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무방과 들병이와 장삼이사들을 만나다-김유정의 실레이야기마을
지식산업의 중심, 출판의 안과 밖 해방 후 상업출판사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네 가지 전략 전집(全集), ‘모두’를 모아 읽게 해주려는 로망 순문학의 죽음과 이야기의 탄생
조선 재건에 헌신한 농사꾼 출신 영의정의 궤적-김육의 『잠곡유고』
문학의 풍경 자동차 이력서 진실은 반박당하기 쉽다 낙서의 기술
수상작 선정｜ 어둠 속에도 빛을 발한 2015 한국문학의 별들 제23회 대산문학상 수상자 인터뷰 수상작 리뷰 시 부문｜타국에서 촉발되는 혈연의식과 간절한 언어 수상작 리뷰 소설 부문｜나는 서 있어 이 이야기 앞에 수상작 리뷰 희곡 부문｜'딱 중간에 서는 인생' 의 연대기이자 현대사 수상작 리뷰 번역 부문｜제3세대 번역가의 탄생
나의데뷔작
얼마 전 정찬의 『길 저쪽』을 읽었다. 작가가 청춘기에 통과했던 칠팔십 년대의 군부독재를 해부하며 개인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었나를 치열하게 그린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시대 고발로 그치지 않고 희우라는 인물을 통해 고통과 원한을 정화하면서 사랑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데에 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파우스트의 명제가 떠오르면서 가슴이 먹먹했고 나는 지난 시대의 어둠과 사유에 젖었다.
많은 문인들이 일찍이 작가가 될 준비를 했다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작가를 꿈꾼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다락에 꽂혀있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서 제복 시절엔 찰스 디킨스의 두꺼운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독어 교과서 밑에 놓고 훔쳐 읽었으며, 이 버릇은 대학 때도 이어져 채플시간에 한없이 고개를 숙이고 카프카를 읽었다. 책읽기에 유독 몰입했던 것은 문학이 인생의 바다를 유영하며 삶의 애락을 느끼고 몽상하고 고양하는 나만의 오롯한 시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설을 써본 것은 대학 4학년 때였다. 대학신문의 추계문예현상 공고가 눈을 끌었다. 중편 단편 시 희곡 분야 중 단편소설 상금을 보니 B학점 이상 받을 수 있는 장학금과 합치면 등록금을 낼 수 있는 액수였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일곱 식구가 수유리 두 칸짜리 사글세방으로 쫓겨난 상황이라 나는 손수 등록금을 만들어야 했다.
지금에 비하면 단숨에, 라고 할 정도로 별 가필도 없이 단편을 완성했다. 마감 전날 버스에서 원고가 든 봉투를 잃어버렸지만 복사기 같은 이십대의 기억력으로 다음 날 제출했다.
「빨간넥타이」라는 제목의 이 단편은 휴학기에 카피라이터로 잠시 일했던 광고대행사에서의 체험이 바탕이 되었다. 광고대행사의 유능한 기획부장 태석민이 퇴근 뒤 형의 친구를 만나 그의 문제점을 해결해주고 하루를 마감하려는데 형 친구가 태석민이 미대 시절에 그린 붉은 채색의 동양화를 회상하면서 불현듯 순수의 시대에 사로잡힌다. 귀가 길에 우연히 양품점을 지나다 쇼윈도에서 마주치는 붉은 넥타이.
왠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습작 한번 해보지 않았으니 자신감은 결코 아니었다. 절박한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과연 얼마 뒤 당선 통보를 받았다. 당시 이대 국문과 교수였던 이어령 선생님이 연구실로 오라고 전갈을 보냈다. 심사위원이었고 《문학사상》 주간이었던 선생님은 과찬하면서 《문학사상》 제1회 작가로 데뷔하라며 단편 두 편을 써오라고 했다. 인연의 알 수없는 힘에 이끌려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소설가의 첫발을 그렇게 내딛게 되었다.
데뷔작 「根」과 「오픈게임」은 조직사회의 비정과 허무를 그린 소품이다. 대학 졸업 후 이모부의 알선으로 은행에 취직자리가 마련되었으나 마다하고 막 창간한 아동잡지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2개월 후 잡지가 해체되는 바람에 좌절감을 맛본 경험이 개인과 조직사회의 관계를 생각하도록 했다.
첫 단편에 붙인 「빨간넥타이」라는 제목은 자기 회귀의 상징이다. 대학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 휴학하고, 잠시 경험한 사회도 자기 욕망을 위해 타인을 짓밟는 비정한 세계의 편린이었다. 순수의 대학으로 복교하여 기도하듯 자신과 대면하여 글을 썼는데, 구원처럼 작가의 길이 펼쳐졌다. 삼엄한 유신체제라 대학 대강당에선 철야구국기도회가 열리고, 시국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나는 미대 작업실에서 혼자 밤을 새우며 그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군중은 나의 몫이 아니니 그대들의 촛불기도 속에 내가 앉아있다면 그건 나의 껍데기뿐이리. 황정은 소설의 표현을 빌리면 나는 글로써 나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하나뿐이라는 이름의 부족”이라고. 나는 자신에게 정직하고 싶었다.
