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무방과 들병이와 장삼이사들을 만나다-김유정의 실레이야기마을
지식산업의 중심, 출판의 안과 밖 해방 후 상업출판사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네 가지 전략 전집(全集), ‘모두’를 모아 읽게 해주려는 로망 순문학의 죽음과 이야기의 탄생
조선 재건에 헌신한 농사꾼 출신 영의정의 궤적-김육의 『잠곡유고』
문학의 풍경 자동차 이력서 진실은 반박당하기 쉽다 낙서의 기술
수상작 선정｜ 어둠 속에도 빛을 발한 2015 한국문학의 별들 제23회 대산문학상 수상자 인터뷰 수상작 리뷰 시 부문｜타국에서 촉발되는 혈연의식과 간절한 언어 수상작 리뷰 소설 부문｜나는 서 있어 이 이야기 앞에 수상작 리뷰 희곡 부문｜'딱 중간에 서는 인생' 의 연대기이자 현대사 수상작 리뷰 번역 부문｜제3세대 번역가의 탄생
시론
영국 왕 조지2세의 왕세자 루이스는 병약한 몸으로 직무수행 차 시골길을 가다가, 들려오는 노래에 깊이 감동하였다. “세상사람 아무도 날 부러워하지 않아도 / 나도 나도 세상사람 아무도 부럽지 않네.” 왕세자가 찾아간 노래는 허름한 물레방앗간에서 일하며 혼자 신나게 부르는 파뿌리노인의 것이었다. 훔쳐보다 마주친 시선에 민망한 왕세자가 그 노래를 한 번 더 불러달라고 청하자, 노인은 꺼지기나 하라는 손짓뿐이어서 말머리를 돌렸는데, 등 뒤에서 들리는 노래는 “세상사람 아무도 날 부러워하지 않아도 / 영국국왕 루이스는 날 부러워하네”였다고. 시인인 나도 그렇게 시를 즐기며 살고 싶어서.
엔도 슈샤쿠의 『침묵』의 한 대목으로 기억 된다
『삼국지』의 한 대목이었다. 황제 위에 오르라는 신하들의 강권을 물리치는 조조(曹操)의 말이다. “넘쳐나도 부족하고 모자라도 충분한 게 인생”이라고, 시 쓰기도 그렇지 않을까하여, 이 한마디로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이라는 그가, 특히 시문에 능했다는 그와, 그의 아들 조식(曹植)의 칠보시(七步詩)와 함께 좋아졌었으니.
*
‘65년 4월(24살) 등단했으니 50년이 지났다. 몽매의 열정뿐이었던 시작(詩作)의 길, 왜 쓰는가? 왜 하필 시인가? 시인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등등 수천수만 번도 더 반문 고문해 왔지만, 반세기가 넘고 보니, 시가 없었다면 아직도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와 신(神)의 차이는, 받침 ‘ㄴ’이 없다는 것이라고. 시는 말이고, 신은 ‘말씀’이니까, 말씀이 되면 시가 아니라고. 말씀이 되는 시는 불경스럽고도 무엄한 것이라고. 사람의 말이 절대로 신(神)인 말씀일 수는 없다고. 따라서 ‘언어예술이 바로 시’라고.
언어예술이므로 성경 불경 논어처럼 참말로 참말하기가 아니라 거짓말로 참말 해야 시라고.종교 경전에도 비유가 많은데, 하물며 시에서랴. 우리의 생활언어 특히 무학의 노인들 언어에는 반어적 모순어법 등, 그대로 시가 되는 거짓말로 참말하기가 많다. “문 닫고 나가거라, 문 닫고 들어와”등의 거짓말에, 나는 한술 더 떠서 “문 잠그고 나가, 문 잠그고 들어왔냐?”라고 한다. 이렇게 낡은 우리 생활언어처럼 시는 ‘거짓말로 참말하기’라고, 10원짜리 동전줍기를 ‘다보탑을 줍다’라고 썼다. 가축처럼 팔리던 흑인들에게 구세주였던 링컨 대통령이 왜 하필 1전짜리 동전에 새겨졌겠는가? 나는 기꺼이 10원짜리 동전이지만 국보20호 다보탑이고 싶은 ‘거짓말로 참말하기’가 시작 기법이라고. 시집 『거짓말로 참말하기』를 묶으며, 오직 나만이 이런 선언을 한 줄 알았다가, 이미 장 콕토가 먼저 시인은 늘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쟁이(The poet is a liar who tells always a truth)라는 글을 읽고 너무 분해서 슬펐다.
