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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의 시학
글 신문수 ㅣ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 미국문학 교수. 1952년생
저서 『타자의 초상: 인종주의와 문학』 『시간의 노상에서 1, 2』 『‘모비딕’ 읽기의 즐거움』『미국의 자연관 변천과 생태의식』(편서) 『미국 흑인문학의 이해』(편서),
역서 『자연』 『문학 속의 언어학』 『빛을 보다』(공역서), 산문집 『풍경, 혹은 마음의 풍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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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임지에 나가 있는 남편으로부터 편지가 왔다기에 급히 뜯어보니 봉함 안에는 다만 한 장의 백지가 들어 있을 뿐이다. 아내는 백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답서를 써 보냈다.
푸른 창 아래서 봉함 편지를 열어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텅 빈 백지뿐이네요,
이는 아마 님께서 이별의 정한에 겨워
말없이 그리운 마음 담아 전하신 것이 아닌지요.
碧沙窓下啓緘封
尺紙終頭徹尾空
應是仙郞懷別恨
憶人全在不言中
청나라 때 문인 원매(袁枚)의 『수원시화』(隋園詩話)에 나오는 곽휘원(郭暉遠)과 그의 아내의 이야기이다. 외지의 남편은 필시 아내에게 보낼 편지를 써 놓고 실수로 백지를 넣은 것이리라. 그러나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그녀는 남편이 편지를 썼으나 글이 자신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편지를 찢어버리고 그냥 백지를 넣어서 보낸 것이라고 헤아리고 있다. 아내에게 백지는 실수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표현할 길이 없는 지극한 애모의 정을 표상한다. 오늘의 시각으로 말하면 곽휘원은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차라리 침묵을, 곧 묵언의 언어를 구사한 것이고 아내는 이심전심으로 그 묵언에 화답한 것이다. 경위야 어쨌든 실로 가슴 뭉클한 백지의 대화이다.
여기에서 백지는 언어를 초월한 언어요, 마음을 전하는 불립문자이다. 백지는 공(空)이면서 모든 것을 포회할 수 있는 잠재적 충만이기도 하다. 백지는 비어 있으나 이미 상상의 화면인 것이다. 불가의 표현을 빌면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다. 백자 항아리가 왜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인가?내부의 허허로움이 밖으로 표현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 아닐까. 텅 비어 있는 항아리는 이미 충만의 예감으로 가득 차 있는데 흰색 표면은 비어 있음과 충만이라는 이 양면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파스칼이 말한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도 마찬가지이다. 그 침묵은 신의 벽력같은 음성을 내포하고 있는 하얀 적묵(寂黙)이기에 두려운 것이다. 동양화에서 강조하는 의재필선(意在筆先)의 정신도 백지를 공/충만이라는 변증적 시각으로 보아온 전통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백지의 양의성은 결국 백색의 다의적 상징성에서 비롯된다. 허만 멜빌이 쓴 『모비딕』은 백색의 상징성에 대한 탁월한 성찰을 보여준다. 괴력의 흰 고래 모비딕이 불러일으키는 복합적인 감정이 바로 흔치 않은 백색의 외양으로 말미암는다고 생각 한 소설가는 흰색이 자극하는 다양한 심리 현상을 거론한 후 마지막에 이르러 이렇게 쓰고 있다:
“흰색은 본질적으로 색깔이라기보다 색깔의 가시적 부재인 동시에 모든 색깔이 응집된 상태가아닐까? 넓은 설경이 아무것도 없는 공백이지만 그렇게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까? 무색이면서도 모든 색깔이 함축된 무신론 같아서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는 것일까?” 요컨대 백색은 색깔의 부재 상태이면서 동시에 모든 색깔의 응집이라는 것이다. 백색광에 대해서도 두 가지 시각이 있어 왔다. 뉴턴은 모든 빛깔의 혼합이 백색광이라고 주장한 반면 후대의 괴테는 백색광은 어떤 색의 빛도 포함하지 않은 단순광이라는 시각을 보였다. 백색이 내포하는 이 같은 양의성이 바로 백지의 시학을 말해 볼 수 있는 근거이다.
우리 문단에도 백지에 매료된 시인들이 있었다. 우리 시사에서 이른바 백지시를 처음 선 보인 사람은 광주의 무등산 시인 범대순이다. 그는 1974년 《현대시학》 10월호에 발표한 13편의 시 가운데 하나로 백지를 끼어 넣고 그것이 표현으로서 한 편의 시이고 자신의 창작임을 선언했다. 범대순은 이후 『기계와 백지시』라는 시론서에서 보다 자세하게 백지시의 의의를 밝히며 백지의 시학을 정립하고자 했다. 시인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백지시를 쓰도록 충동한 것은 자기 파괴 혹은 자기 부정의 욕망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자신의 존재양태를 재검토하고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의 길을 구축하고자 하는 결의로서 백지시를 하나의 공안으로 꺼내 든 것이다.
