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무방과 들병이와 장삼이사들을 만나다-김유정의 실레이야기마을
지식산업의 중심, 출판의 안과 밖 해방 후 상업출판사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네 가지 전략 전집(全集), ‘모두’를 모아 읽게 해주려는 로망 순문학의 죽음과 이야기의 탄생
조선 재건에 헌신한 농사꾼 출신 영의정의 궤적-김육의 『잠곡유고』
문학의 풍경 자동차 이력서 진실은 반박당하기 쉽다 낙서의 기술
수상작 선정｜ 어둠 속에도 빛을 발한 2015 한국문학의 별들 제23회 대산문학상 수상자 인터뷰 수상작 리뷰 시 부문｜타국에서 촉발되는 혈연의식과 간절한 언어 수상작 리뷰 소설 부문｜나는 서 있어 이 이야기 앞에 수상작 리뷰 희곡 부문｜'딱 중간에 서는 인생' 의 연대기이자 현대사 수상작 리뷰 번역 부문｜제3세대 번역가의 탄생
단편소설
1.
그를 만난 것은 라스베가스의 한 카지노에 머문 지 한 달이 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2008년 1월20일 저녁이었다. 룰렛 테이블을 지나가다 우연히 그를 보았다. 테가 굵고 검은 안경을 쓴 그는 룰렛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이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청년처럼 보이기도 했고,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얼굴 표정 때문이었다.
도박은 사람의 본성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자극하는 정교한 놀이로,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쾌락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각을 해체시킬 정도로 강렬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쾌락이 보이지 않았다. 쾌락 대신 슬픔이 얼굴에 비쳤다. 물론 다른 표정들이 나타나곤 했지만 슬픔을 밀어내지는 못했다. 슬픔의 투명한 표면으로 미끄러지면서 금방 사라졌다.
내가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칩 열세 개 모두를 홀수에 베팅하고 있었다. 공은 홀수에 떨어졌다. 열세 개 칩이 스물여섯개로 불어났다. 그는 칩 두 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또 홀수에 걸었다. 휠이 돌았다. 공이 떨어진 곳은 홀수 자리였다. 그의 칩이 50개로 불어났다. 그는 이길 확률이 47.37%인 안전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짝수에 걸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그는 칩 두 개를 제외한 모두를 홀수에 걸었다. 홀수가 그의 마음을 계속 끌어당기는 모양이었다. 공은 홀수에 떨어졌다. 그의 칩이 98개로 불어났는데도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여전히 슬픔에 싸여 있었다. 슬픔의 표정으로 조각된 가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자꾸만 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칩 두 개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다음 베팅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가 계속 홀수를 선택할지, 짝수로 바꿀지, 배당률이 높은 곳으로 옮길지 궁금했다. 조금 후 그가 베팅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칩 96개를 숫자 8에 모두 베팅한 것이었다. 그전과는 다른, 가장 과격한 베팅이었다. 맞으면 베팅 금액의 35배를 받는다. 3천4백30개의 칩이 그에게 들어오는 것이다.배당률이 높은 만큼 위험도 그만큼 높다. 그가 이길 확률은 2.63%였다.
그는 손에 든 칩 두 개를 꼭 쥐고 있었다. 문득 그가 쥐고 있는 두 개의 칩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휠이 돌기 시작했다. 나는 공이 8에 떨어지기를 바랐다. 그가 이기면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무척 궁금했다. 공은 그의 선택을 비켜나갔다. 공이 멈춘 곳은 17이었다. 딜러는 그가 베팅한 칩을 모두 쓸어갔다. 손에 든 칩 두 개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의 의식이 꿈의 상태로 빠져들고 있음이 얼굴에 나타나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아는 것은 표정 분석 연구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표정 분석 연구의 선구자인 폴 에크먼의 문하생이다. 나의 스승은 얼굴의 움직임을 체계적으로 묘사한 얼굴 지도를 처음으로 만든 분으로, 이 분야에 관한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 캘리포니아 의과대학 심리학 교수인 그는 FBI CIA 등 심리와 표정과 관련하여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자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내가 카지노에 들어간 것은 표정 연구의 일환이었다.
