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무방과 들병이와 장삼이사들을 만나다-김유정의 실레이야기마을
지식산업의 중심, 출판의 안과 밖 해방 후 상업출판사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네 가지 전략 전집(全集), ‘모두’를 모아 읽게 해주려는 로망 순문학의 죽음과 이야기의 탄생
조선 재건에 헌신한 농사꾼 출신 영의정의 궤적-김육의 『잠곡유고』
문학의 풍경 자동차 이력서 진실은 반박당하기 쉽다 낙서의 기술
수상작 선정｜ 어둠 속에도 빛을 발한 2015 한국문학의 별들 제23회 대산문학상 수상자 인터뷰 수상작 리뷰 시 부문｜타국에서 촉발되는 혈연의식과 간절한 언어 수상작 리뷰 소설 부문｜나는 서 있어 이 이야기 앞에 수상작 리뷰 희곡 부문｜'딱 중간에 서는 인생' 의 연대기이자 현대사 수상작 리뷰 번역 부문｜제3세대 번역가의 탄생
단편소설
김수정이 그동안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이상한 남자는 윤이었다. 그녀는 필자 섭외를 위해 윤을 처음 만났다. 윤은 프리랜서 큐레이터로 블로그에 미술에 관한 잡다한 글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이었다. 미술과 개. 여기서 개는 도그(dog)가 아니라 피스(piece)였다. 한 개 두 개 석 삼 너구리 할 때의 그 개 말이다. 그건 회화나(주로 회화였다) 조각, 설치 미술 등에 등장하는수에 관한 글이었다. 예를 들어 유명한 현대작가인 현석경의 작품에는 ‘3’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사과가 세 개 나오고 세 줄로 된 블루 스트라이프가 쓰인다, 인물의 손가락은 주로 세 개만 보이며 시선은 세 초점으로 나뉘어 있다. 왜 그런가? 결론은 좀 빤했다. 균형이나 완전체에 대한 갈망 뭐 그런 것이었다. 독특한 것도 있었다. 역시 현석경의 작품에는 ‘8’의 모티프가 나오는데 그것은 앞의 것처럼 단순하게 개수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두 원이 연이어 붙어 있는 이미지로 보인다. 8은 8이 아니라 무한대의 ∞, 끝없음, 영속에 대한 갈망이다.
사실 윤의 블로그를 보고 인상을 받은 사람은 김수정이 아니라 팀장이었다. 그날 다른 미팅이 갑자기 잡히는 바람에 그녀가 나간 것이었다. 윤을 만나고 나서 김수정은 똥 밟았다고 생각했다. 만나본 필자가 그리 실력도 없는 또라이라면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라서 똥 밟은 것이고 또라이인데 글을 잘 쓴다면 이후 작업의 고난이 불 보듯 빤하니 똥 밟은 것인데 윤의 경우는 둘 다였다. 무엇보다 그 종잡을 수 없는 성정이 문제였다.
윤과 처음 만난 날 김수정은 종로에서 인사동을 거쳐 대학로까지 끌려 다녔다. 차 한 잔 하는 것으로 충분한 미팅에서 윤은 김수정에게 저녁을 먹자고 하더니 연극을 같이 보자고 졸랐다. 찻값과 저녁 값은 당연하다는 듯 김수정이 냈고 연극은 윤이 보여주겠다고 했다. 무료 초대권으로 본 그 작품은 수준 이하였다. 영문도 모른 채 큐브에 갇힌 남녀의 심리를 그린 것이었는데 무대,연기, 음악 뭐 하나 괜찮은 것이 없었고 깊이, 깊이, 잠들지 마, 라는 대사만 귀에 남았다. 깊이,깊이, 잠들지 마. 하지만 윤은 잠들었다. 자기가 보자 해놓고 코까지 골았다. 연극이 끝나고 나가는데 스텝들이 윤을 보고는 어, 하고 아는 척을 했다.
“형, 여기 웬일이에요? 아프다더니 다 나았어요?”