다시 말해 백지는 이전의 모든 것을 회칠하고 그 위에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정립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그것이 개인으로서 실존적 위기의 소산일 뿐만 아니라 시인으로서 시적쇄신에 대한 열망의 발현임을 표명하고 있다. 더불어 그는 자기 부정의 정신이 예술의 본질임을환기시킨다. 그러기에 거기에 언어의 한계를 의식하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가 함께 하지만 그 쇄신의 결의는 언어의 타락을 부채질하는 시대에 대한 분노로부터 촉발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오늘의 시대를 산문시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잡문 속물시대”로 규정하고, 이러한 세태에 대한 “강력한 저주로써 강력한 도전으로써” 백지시를 생각한 것이라고 밝힌다. 다시 말해 백지시는 참된 시심의 회복을 요구하는 무언의 함성이다. 그것은 또한 표현에 앞서서 시 정신 그 자체를 더 중시하는 동양 시문학의 일반 전통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범대순에게 백지시는 현재적 삶에 대한 부정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계시의 장이기도 하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절대적 힘을 가지고 잘못된 것을 부정 정리하는 힘, 모든 것의 부정, 그 위에 건립할 옳고 바르고 의로운 가치 즉 이데아와 같은 그런 절대적 가치의 통찰, 생명력과 같은 것, 자유와 같은 것,진리와 같은 것, 그런 것들이 살 수 있는 계시의 장인 것입니다.
- 『범대순 전집』 8권, p. 19
그가 훗날 스스로 절구(絶句)라고 명명한 엄격히 정형화된 시세계를 열어간 것은 이 계시의 약속을 지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범대순의 이른바 ‘말년의 양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8행 8음보 20
음절의 이 특이한 절구 형식의 시들로만 엮어진 『아름다운 가난』과 『세기말 길들이기』를 들여다보면 그의 자기 쇄신이 결국 서구적 감수성에서 동양적 정신으로 회귀를 뜻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범대순의 뒤를 이어 순수시의 주창자 김춘수 또한 만년에 백지시를 실험했다. 그는 2004년에 발간된 유고시집 『달개비꽃』의 두 면을 묵언의 백지로 채우고 면의 끝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부기하고 있다: “말라르메는 백지의 공포라고 했다. 백지 한 장에 완벽한 세계를 그려 넣어야 한다는 그 강박감을 말한 것이리라, 나의 백지는 말라르메와는 다르다. 언어로부터의 해방, 의식으로 부터의 해방이다. 해방(백지)이 주는 불안을 독자도 나와 함께 느낄 수 있을까?” 주지하듯 말라르메를 비롯한 모더니스트 시인들은 감각과 형식이 합치되는 ‘충일한 언어(la parole pleine)’를 지향해 왔다. 말라르메를 사로잡은 백지의 공포는 김춘수가 이해한 대로 자기충족적인 언어에 대한 희구와 그 도달불가능성의 낙차에서 비롯되는 불안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말라르메에게 백지는 완벽한 그림을 그려 넣으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대여(大餘) 김춘수에게 그것은 언어와 의식의 지평을 벗어난 공(空)의 표상이다. 그것은 언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된 세계이다. 시인은 그러나 그 세계가 유토피아적 피안, 곧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해방감과 동시에 불안감을 느낀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곧 언어로 명명되기 전에,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선언했던 시인이 죽음을 앞둔 말년에 이르러 언어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길 꿈꾸며 무언의 백지를 최상의 시로 간주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김춘수의 백지시는 범대순의 그것처럼 새로운 언어적 계시의 가능성이라기보다는 언어를 탁마하는 시업의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상기시키면서 언어의 감옥을 넘어선 불립문자의 세계로의 비상을 꿈꾸는 디딤돌로 비친다. 그가 써온 순수시 혹은 무의미시가 친숙한 의미 체계를 교란시키고 상식의 허를 찌르는 선시적 요소가 다분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가 만년에 언어도단의 백지시에 이끌린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두 시인의 백지시는 새삼 예술에서 여백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백지시에 대한 두 시인의의도가 무엇이든, 그것은 그들의 작품 세계 전체에서 동양화의 여백과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동양화에서 여백은 그냥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형상을 자리잡아주고 그림 전체에 조화와 깊이를 부여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동양화에서 화가는 여백을 음미하기 위해 형상을 그린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서예에서 강조하는 지백수흑(知白守黑)의 원리도 마찬가지이다. 흰 여백의 공간을 잘 헤아리고 검은 먹의 경계를 적절히 지킬 때 글씨는 생기가 넘치면서도 깊이와 여운을 지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 시인에게 백지시는 그것으로 그들이 이룩한 시세계 전체를 가늠하고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여운이자 여백과 같은 것이다.