사람은 동물 가운데 표정을 가장 풍부하게 짓는 존재다. 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은 만 개가 넘는다. 하지만 문명의 발전으로 표정에 제한이 가해지면서 지속적으로 위축되어가다가 어느 시
점부터 사람의 얼굴이 가면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가면의 얼굴은 마음을 숨길 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 마음의 상태와 다른 표정을 짓는다. 그런 가면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가면 뒤에 다른 가면이 있으며, 그 가면 뒤에 또 다른 가면이 있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일수록 더 많은 가면을 요구한다.
카지노는 가면을 벗기는 공간이다. 일상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카지노는 놀이의 세계이다.놀이의 세계에서 가면은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일 뿐이다. 사람의 맨 얼굴을 볼 수 있는 희귀한 공간이 카지노인 것이다. 카지노가 얼굴 연구자에게는 대단히 의미 있는 공간인 까닭은 여기에 있다. 카지노는 ‘얼굴 연구학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내게 객실과 함께 CCTV실 출입증을 제공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나는 그 앞에 서 있었다. 눈빛이 몽롱했다. 꿈의 상태에 있으니 몽롱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은 8이라는 숫자를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군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8월은 저에게 추억의 달이지요.”
“아, 그렇군요.”
“저를 아시는지……”
그의 얼굴에 나를 경계하는 표정이 얼핏 비쳤다.
“선생을 처음 뵙습니다만 선생의 표정이 제 마음을 끌었습니다.”
“제 얼굴이 이상하게 보였나요?”
그는 나를 유심히 보며 물었다. 눈빛은 여전히 몽롱했다.
“표정이 무척 슬퍼 보이더군요. 슬픔에 잠긴 얼굴로 게임을 하는 분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게임 하러 오셨나요?”
“전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그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흠, 얼굴을 연구하는 심리학자이시군요.”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요?”
“전 지금……”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맥주를 마시려 바에 가려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나는 유쾌하게 말했다.
2.
그는 병 채로 맥주를 마셨다. 맛을 음미하는 동안 그의 눈썹이 자주 추켜 올라갔는데, 비스듬히 추켜 올라간 그의 눈썹에서 슬픔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아까 선생이 제가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으셨지요?”
내가 그렇다고 말하자 그는 주머니에서 칩 두 개를 꺼냈다.
“제가 이 칩을 쥐고 있었을 때……”
그는 손 안에 놓인 칩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칩이 작은 물고기처럼 따뜻하더군요. 그러자 물고기의 파닥거리는 감촉이 느껴지면서 물고기의 숨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전 이 물고기들을 룰렛 테이블에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놓고 싶은 곳은 브로크백 마운틴을 적시는 강물입니다. 어느 해 여름 그와 함께 지냈던.”
“그라면……”
“카우보이 청년 잭.”
그는 나직이 말했다.
“그때가 8월이었군요.”
“8월 13일에는 첫눈이 내려 제법 많이 쌓였습니다. 금방 녹아버렸지만.”
“카우보이 청년 잭과의 추억을 잊지 못하시는군요.”
“잭에게 여러 냄새가 났어요. 담배 냄새, 사향 냄새 비슷한 땀 냄새, 풀냄새 같은 희미한 단내…… 그 냄새들 사이로 산의 한기가 떠돌았지요.”
“그 카우보이가 어디론가 떠났군요.”
“멀리 떠났지요. 아주 멀리……”
“그가 죽었나요?”
“네.”
“어떻게 죽었지요?”
“트럭 타이어에 바람 넣다가 타이어가 터져 죽었다고 그의 아내에게 들었습니다.”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군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우보이 청년 잭이 유언을 남겼지요?”
“자신의 유골을 브로크백 마운틴에 뿌려달라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선생은 그의 부모가 사는 집을 찾아 갔구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잭의 방에서 선생은 선생이 잃어버린 줄 알았던 셔츠를 발견하게 되지요.”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선생의 이름은 에니스이군요.”
“에니스 델 마.”
그는 비밀스러운 것을 밝히는 것처럼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에니스는 실재하는 인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의 말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에게는 실재하는 인물입니다.”
