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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용사’ 나라와 ‘동사’ 나라의 소통
글 장영숙 ㅣ 통·번역가. 1958년생
독역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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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역 박완서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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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생활에서, 특히 그것이 유학생활일 경우, 언어로 인한 어려움과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입만 떨어진다면……’, ‘도대체 이 귀(耳)는 언제쯤 뚫릴까?’ 이런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들고, 또 같은 생각 속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언어 소통의 문제에서 조금씩 벗어나 다른 학생들과 일상적인 대화도 나누고 몇몇 학생들과는 제법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점심시간 무렵 학생식당에 가려고 도서관을 나서는데 아는 녀석이 눈에 띈다.
“안녕, 밥 먹었니?”
“아, 어쩌지? 난 벌써 먹었는데…… 미안해. 우리 다음에 약속하고 꼭 같이먹으러 가자. 응!”
식사시간에 지인을 만나면 일상적으로 하게 되는 한국식 인사에 독일식의 진지함과 사무적인 사고로 반응하는 친구 앞에서 거꾸로 내가 당황하게 되었다. 이는 유학생활 중 표면적 언어 소통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차이로 인해 겪었던 수없이 많은 ― 우습거나, 화가 나거나, 난처했던 ― 에피소드들 중의 하나이다. 이후 차츰 문맥을 알게 된 독일 친구들은 식사시간 무렵에 역자를 만나거나 전화통화를 하게 되면 “나 벌써 밥 먹었어!” 혹은 “나 아직 밥 안 먹었어!” 하고 미리 너스레를 떨곤 했다.
고 박완서 작가의 자전적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가 독일어로 완역(독일어 제목 ‘War der Berg wirklich dort ’)되어 이번 여름 독일 EOS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역자로서 기쁨이나 뿌듯함보다는 뭔지 모를 허전하고 아쉬운 감정과 동시에 홀가분함이 앞선다. 아마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씨름하던 번역 원고가 내 손을 떠나 성장(盛粧)을 하고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또 번역 기간 내내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원작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제대로 살려내고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서 드디어 해방(적어도 물리적으로는)되었다는 데서 오는 심리적 반응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학 언어가 매개하는 내용은 한 사회의 일상생활에서부터 그 사회에서 생활하는 인간의 깊은내면의 모습, 그리고 그들의 복잡한 심리상태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사족(蛇足)일 수 있지만, 언어는 내용을 규정 지우고, 또 내용은 언어를 전제(前提)하는 동시에 지배, 형성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부사와 형용사가 발달하고, 가족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이 세분화된 우리말은 “시골 처녀의 머리채처럼 나스르르하고도 청정하게 돋아난 달래”와 같은 감성적 표현을 즐겨하고, 인간적 유대감을 존중하는 우리의 정서를 나타내기에 적합하다. 이에 반해 동사가 발달하고 분석적이며 개인주의적인 문화권 언어인 독일어는 그들 고유의 사고방식과 사회적 특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모와 고모, 시어머니와 장모를 구분하는 단어는 없으나, 나타내는 대상이 하나인지 두 개인지(단수인지 복수인지)가 꼭 구별되는 독일어와, 사돈에 팔촌까지 그 고유의 명칭과 그에 따른 위계질서(서열구분)가 존재하고, “한 달 며칠”이라는 정확한 표현대신 “달포”라는 단어를 즐겨 쓰는 한국인의 표현방식은 독일과 한국사회의 문화적 특성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언어적 상이성을 드러내 보이는 아주 비근한 예들이다. 한국 전통가옥의 대청마루, 안방, 작은방, 사랑채는 그 의미와 구조적 특성에 있어서 독일의 가옥과는 다르며, 한국 온돌방에서의 자리배치 ―따뜻한 아랫목에서 겨울철에는 냉기가 감도는 윗목까지―가 가지는 문화적 의미는 서구 문화권사람들에게는 낯설다. 나아가 우리가 이해하는 “청상의 소복같이 하얀색”을 어떻게 독일어로 옮길 수 있으며, 설사 일대일(一對一)의 언어적인 “Translation”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이는 표피적인 전달에 불과하며 이 표현이 함축하고 있는 한국적 문화 코드에 대한 이해는 별개의 문제로 남게 된다.
그러면 상기한 예들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현대사회의 화두(話頭)이기도 한 문화 간의 소통은 정말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문화 간의 소통이란 어떤 모습이며, 또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중요한가? 이는 번역을 하면서 역자가 반복해서 던졌던 물음들이다.
근대사에서 독일과 한국은 공유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나치시대라는 야만적인 시간은 일제강점을 통한 암울했던 시간이 한국 역사에 갖는 의미 못지않게 독일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는 2차 대전 후 타의에 의해서 나라가 분단되고 한민족이 두 개의 대립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며 서로 갈등,대치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도 우리나라와 많이 닮아 있다. 따라서 한국 전쟁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동족 간의 갈등과 분단의 비극을 다룬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많은 부분에서 독일 근대사의 한 모습일 수 있으며, 적지 않은 독일 독자들은 이 작품 속에서 자신들의 모습과 자신들의 이야기를 찾고, 발견하며 또 공감 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그들이 “청상의 소복”, “마음 깊은 구석에 똬리 틀고 있는 한(恨)” 그리고 “따뜻한 아랫목”이 지니는 한국적 문화 코드를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문화 간의 공감―그것이 인간 공통의 보편적인 모습에 기인하든, 역사적, 사회적 유사성에 근거하든―은 절대적인,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상호이해를 전제하지 않으며, 이는 또한 가능하지도 않다. 문화 간의 이해와 교류는 과정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역자에게 있어서 그 첫 걸음은 “드러냄”과 “다가감”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노정(露呈)되는 문화 간의 공통점과 상이함, 친근함과 낯섦 속에 소통의 단초들은 이미 놓여 있다. 왜냐하면 공통점에 대한 발견과 인식은 서로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나아가 다름에 대한 포용으로 이어지며, 또 낯설음은 친근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문화 간 이해의 폭은 넓어지고, 이는 동시에 자신의 외연을 확대해, 삶은 더 많은 것을 아우르게 되고, 더 풍요로워 질것이다.
끝으로 독일에서의 출판과 관련하여 역자의 생각(경험)을 간단히 피력하고 싶다. 독일에서 한국문학은, 지난 몇 년간의 노력으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변방 문학’에 속하며, 매우 제한적인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는 동시에 현지에서의 출판과 독자층 확보의 어려움을 의미하는 바, 이 문제의 극복을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유기적인 현지와의 관계망 구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작품의 출판은 독자들과 이어짐으로서 그 빛을 발하며, 이때 우리의 노력은 비로소 ‘상응’하는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 독역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을 받아 필자의 번역으로 독일 EOS에서 출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