시의 도사(道士) 박목월 선생님은 내 원고에, “말이 많데이! 속까지 비(보여)주지 말고 머릿속으로 그려보게, 안 비 주는 데를 채우게 해야제. 우찌 다 비 줄 수 있노. 백장 써도 모지라지러.”그래선지 등단작부터 내 시는 짧았다. 선생님은 간명하다 했으나 어떤 또래 시인은 호흡이 짧다고 한다는 내 전언에, 선생님은 시가 뭔지 모르는 말이니 귀에 담지 말라셨는데, 그 말씀은 반세기동안 금과옥조였나? 내게서 시는 ‘언어경제학적 언어예술’, 즉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효과를 노리는(시의 예술적 장치) 거짓말로 참말하기(문학의 예술적 장치)라고. 미국의 ‘퓰리처’도“짧게 써라, 명료하게 써라, 그림같이 써라. 그러면 읽히고 이해되고 기억될 것이다”라고 했다지. 시에도 참고될까 몰라.
*
“자네는 국문과 영문과도 아닌데 살다가 힘들다고 시 버리면 나는 뭐가 되노? 나는 시 몇 편 좋다고 시인 안 맨든데이.” 박 선생님의 그 말씀에 나는 울며 돌아왔기로 지금까지 시를 써오고 있다. 계속 쓰는 것만도 보답이라고. 공짜 유학 공부 중 고통스런 공부보다 시가 더 쓰고 싶었다. 낙제하면 소환(?)당한다는데도 시 생각에 시달리다니, 제정신인가? 정녕 ‘시인정신은 제정신이 아닌 정신’이었나? 문학 아닌 전공으로 월급 받고 연구하여 연구서 묶어내고 학회 발표하면서 늘 시에 미안했고 박 선생님께 죄송했다. 낯판데기가 두껍다고 반성하면서도, 직장이 알까몰래 시집을 묶어냈다. 작고 시인 이기윤 육사 교수는 늘 군인정신과 시인정신은 둘 다 제정신이 아닌 정신이라고 웃겼는데, 군종사역 18년 만에 우리 성당에 오신 조정래 시몬 신부님은 사제정신과 군인정신, 둘 다 제정신이 아닌 정신이라고 농,진담 하셨다. 생업이 될 수 없어 호사스러운 이름인 시인(詩人)! 무가치해서 가장 가치로운(priceless) 시! 소설가나 음악가처럼 일가(一家)를 이룰 수 없으니, ‘시(詩)쓰며 인간 되라는 시인(詩人)!’이라고. “전하!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했던 이순신이 제정신이었겠나? 임진란 때 7살 막내까지 전장 심부름용으로 데리고 백의종군했던 내 조상 유복기(柳復起) 6형제의 정신이 제정신이었겠나? 완전한 신(神)이면서 인간(人間)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도 자신을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 이라고 자칭했으니, 인간되기(시인)가 그리 힘든가? 그러므로 ‘사제(司祭)정신과 시인(詩人)정신과 군인(軍人)정신은 모두 다 제정신이 아닌 정신이다.’ 시(詩)와 신(神)의 차이, 말과 말씀의 구별처럼.