“상상의 세계에서는 그렇겠지요.”
“우린 지금 상상의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거울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울 속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거울 속 세계에서는 상상이 곧 현실입니다. 상상극장이니까요. 제 얼굴을 보세요.”
나는 흠칫 놀랐다. 그의 얼굴이 바뀌고 있었다.
“난 준비가 되어 있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절대 지치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죄책감 없이.죄책감을 받아들인 자 한숨짓고, 외로운 오르간 연주자 흐느끼네. 실버 색소폰은 당신을 거부하라고 하고, 깨진 종과 닳아빠진 나팔은 내 얼굴을 경멸하네. 하지만 그게 아니야. 당신을 잃으려태어난 게 아니야. 당신을 갖고 싶어. 사무치게 갖고 싶어. 그대여 갖고 싶어. 내 모든 아버지는 다 사라졌네. 진정한 사랑, 그들에게 없었네. 난 가려네. 어디로 가려는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것으로. 아, 아카폴코로 가려네. 달려가려네.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노래하듯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그전의 목소리와 전혀 달랐다. 바뀐 얼굴의 목소리였다.
“옛날 옛적에 캔디와 댄이 살았습니다. 댄은 캔디를 위해 뭐든지 했죠. 어느 날 밤 침대가 불타올랐습니다. 우린 햇빛과 초콜릿으로 살았어요.”
놀랍게도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도 여자의 얼굴로 바뀌고 있었다.
“우린 기쁨의 진흙에 뒹굴었어요. 네가 내 안에…… 밤이 오면…… 다시는 잘 수가 없어. 물속에괴물이…… 어두운 자연이…… 고양이와…… 닭과 강낭콩…… 침대 옆의 꽃…… 아기는 아침에죽었어요. 그 아이 심장은 북처럼 뛰었어요.”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를 잃은 여자의 눈물이었다.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변신이군요.”
나는 그가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선생의 첫 대사는 처음 듣는 게 아니에요. 제가 밥 딜런을 좋아해 <아임 낫 데어>를 보았거든요. 밥 딜런의 전기 영화가 그런 형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것은 어떤 영화의 대사인지 모르겠어요.”
“<캔디>라는 영화예요. 댄과 캔디라는 젊은 남녀가 사랑의 회오리 속에서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는 청춘 영화이지요.”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후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5년 겨울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양의 냄새
글 정찬 ㅣ 소설가, 1953년생
소설 『기억의 강』 『완전한 영혼』 『아늑한 길』 『베니스에서 죽다』 『희고 둥근달』 『두 생애』 『정결한 집』 『세상의 저녁』 『황금사다리』 『로뎀나무 아래서』『그림자 영혼』 『광야』 『빌라도의 예수』 『유랑자』 『길, 저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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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를 만난 것은 라스베가스의 한 카지노에 머문 지 한 달이 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2008년 1월20일 저녁이었다. 룰렛 테이블을 지나가다 우연히 그를 보았다. 테가 굵고 검은 안경을 쓴 그는 룰렛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이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청년처럼 보이기도 했고,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얼굴 표정 때문이었다.
도박은 사람의 본성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자극하는 정교한 놀이로,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쾌락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각을 해체시킬 정도로 강렬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쾌락이 보이지 않았다. 쾌락 대신 슬픔이 얼굴에 비쳤다. 물론 다른 표정들이 나타나곤 했지만 슬픔을 밀어내지는 못했다. 슬픔의 투명한 표면으로 미끄러지면서 금방 사라졌다.
