이토록 골똘히 생각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40년 전 그날 밤 흘린 눈물은 특별했다. 살면서 영혜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 슬픔의 눈물도 있었고, 분노의 눈물도, 고통의 눈물도 있었다. 기쁨의 눈물도 몇 번쯤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40년 전 그날 밤 흘렸던 것과 같은 눈물은 다시없었다. 그건 순간적으로 나오는 눈물이었어. 너무 놀라운 장면을 봤을 때 나오는 눈물…… 그날 영혜는 의미를 이해하기 전에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보고 있다는 걸. 한 인간의 가장 비밀스럽고 어두운 면을 목격했다는 걸.
다음 날, 영혜는 B사감이 자기들을 부르지 않을까 했다. 어쨌거나 규칙을 어기고 한밤중에 몰래 방을 나가 돌아다녔으니까. 하지만 호출은 없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리고 한 주 뒤 월요일, B사감이 학교를 떠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영혜는 식당에서 같은 학년 동무들과 밥을 먹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궁금해 하는 사람도 없었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없었다.

“시집가는 거 아닐까?”
“그럴 리가 있니.”

같이 밥을 먹던 동무들이 킥킥 웃어댔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걸까?”

영혜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그러자 누군가 대답했다.

“또 다른 학교로 가서 그곳 아이들을 죽도록 닦달해대겠지. 어디 학교인지 몰라도 그 학생들 참 불쌍도 하다.”

영혜는 B사감을 위해 작은 이별 선물을 준비하자고 기숙생들 몇에게 말을 꺼내보았지만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 웬 유난이냐는 반응뿐이었다. 그랬다. B사감은 그렇게도 덕이 없는 사람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따금 그녀가 실제보다 나은 사람으로 기억 속에서 떠오르곤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B사감이 서둘러 떠난 자리는 얼마간 비어 있다가 새 사람으로 채워졌다. 새로운 사감은 온화한 여성이었다. 남자라 해도 가족이나 친척이면 면회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터무니없이 까다롭던 규칙도 완화되었다. 영혜는 곧 졸업해서 기숙사를 떠났다. 결혼을 하자마자 책과 멀어졌고, 아이들을 낳았고, 거짓말처럼 해방이 되었다. 어수선하고 불안하던 나날이 이어지다 전쟁이 터졌다. 그 전쟁에서 영혜는 남편과 외아들을 잃었다.
영혜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곡절 많은 시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굶주림과 억울한 죽음이 많은 시기였고, 눈물이 끊이지 않는 시기였다. 영혜 자신도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서서히,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린 게 언제였더라. 영혜는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따금 한 번씩 B사감이, 그날 밤 사감실에서 목격한 1인극이 떠오를 때마다 궁금해지곤 했다. 그녀는 왜 그렇게도 포악하게 굴었던 걸까? 남자라면 치를 떨곤 했는데. 사랑받지 못해 속상한 마음에 분풀이를 했던 걸까? 남자는 사탄이라는 교육에 어릴 때부터 세뇌되었던 걸까? 부모 없이 교회에 맡겨져 자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혹시 어린 나이에 남자에게 버림받은 경험이라도 있었던가?
가설에 맞춰 기억 속 그녀의 모습이 달라졌고, 그러면 떠오르는 일화도 달라졌다. 하지만 결국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이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남아 있는 건 40년 전 그날 밤 그녀의 애절하던 몸짓, 처절하던 몸짓뿐.
피아노 반주 소리에 영혜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설교가 끝나고 단상이 비어 있었다. 김영혜는 돋보기를 끼고 손에 침을 발라 찬송가 책장을 넘겼다. 여학교 시절 자주 불렀던 찬송가 곡이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귀한 그 말씀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 영혜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사이 B사감의 이야기는 기억의 뒤편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