묻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친절한데 이상하게 윤은 뾰로통하게 시선을 피했다. 나갈 때는 “허섭스레기 같은 연극 잘 봤다, 니들” 이라고 소리 쳐서 김수정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김수정은 이런 인간과는 작업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디든 신뢰 가는 구석이 없었다.
윤은 뭐랄까, 터지기 직전의 팝콘 같은 사람이었다. 빠르게 정신없이 그리고 흥분에 차서 자기말만 늘어놓았고 연극을 보며 잠들었던 90분 남짓을 빼고는 언제나 흥, 칫, 쳇, 헷, 썅 같은 말로적대와 분노를 드러냈다. 김수정은 초등학생 때 이런 남자애와 짝이 된 적이 있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아이는 언제나 친구들의 관심을 원하면서도 거절당할 것이 두려워 겉돌면서 크고 작은 악의를 드러냈는데, 담임은 그 반에서 가장 차분하고 착한 편이었던 김수정을 옆에 앉힘으로써 골칫거리를 해결하려고 했다. 김수정은 일 년 내내 짝을 하면서 그 남자애의 온갖 패악을 견뎌야 했다. 효과가 있긴 있었는지 어느 순간 남자애는 김수정에게 마음을 열었다. 종업식날에는 김수정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선물까지 건넸다. 작은 자라 두 마리였다. 김수정은 그 자라들을 가져와 방에다 놓고 한참을 들여다본 끝에 자라들이 당장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라들을 보며, 지우개가루를 김수정에게 후—불고 땋은 머리를 잡아당기고 의자에 풀을 붙여놓던 남자애를 떠올리게 될 것이 끔찍했다. 하지만 자라는 당연히 죽지 않았고 그러자 김수정은 죽었으면 하는 마음을 포기하고 열심히 키웠다. 그 자라가 죽은 것은 불과 3년 전, 김수정이 서른 살이 되고 나서였다.
윤은 공교롭게도 김수정과 멀지 않은 도시에 살아서 전철도 함께 타야 했다. 윤의 수다에 지친 김수정에게 윤은 SNS를 하느냐, 아이디는? 블로그는? 하고 물었고 몇 번의 조작으로 김수정의 온라인 사회관계망의 친구와 팔로워가 되었다. 김수정은 일 관계로 만난 사람들과 그런 친분을 맺고 싶지 않았지만 책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그런 과도한 친교활동까지 해야 하느냐고 생각하면서도 필자를 만나면 어느덧 팔로우를 하고 친구로 추가해 좋아요를 성실히 누르고 있었다. 김수정은 편집자 일이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 게 아닐까, 종종 생각했다.
김수정은 그저 조용히 활자나 다루면서 고독하지만 생산적으로 인생을 보내고 싶을 뿐이었는데.윤은 다행히 얼마 안 가 먼저 내렸다. 김수정이 정작 계약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나서 “책을 낼 의향은 있는 거죠?” 확인하자 윤은 안 가르쳐주지, 했다. “그래야 또 만나줄 거 아냐, 잘 가, 자기.” 윤은 양팔을 들어 과장되게 인사하면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 다음 날 회의시간에 김수정은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윤은 분명 이상한 남자였는데 뭐가 이상한지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김수정은 팀의 막내였고 다들 이삼 년 위의 선배들이었다. 그동안 산전수전을 겪어서인지 김수정이 어떻게 말해도 저자들이 다 그렇잖아, 하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차와 저녁을 사야 했어요, 하면 택시비 달라는 인간도 있어, 했고 내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했어요, 하면 좋잖아, 침묵하는 저자가 더 난처해, 했고 연극을 보러가서는 지인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어요, 했을 때는 그래도 저자가 뭐든 대접해주는 게 어디야, 하는 말을 들었다. 김수정은 선배들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지만 물린 음식을 삼키듯 하고 싶은 말들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김수정은 팀장과 둘이서 윤에게 어떤 원고를 받아올지를 상의했다. 그의 블로그에는 미술과 개뿐 아니라 미술과 식탁, 미술과 담배, 미술과 나쁜 병, 미술과 주얼리, 미술과 커피, 미술과 고양이, 미술과 바퀴 이외에도 수십 개의 카테고리가 있었다. 정작 필자를 만났으면서도 원고에 대한 확답을 받아오지 못해 김수정은 의기소침했다. 김수정이 알아온 것은 윤이 히스테리와 흥분을 팝콘처럼 터뜨리며 했던 시시콜콜한 과거 이야기들밖에 없었으니까. 윤을 따돌렸던 친구들이나 방관했던 교사들, 유학 시절 외국어에 서툰 윤에게 잘못된 정보를 알려주어 곤경에 빠트렸던동기들, 큐레이터를 하면서 만났던 실력 없고 교활한 예술가들과 실력도 없으면서 여기저기 줄을 대어 관장이 된 여자와 남자들에 관한 이야기들 말이다.