내가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칩 열세 개 모두를 홀수에 베팅하고 있었다. 공은 홀수에 떨어졌다. 열세 개 칩이 스물여섯개로 불어났다. 그는 칩 두 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또 홀수에 걸었다. 휠이 돌았다. 공이 떨어진 곳은 홀수 자리였다. 그의 칩이 50개로 불어났다. 그는 이길 확률이 47.37%인 안전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짝수에 걸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그는 칩 두 개를 제외한 모두를 홀수에 걸었다. 홀수가 그의 마음을 계속 끌어당기는 모양이었다. 공은 홀수에 떨어졌다. 그의 칩이 98개로 불어났는데도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여전히 슬픔에 싸여 있었다. 슬픔의 표정으로 조각된 가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자꾸만 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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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칩 두 개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다음 베팅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가 계속 홀수를 선택할지, 짝수로 바꿀지, 배당률이 높은 곳으로 옮길지 궁금했다. 조금 후 그가 베팅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칩 96개를 숫자 8에 모두 베팅한 것이었다. 그전과는 다른, 가장 과격한 베팅이었다. 맞으면 베팅 금액의 35배를 받는다. 3천4백30개의 칩이 그에게 들어오는 것이다.배당률이 높은 만큼 위험도 그만큼 높다. 그가 이길 확률은 2.63%였다.
그는 손에 든 칩 두 개를 꼭 쥐고 있었다. 문득 그가 쥐고 있는 두 개의 칩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휠이 돌기 시작했다. 나는 공이 8에 떨어지기를 바랐다. 그가 이기면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무척 궁금했다. 공은 그의 선택을 비켜나갔다. 공이 멈춘 곳은 17이었다. 딜러는 그가 베팅한 칩을 모두 쓸어갔다. 손에 든 칩 두 개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의 의식이 꿈의 상태로 빠져들고 있음이 얼굴에 나타나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아는 것은 표정 분석 연구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표정 분석 연구의 선구자인 폴 에크먼의 문하생이다. 나의 스승은 얼굴의 움직임을 체계적으로 묘사한 얼굴 지도를 처음으로 만든 분으로, 이 분야에 관한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 캘리포니아 의과대학 심리학 교수인 그는 FBI CIA 등 심리와 표정과 관련하여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자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내가 카지노에 들어간 것은 표정 연구의 일환이었다.
사람은 동물 가운데 표정을 가장 풍부하게 짓는 존재다. 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은 만 개가 넘는다. 하지만 문명의 발전으로 표정에 제한이 가해지면서 지속적으로 위축되어가다가 어느 시
점부터 사람의 얼굴이 가면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가면의 얼굴은 마음을 숨길 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 마음의 상태와 다른 표정을 짓는다. 그런 가면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가면 뒤에 다른 가면이 있으며, 그 가면 뒤에 또 다른 가면이 있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일수록 더 많은 가면을 요구한다.
카지노는 가면을 벗기는 공간이다. 일상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카지노는 놀이의 세계이다.놀이의 세계에서 가면은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일 뿐이다. 사람의 맨 얼굴을 볼 수 있는 희귀한 공간이 카지노인 것이다. 카지노가 얼굴 연구자에게는 대단히 의미 있는 공간인 까닭은 여기에 있다. 카지노는 ‘얼굴 연구학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내게 객실과 함께 CCTV실 출입증을 제공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나는 그 앞에 서 있었다. 눈빛이 몽롱했다. 꿈의 상태에 있으니 몽롱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은 8이라는 숫자를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군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8월은 저에게 추억의 달이지요.”
“아, 그렇군요.”
“저를 아시는지……”
그의 얼굴에 나를 경계하는 표정이 얼핏 비쳤다.
“선생을 처음 뵙습니다만 선생의 표정이 제 마음을 끌었습니다.”
“제 얼굴이 이상하게 보였나요?”
그는 나를 유심히 보며 물었다. 눈빛은 여전히 몽롱했다.
“표정이 무척 슬퍼 보이더군요. 슬픔에 잠긴 얼굴로 게임을 하는 분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게임 하러 오셨나요?”
“전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그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흠, 얼굴을 연구하는 심리학자이시군요.”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요?”
“전 지금……”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맥주를 마시려 바에 가려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나는 유쾌하게 말했다.
2.
그는 병 채로 맥주를 마셨다. 맛을 음미하는 동안 그의 눈썹이 자주 추켜 올라갔는데, 비스듬히 추켜 올라간 그의 눈썹에서 슬픔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아까 선생이 제가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으셨지요?”
내가 그렇다고 말하자 그는 주머니에서 칩 두 개를 꺼냈다.