유교 윤리를 신봉하면서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늘 내게 지는 게 이기는 거라고강요하고 타이르고 달랬다. “계집애니까 져라, 한 살 더 많으니까 져라, 아이니까 져야한다. 암만 옳고 잘못이 없어도 져야제, 안 지면 못이긴데이.” “유약(柔弱)이 승 강강(勝 鋼强)이라 안 카다.” 제정신이 아닌 정신은 늘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고 믿는 숙맥(菽麥)이 돼야 했다. 실존주의철학자요, 노벨문학상도 거부한 사르트르가 “시인은 지는 것으로서 이기려는 자”라고 했다는 글을 읽고서는, 내 어머니가 사르트르보다 더 대단하다고. 지는 게 이기는 거라고 믿는 자는, 녹두-보리도 구별 못했다는 고대 중국의 숙맥(菽麥)아닌가.
박목월 선생님을 처음 뵌 날, 화신백화점 뒤 설렁탕 집에 데려가 주셨다. 너무 긴장한 나는 박 선생님이 사용하고 옆에 놓은 소금 그릇을 감히 당겨오지 못해, 맨 설렁탕을 먹는 둥 마는둥 진땀만 뺐는데, 그걸 주시하신 선생님은 한참 뒤에 “저런 숙맥이니 시는 곧잘 쓰겠다”는 첫인상을 일러주셨다. 시인들은 지는 것이야말로 이기는 길이라고 믿는 숙맥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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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중에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즉 일본인과 일본인의 양육방식에 관한 책을 읽고, 어머니의 지는 게 이기는 거라던 철학을 더 신봉하게 되었다. 60, 70, 80년대는 우리것을 ‘짚새기, 코리언 타임, 엽전……’ 등으로 자조 폄하했다. 바로 그때 나는 우리 민속 특히 우리 선조들의 육아방식, 유아교육과 아동심리요법 등의 연구에 30년을 보냈다. 신라 박씨들이라면서 연구실로 쳐들어와 협박할 때도, 우리 여조들과, 자장가 아동놀이와 노래 부녀자들 노래와 양육, 교육, 훈육 자료를 모아 서구 학설로 타당성을 제시하는 책과 논문을 썼고, 시 창작의 재산이라고 고무되었다. 시집 『알고(考)』는 그래서 나왔다. 낡고 오래된 것들이 풍기는 인생의 부스러기, 재능 있고 똑똑한 이들이 앞서 달려가 좋은 것 다 가져가고도, 남겨진 것들, 버려진 것들, 흘린 줄도 모르게 흘린 것들은 있더라. 그것들이 보인 내 눈과, 주워든 내 손은, 지는 게 이기는 거란 바로 이렇지 하고 기뻐지더라. 문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받아야 하던 푸대접과 괄시를무시하는 숙맥이 되고 싶더라.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에서, 성모자상 성화를 밟고 가면, 신자들도 신부 자신도 사형은 면해준다는 판결에 괴로워하는 로드리고 신부의 귀에 들린 듯한 목소리, “나를 밟고 지나가거라 나는 짓밟히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는 대목도 기억되곤 했다. 말인 시(詩)가 말씀인 신(神)과 약간이라도 비슷하다면 바로 이런 수모도 당해야 하는데……. 생각도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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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서 시는 내과적, 여성적, 모성적이고 궁극적으로 연가(戀歌) 또는 애가(哀歌)인 듯, 사랑을 노래해도 사랑의 완성인 이별 노래가 되고, 삶을 노래해도 죽음 노래가 되어버리고. 또한 죽음을 써도 삶의 의지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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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내가 제일 무섭다. 방심해서 타성(惰性)이 생겨버릴까봐. 우리말의 모순어법, 반어 기법을 다양 다채롭게 시도하고, 거꾸로 쓰고 싶다. 거꾸로의 로꾸거로서, 거꾸로 살아온 것을 회복하고 싶다. 삶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을 알기에 더욱 로꾸거로 시도하고 싶다. 모든 위대한 선배 시인들의 작품이 다 내 시의 스승이면서도, 그 모두가 무시되는 오만방자한 나만의 작품, 궤도이탈의 소행성, 계통발생과 개체발생을 스스로 단절해버린 천상천하 유아독존식 작품을 써야 하는데…… 침묵에서 수다떨기까지, 편편이 독불장군식의 유일무이로 쓸 수 있다면 행운일텐데, 불운이란 원하는 만큼 못 쓰는 것이고, 시인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원하는 만큼 노력도 못해 늘 불행하다. 아직도 모국어 ‘하늘’의 ‘ㅎ’과 ‘ㄹ’ 의 무한확장의 울림과 ‘꽃’의 응축집약의 음감에 황홀하다. 쓸모없어서 더 호사스런 시인이라 황홀해지기도 한다. 나 같은 게 시(詩)말고 어디의 무엇으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으랴하여 저절로 감사하게 된다.