심지어 윤은 이런 말까지 했다. 그쪽 출판사에서 그동안 낸 미술책들을 잘 안다, 베스트셀러인그 책들 중에는 사실상 내가 쓰다시피 한 책들도 있다. 큐레이터로 일할 때 바쁜 관장을 대신해자료 수집을 해주었는데 나중에 보면 적당히 윤문해 출간했더라는 것이다. 더구나 거기에는 윤만이 가지고 있는, 윤이 파리에서 유학하며 힘들게 수집한 자료가 소장자의 출처도 없이 실려 있고. 그 따위로 책을 만들다니 그쪽 출판사도 알조이지만 늦게라도 나를 찾아왔으니 그런 민감한부분을 따지지는 않겠다. 김수정이 망설이다가 그 말을 전하자 팀장은 놀라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그래? 했을 뿐이었다.
“원래 예술가들이 그래, 오리지널리티 같은 것, 그런 것에 대한 망상들이 다 있지.”
“윤은 예술가가 아니잖아요?”
“애호가들, 수집가들은 더 하고.”
그날 김수정은 자기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썼다. 나는 아주 이상한 남자를 최근에 만났는데 왜 이상했는지를 오늘은 까먹고 말았다. 그렇게 휘발된 이상함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인데 이상함의 내용은 텅 비어 있으니 참으로 이상하도다. 그 글에는 세 개의 좋다는 반응이 달렸는데 하나가 윤이었다.
윤을 두 번째 만나던 날, 김수정은 좀 더 단단한 준비를 하고 나갔다. 절대 대화의 목적을 놓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튀는 팝콘들을 주워다 지퍼백에 넣어버리리라, 지퍼를 채우리라, 입에 그냥 지퍼를. 그러다 김수정은 누구 입을 재봉틀로 박아버리겠다는 어느 작가 겸 정치인의 말이 생각났고 자기가 그런 과격한 상상을 했다는 데 자책했다. 김수정은 잠깐 기도하며 용서를 빌었다.
(후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5년 겨울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새 보러 간다
글 김금희 ㅣ 소설가. 1979년생
소설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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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가 세 개 나오고 세 줄로 된 블루 스트라이프가 쓰인다, 인물의 손가락은 주로 세 개만 보이며 시선은 세 초점으로 나뉘어 있다. 왜 그런가? 결론은 좀 빤했다. 균형이나 완전체에 대한 갈망 뭐 그런 것이었다. 독특한 것도 있었다. 역시 현석경의 작품에는 ‘8’의 모티프가 나오는데 그것은 앞의 것처럼 단순하게 개수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두 원이 연이어 붙어 있는 이미지로 보인다. 8은 8이 아니라 무한대의 ∞, 끝없음, 영속에 대한 갈망이다.