“제가 이 칩을 쥐고 있었을 때……”
그는 손 안에 놓인 칩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칩이 작은 물고기처럼 따뜻하더군요. 그러자 물고기의 파닥거리는 감촉이 느껴지면서 물고기의 숨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전 이 물고기들을 룰렛 테이블에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놓고 싶은 곳은 브로크백 마운틴을 적시는 강물입니다. 어느 해 여름 그와 함께 지냈던.”
“그라면……”
“카우보이 청년 잭.”
그는 나직이 말했다.
“그때가 8월이었군요.”
“8월 13일에는 첫눈이 내려 제법 많이 쌓였습니다. 금방 녹아버렸지만.”
“카우보이 청년 잭과의 추억을 잊지 못하시는군요.”
“잭에게 여러 냄새가 났어요. 담배 냄새, 사향 냄새 비슷한 땀 냄새, 풀냄새 같은 희미한 단내…… 그 냄새들 사이로 산의 한기가 떠돌았지요.”
“그 카우보이가 어디론가 떠났군요.”
“멀리 떠났지요. 아주 멀리……”
“그가 죽었나요?”
“네.”
“어떻게 죽었지요?”
“트럭 타이어에 바람 넣다가 타이어가 터져 죽었다고 그의 아내에게 들었습니다.”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군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우보이 청년 잭이 유언을 남겼지요?”
“자신의 유골을 브로크백 마운틴에 뿌려달라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선생은 그의 부모가 사는 집을 찾아 갔구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잭의 방에서 선생은 선생이 잃어버린 줄 알았던 셔츠를 발견하게 되지요.”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선생의 이름은 에니스이군요.”
“에니스 델 마.”
그는 비밀스러운 것을 밝히는 것처럼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에니스는 실재하는 인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의 말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에게는 실재하는 인물입니다.”
“상상의 세계에서는 그렇겠지요.”
“우린 지금 상상의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거울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울 속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거울 속 세계에서는 상상이 곧 현실입니다. 상상극장이니까요. 제 얼굴을 보세요.”
나는 흠칫 놀랐다. 그의 얼굴이 바뀌고 있었다.
“난 준비가 되어 있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절대 지치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죄책감 없이.죄책감을 받아들인 자 한숨짓고, 외로운 오르간 연주자 흐느끼네. 실버 색소폰은 당신을 거부하라고 하고, 깨진 종과 닳아빠진 나팔은 내 얼굴을 경멸하네. 하지만 그게 아니야. 당신을 잃으려태어난 게 아니야. 당신을 갖고 싶어. 사무치게 갖고 싶어. 그대여 갖고 싶어. 내 모든 아버지는 다 사라졌네. 진정한 사랑, 그들에게 없었네. 난 가려네. 어디로 가려는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것으로. 아, 아카폴코로 가려네. 달려가려네.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노래하듯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그전의 목소리와 전혀 달랐다. 바뀐 얼굴의 목소리였다.
“옛날 옛적에 캔디와 댄이 살았습니다. 댄은 캔디를 위해 뭐든지 했죠. 어느 날 밤 침대가 불타올랐습니다. 우린 햇빛과 초콜릿으로 살았어요.”
놀랍게도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도 여자의 얼굴로 바뀌고 있었다.
“우린 기쁨의 진흙에 뒹굴었어요. 네가 내 안에…… 밤이 오면…… 다시는 잘 수가 없어. 물속에괴물이…… 어두운 자연이…… 고양이와…… 닭과 강낭콩…… 침대 옆의 꽃…… 아기는 아침에죽었어요. 그 아이 심장은 북처럼 뛰었어요.”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를 잃은 여자의 눈물이었다.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변신이군요.”
나는 그가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선생의 첫 대사는 처음 듣는 게 아니에요. 제가 밥 딜런을 좋아해 <아임 낫 데어>를 보았거든요. 밥 딜런의 전기 영화가 그런 형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것은 어떤 영화의 대사인지 모르겠어요.”
“<캔디>라는 영화예요. 댄과 캔디라는 젊은 남녀가 사랑의 회오리 속에서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는 청춘 영화이지요.”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후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5년 겨울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