거짓말로 참말하기 : 지는 것이 이기는 것
글 유안진 ㅣ 시인, 1941년생
시집 『봄비 한 주머니』 『나는 내가 낳는다』 『걸어서 에덴까지』 『다보탑을 줍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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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샤쿠의 『침묵』의 한 대목으로 기억 된다
『삼국지』의 한 대목이었다. 황제 위에 오르라는 신하들의 강권을 물리치는 조조(曹操)의 말이다. “넘쳐나도 부족하고 모자라도 충분한 게 인생”이라고, 시 쓰기도 그렇지 않을까하여, 이 한마디로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이라는 그가, 특히 시문에 능했다는 그와, 그의 아들 조식(曹植)의 칠보시(七步詩)와 함께 좋아졌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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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4월(24살) 등단했으니 50년이 지났다. 몽매의 열정뿐이었던 시작(詩作)의 길, 왜 쓰는가? 왜 하필 시인가? 시인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등등 수천수만 번도 더 반문 고문해 왔지만, 반세기가 넘고 보니, 시가 없었다면 아직도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와 신(神)의 차이는, 받침 ‘ㄴ’이 없다는 것이라고. 시는 말이고, 신은 ‘말씀’이니까, 말씀이 되면 시가 아니라고. 말씀이 되는 시는 불경스럽고도 무엄한 것이라고. 사람의 말이 절대로 신(神)인 말씀일 수는 없다고. 따라서 ‘언어예술이 바로 시’라고.
언어예술이므로 성경 불경 논어처럼 참말로 참말하기가 아니라 거짓말로 참말 해야 시라고.종교 경전에도 비유가 많은데, 하물며 시에서랴. 우리의 생활언어 특히 무학의 노인들 언어에는 반어적 모순어법 등, 그대로 시가 되는 거짓말로 참말하기가 많다. “문 닫고 나가거라, 문 닫고 들어와”등의 거짓말에, 나는 한술 더 떠서 “문 잠그고 나가, 문 잠그고 들어왔냐?”라고 한다. 이렇게 낡은 우리 생활언어처럼 시는 ‘거짓말로 참말하기’라고, 10원짜리 동전줍기를 ‘다보탑을 줍다’라고 썼다. 가축처럼 팔리던 흑인들에게 구세주였던 링컨 대통령이 왜 하필 1전짜리 동전에 새겨졌겠는가? 나는 기꺼이 10원짜리 동전이지만 국보20호 다보탑이고 싶은 ‘거짓말로 참말하기’가 시작 기법이라고. 시집 『거짓말로 참말하기』를 묶으며, 오직 나만이 이런 선언을 한 줄 알았다가, 이미 장 콕토가 먼저 시인은 늘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쟁이(The poet is a liar who tells always a truth)라는 글을 읽고 너무 분해서 슬펐다.