사실 윤의 블로그를 보고 인상을 받은 사람은 김수정이 아니라 팀장이었다. 그날 다른 미팅이 갑자기 잡히는 바람에 그녀가 나간 것이었다. 윤을 만나고 나서 김수정은 똥 밟았다고 생각했다. 만나본 필자가 그리 실력도 없는 또라이라면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라서 똥 밟은 것이고 또라이인데 글을 잘 쓴다면 이후 작업의 고난이 불 보듯 빤하니 똥 밟은 것인데 윤의 경우는 둘 다였다. 무엇보다 그 종잡을 수 없는 성정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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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과 처음 만난 날 김수정은 종로에서 인사동을 거쳐 대학로까지 끌려 다녔다. 차 한 잔 하는 것으로 충분한 미팅에서 윤은 김수정에게 저녁을 먹자고 하더니 연극을 같이 보자고 졸랐다. 찻값과 저녁 값은 당연하다는 듯 김수정이 냈고 연극은 윤이 보여주겠다고 했다. 무료 초대권으로 본 그 작품은 수준 이하였다. 영문도 모른 채 큐브에 갇힌 남녀의 심리를 그린 것이었는데 무대,연기, 음악 뭐 하나 괜찮은 것이 없었고 깊이, 깊이, 잠들지 마, 라는 대사만 귀에 남았다. 깊이,깊이, 잠들지 마. 하지만 윤은 잠들었다. 자기가 보자 해놓고 코까지 골았다. 연극이 끝나고 나가는데 스텝들이 윤을 보고는 어, 하고 아는 척을 했다.
“형, 여기 웬일이에요? 아프다더니 다 나았어요?”
묻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친절한데 이상하게 윤은 뾰로통하게 시선을 피했다. 나갈 때는 “허섭스레기 같은 연극 잘 봤다, 니들” 이라고 소리 쳐서 김수정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김수정은 이런 인간과는 작업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디든 신뢰 가는 구석이 없었다.
윤은 뭐랄까, 터지기 직전의 팝콘 같은 사람이었다. 빠르게 정신없이 그리고 흥분에 차서 자기말만 늘어놓았고 연극을 보며 잠들었던 90분 남짓을 빼고는 언제나 흥, 칫, 쳇, 헷, 썅 같은 말로적대와 분노를 드러냈다. 김수정은 초등학생 때 이런 남자애와 짝이 된 적이 있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아이는 언제나 친구들의 관심을 원하면서도 거절당할 것이 두려워 겉돌면서 크고 작은 악의를 드러냈는데, 담임은 그 반에서 가장 차분하고 착한 편이었던 김수정을 옆에 앉힘으로써 골칫거리를 해결하려고 했다. 김수정은 일 년 내내 짝을 하면서 그 남자애의 온갖 패악을 견뎌야 했다. 효과가 있긴 있었는지 어느 순간 남자애는 김수정에게 마음을 열었다. 종업식날에는 김수정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선물까지 건넸다. 작은 자라 두 마리였다. 김수정은 그 자라들을 가져와 방에다 놓고 한참을 들여다본 끝에 자라들이 당장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라들을 보며, 지우개가루를 김수정에게 후—불고 땋은 머리를 잡아당기고 의자에 풀을 붙여놓던 남자애를 떠올리게 될 것이 끔찍했다. 하지만 자라는 당연히 죽지 않았고 그러자 김수정은 죽었으면 하는 마음을 포기하고 열심히 키웠다. 그 자라가 죽은 것은 불과 3년 전, 김수정이 서른 살이 되고 나서였다.
윤은 공교롭게도 김수정과 멀지 않은 도시에 살아서 전철도 함께 타야 했다. 윤의 수다에 지친 김수정에게 윤은 SNS를 하느냐, 아이디는? 블로그는? 하고 물었고 몇 번의 조작으로 김수정의 온라인 사회관계망의 친구와 팔로워가 되었다. 김수정은 일 관계로 만난 사람들과 그런 친분을 맺고 싶지 않았지만 책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그런 과도한 친교활동까지 해야 하느냐고 생각하면서도 필자를 만나면 어느덧 팔로우를 하고 친구로 추가해 좋아요를 성실히 누르고 있었다. 김수정은 편집자 일이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 게 아닐까, 종종 생각했다.