나를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이어령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뒤에 작가가 되었을까. 등록금을 마련해야할 가난을 체험하지 않았더라면 소설 같은 건 끝내 써보지 못하고 소시민의 길로 나아갔을지 모르겠다. 다만 나의 정신은 작가든 아니든 내 가슴 속에 언제나 자기회귀의 빨간넥타이가 나부끼고, 마지막 순간까지 회의하고 탐색하면서 본질을 향해 다가가기를 당부한다.
내 가슴 속에 나부끼는 자기회귀의 「빨간넥타이」
글 강석경 ㅣ 소설가. 1951년생
소설 『밤과 요람』 『숲속의 방』 『가까운 골짜기』 『내 안의 깊은 계단』 『미불』 『신성한 봄』,
산문집 『일하는 예술가들』 『인도기행』 『능으로 가는 길』 『저 절로 가는 사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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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문인들이 일찍이 작가가 될 준비를 했다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작가를 꿈꾼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다락에 꽂혀있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서 제복 시절엔 찰스 디킨스의 두꺼운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독어 교과서 밑에 놓고 훔쳐 읽었으며, 이 버릇은 대학 때도 이어져 채플시간에 한없이 고개를 숙이고 카프카를 읽었다. 책읽기에 유독 몰입했던 것은 문학이 인생의 바다를 유영하며 삶의 애락을 느끼고 몽상하고 고양하는 나만의 오롯한 시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설을 써본 것은 대학 4학년 때였다. 대학신문의 추계문예현상 공고가 눈을 끌었다. 중편 단편 시 희곡 분야 중 단편소설 상금을 보니 B학점 이상 받을 수 있는 장학금과 합치면 등록금을 낼 수 있는 액수였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일곱 식구가 수유리 두 칸짜리 사글세방으로 쫓겨난 상황이라 나는 손수 등록금을 만들어야 했다.
지금에 비하면 단숨에, 라고 할 정도로 별 가필도 없이 단편을 완성했다. 마감 전날 버스에서 원고가 든 봉투를 잃어버렸지만 복사기 같은 이십대의 기억력으로 다음 날 제출했다.
「빨간넥타이」라는 제목의 이 단편은 휴학기에 카피라이터로 잠시 일했던 광고대행사에서의 체험이 바탕이 되었다. 광고대행사의 유능한 기획부장 태석민이 퇴근 뒤 형의 친구를 만나 그의 문제점을 해결해주고 하루를 마감하려는데 형 친구가 태석민이 미대 시절에 그린 붉은 채색의 동양화를 회상하면서 불현듯 순수의 시대에 사로잡힌다. 귀가 길에 우연히 양품점을 지나다 쇼윈도에서 마주치는 붉은 넥타이.
왠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습작 한번 해보지 않았으니 자신감은 결코 아니었다. 절박한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과연 얼마 뒤 당선 통보를 받았다. 당시 이대 국문과 교수였던 이어령 선생님이 연구실로 오라고 전갈을 보냈다. 심사위원이었고 《문학사상》 주간이었던 선생님은 과찬하면서 《문학사상》 제1회 작가로 데뷔하라며 단편 두 편을 써오라고 했다. 인연의 알 수없는 힘에 이끌려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소설가의 첫발을 그렇게 내딛게 되었다.
데뷔작 「根」과 「오픈게임」은 조직사회의 비정과 허무를 그린 소품이다. 대학 졸업 후 이모부의 알선으로 은행에 취직자리가 마련되었으나 마다하고 막 창간한 아동잡지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2개월 후 잡지가 해체되는 바람에 좌절감을 맛본 경험이 개인과 조직사회의 관계를 생각하도록 했다.
첫 단편에 붙인 「빨간넥타이」라는 제목은 자기 회귀의 상징이다. 대학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 휴학하고, 잠시 경험한 사회도 자기 욕망을 위해 타인을 짓밟는 비정한 세계의 편린이었다. 순수의 대학으로 복교하여 기도하듯 자신과 대면하여 글을 썼는데, 구원처럼 작가의 길이 펼쳐졌다. 삼엄한 유신체제라 대학 대강당에선 철야구국기도회가 열리고, 시국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나는 미대 작업실에서 혼자 밤을 새우며 그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군중은 나의 몫이 아니니 그대들의 촛불기도 속에 내가 앉아있다면 그건 나의 껍데기뿐이리. 황정은 소설의 표현을 빌리면 나는 글로써 나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하나뿐이라는 이름의 부족”이라고. 나는 자신에게 정직하고 싶었다.
나를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이어령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뒤에 작가가 되었을까. 등록금을 마련해야할 가난을 체험하지 않았더라면 소설 같은 건 끝내 써보지 못하고 소시민의 길로 나아갔을지 모르겠다. 다만 나의 정신은 작가든 아니든 내 가슴 속에 언제나 자기회귀의 빨간넥타이가 나부끼고, 마지막 순간까지 회의하고 탐색하면서 본질을 향해 다가가기를 당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