상허 이태준 또한 백지의 시학을 거론하면서 떠오르는 인물이다. 백지를 한 편의 작품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상허는 백지와 같은 흰 벽면에 매혹된 작가였다. 그가 남긴 수필집 『무서록』은 “물속처럼 고요한 벽면”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착을 토로하는 「벽」이라는 수필로 시작된다. 그는 누구의 집이든 “넓고 멀찍하고 광선이 간접으로 어리는” 벽면을 가진 방을 보면 탐이 난다고 썼다. 그는 그런 벽면을 “좋은” 벽면이라고 형용한다. 상허가 말하는 좋은 벽면은 필시 거기에 아무 것도 걸려 있지 않은 그러면서 은은하게 빛이 반사되는 흰 벽면일 것이다. 그는 입원한 화가“K군”을 병문안 가서도 “여백인 채 사막처럼 비어” 있는 흰 벽면에 눈이 먼저 간다. 그는 이런 벽면에 “낡은 그림 한 폭 걸어 놓고 혼자 바라보”거나 “더러는 좋은 친구와 함께 바라보며 화제 없는 이야기로 날 어둡는 줄 모르”게 즐기기를 소망한다. 고담한 상허의 수필은 한 편 한 편이 이처럼 고요하고 은은한 흰 벽면에 걸려 있는 낡은 그림을 즐기는 마음으로 쓰여진 것이리라.
상허는 또한 “불 없는 캄캄한 밤”을 좋아하였다. 일본으로부터 귀국 길에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오다가 더러 고장이 나서 야밤에 깜깜한 곳에 기차가 불시 정차라도 하면 그 어둠의 공간이 마치 고향처럼 아늑하게 느껴지곤 했다고 그는 술회한다. 그런 어둠이 좋아서 동경 유학시절에 친구들과 “불 없이 노는 회(會)”를 만들어 즐겼다고 「밤」이라는 수필에서 적고 있다. 그가 어둠을 좋아한 것은 흰 벽면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만공(滿空)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리라. “벽에 걸린 사진에서 어머님 얼굴을 데려가 버리고” 책상 위에 놓인 “눈을 크게 뜨던 꽃송이도 감겨 버리는” 어둠은 모든 것을 무화시킨다. 그는 이 부재의 공간을 채워 넣는 상상의 유희를 즐겼다. 모든 것이 적멸하는 어둠 속에서 그는 자신이 마치 “심산에 옮겨”진 것처럼 느끼면서 “찾아올 꿈”을 기다리곤 한다고 쓰고 있다. 흰 벽면이든 캄캄한 어둠의 공간이든 상허에게 그것은 비어 있으면서 또한 무엇인가로 채워지길 기다리는 매혹의 공간인 것이다.
가득찬 그릇은 더 이상 담을 수가 없다. 새로운 것을 담으려면 비워야 한다. 사설이 넘치는 시가 감동을 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암시와 여운이 풍부한 시일수록 마음을 울리고 새로운 통찰을 자극할 수 있다. 예술은 완벽을 추구한다. 그러나 아무리 빈틈없는 형식미를 갖추더라도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면 예술은 의미 없는 제스처에 불과하다. 빈자리가 있어 여운이 느껴질 때 예술은 감동의 메아리를 불러 올 수 있는 법이다. 이것이 어찌 예술에만 해당되는 것이랴. 우리 삶의 경우도 어떤 때는 단호한 결단과 거침없는 행동이 요구되지만 때로 물러서서 침잠하고 정관하는 여백의 마음가짐도 중요하다.
백지의 시학이 새삼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우리 시대가 모든 것이 차고 넘치는 과잉의 시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방에 정보가 넘치고 오감을 자극하는 유혹의 미끼가 널려 있다. 우리의 일상은 밀려드는 정보와 데이터와 이미지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우리는 나날의 삶을 정신없이 바쁘게 만드는 디지털 접속의 세계로부터 잠시 물러서서 실제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삶의 여백을 갖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백지의 시학은 디지털 미디어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영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