김수정은 그저 조용히 활자나 다루면서 고독하지만 생산적으로 인생을 보내고 싶을 뿐이었는데.윤은 다행히 얼마 안 가 먼저 내렸다. 김수정이 정작 계약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나서 “책을 낼 의향은 있는 거죠?” 확인하자 윤은 안 가르쳐주지, 했다. “그래야 또 만나줄 거 아냐, 잘 가, 자기.” 윤은 양팔을 들어 과장되게 인사하면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 다음 날 회의시간에 김수정은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윤은 분명 이상한 남자였는데 뭐가 이상한지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김수정은 팀의 막내였고 다들 이삼 년 위의 선배들이었다. 그동안 산전수전을 겪어서인지 김수정이 어떻게 말해도 저자들이 다 그렇잖아, 하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차와 저녁을 사야 했어요, 하면 택시비 달라는 인간도 있어, 했고 내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했어요, 하면 좋잖아, 침묵하는 저자가 더 난처해, 했고 연극을 보러가서는 지인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어요, 했을 때는 그래도 저자가 뭐든 대접해주는 게 어디야, 하는 말을 들었다. 김수정은 선배들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지만 물린 음식을 삼키듯 하고 싶은 말들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김수정은 팀장과 둘이서 윤에게 어떤 원고를 받아올지를 상의했다. 그의 블로그에는 미술과 개뿐 아니라 미술과 식탁, 미술과 담배, 미술과 나쁜 병, 미술과 주얼리, 미술과 커피, 미술과 고양이, 미술과 바퀴 이외에도 수십 개의 카테고리가 있었다. 정작 필자를 만났으면서도 원고에 대한 확답을 받아오지 못해 김수정은 의기소침했다. 김수정이 알아온 것은 윤이 히스테리와 흥분을 팝콘처럼 터뜨리며 했던 시시콜콜한 과거 이야기들밖에 없었으니까. 윤을 따돌렸던 친구들이나 방관했던 교사들, 유학 시절 외국어에 서툰 윤에게 잘못된 정보를 알려주어 곤경에 빠트렸던동기들, 큐레이터를 하면서 만났던 실력 없고 교활한 예술가들과 실력도 없으면서 여기저기 줄을 대어 관장이 된 여자와 남자들에 관한 이야기들 말이다.
심지어 윤은 이런 말까지 했다. 그쪽 출판사에서 그동안 낸 미술책들을 잘 안다, 베스트셀러인그 책들 중에는 사실상 내가 쓰다시피 한 책들도 있다. 큐레이터로 일할 때 바쁜 관장을 대신해자료 수집을 해주었는데 나중에 보면 적당히 윤문해 출간했더라는 것이다. 더구나 거기에는 윤만이 가지고 있는, 윤이 파리에서 유학하며 힘들게 수집한 자료가 소장자의 출처도 없이 실려 있고. 그 따위로 책을 만들다니 그쪽 출판사도 알조이지만 늦게라도 나를 찾아왔으니 그런 민감한부분을 따지지는 않겠다. 김수정이 망설이다가 그 말을 전하자 팀장은 놀라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그래? 했을 뿐이었다.
“원래 예술가들이 그래, 오리지널리티 같은 것, 그런 것에 대한 망상들이 다 있지.”
“윤은 예술가가 아니잖아요?”
“애호가들, 수집가들은 더 하고.”
그날 김수정은 자기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썼다. 나는 아주 이상한 남자를 최근에 만났는데 왜 이상했는지를 오늘은 까먹고 말았다. 그렇게 휘발된 이상함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인데 이상함의 내용은 텅 비어 있으니 참으로 이상하도다. 그 글에는 세 개의 좋다는 반응이 달렸는데 하나가 윤이었다.
윤을 두 번째 만나던 날, 김수정은 좀 더 단단한 준비를 하고 나갔다. 절대 대화의 목적을 놓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튀는 팝콘들을 주워다 지퍼백에 넣어버리리라, 지퍼를 채우리라, 입에 그냥 지퍼를. 그러다 김수정은 누구 입을 재봉틀로 박아버리겠다는 어느 작가 겸 정치인의 말이 생각났고 자기가 그런 과격한 상상을 했다는 데 자책했다. 김수정은 잠깐 기도하며 용서를 빌었다.
(후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5년 겨울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