시의 도사(道士) 박목월 선생님은 내 원고에, “말이 많데이! 속까지 비(보여)주지 말고 머릿속으로 그려보게, 안 비 주는 데를 채우게 해야제. 우찌 다 비 줄 수 있노. 백장 써도 모지라지러.”그래선지 등단작부터 내 시는 짧았다. 선생님은 간명하다 했으나 어떤 또래 시인은 호흡이 짧다고 한다는 내 전언에, 선생님은 시가 뭔지 모르는 말이니 귀에 담지 말라셨는데, 그 말씀은 반세기동안 금과옥조였나? 내게서 시는 ‘언어경제학적 언어예술’, 즉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효과를 노리는(시의 예술적 장치) 거짓말로 참말하기(문학의 예술적 장치)라고. 미국의 ‘퓰리처’도“짧게 써라, 명료하게 써라, 그림같이 써라. 그러면 읽히고 이해되고 기억될 것이다”라고 했다지. 시에도 참고될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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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국문과 영문과도 아닌데 살다가 힘들다고 시 버리면 나는 뭐가 되노? 나는 시 몇 편 좋다고 시인 안 맨든데이.” 박 선생님의 그 말씀에 나는 울며 돌아왔기로 지금까지 시를 써오고 있다. 계속 쓰는 것만도 보답이라고. 공짜 유학 공부 중 고통스런 공부보다 시가 더 쓰고 싶었다. 낙제하면 소환(?)당한다는데도 시 생각에 시달리다니, 제정신인가? 정녕 ‘시인정신은 제정신이 아닌 정신’이었나? 문학 아닌 전공으로 월급 받고 연구하여 연구서 묶어내고 학회 발표하면서 늘 시에 미안했고 박 선생님께 죄송했다. 낯판데기가 두껍다고 반성하면서도, 직장이 알까몰래 시집을 묶어냈다. 작고 시인 이기윤 육사 교수는 늘 군인정신과 시인정신은 둘 다 제정신이 아닌 정신이라고 웃겼는데, 군종사역 18년 만에 우리 성당에 오신 조정래 시몬 신부님은 사제정신과 군인정신, 둘 다 제정신이 아닌 정신이라고 농,진담 하셨다. 생업이 될 수 없어 호사스러운 이름인 시인(詩人)! 무가치해서 가장 가치로운(priceless) 시! 소설가나 음악가처럼 일가(一家)를 이룰 수 없으니, ‘시(詩)쓰며 인간 되라는 시인(詩人)!’이라고. “전하!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했던 이순신이 제정신이었겠나? 임진란 때 7살 막내까지 전장 심부름용으로 데리고 백의종군했던 내 조상 유복기(柳復起) 6형제의 정신이 제정신이었겠나? 완전한 신(神)이면서 인간(人間)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도 자신을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 이라고 자칭했으니, 인간되기(시인)가 그리 힘든가? 그러므로 ‘사제(司祭)정신과 시인(詩人)정신과 군인(軍人)정신은 모두 다 제정신이 아닌 정신이다.’ 시(詩)와 신(神)의 차이, 말과 말씀의 구별처럼.
유교 윤리를 신봉하면서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늘 내게 지는 게 이기는 거라고강요하고 타이르고 달랬다. “계집애니까 져라, 한 살 더 많으니까 져라, 아이니까 져야한다. 암만 옳고 잘못이 없어도 져야제, 안 지면 못이긴데이.” “유약(柔弱)이 승 강강(勝 鋼强)이라 안 카다.” 제정신이 아닌 정신은 늘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고 믿는 숙맥(菽麥)이 돼야 했다. 실존주의철학자요, 노벨문학상도 거부한 사르트르가 “시인은 지는 것으로서 이기려는 자”라고 했다는 글을 읽고서는, 내 어머니가 사르트르보다 더 대단하다고. 지는 게 이기는 거라고 믿는 자는, 녹두-보리도 구별 못했다는 고대 중국의 숙맥(菽麥)아닌가.
박목월 선생님을 처음 뵌 날, 화신백화점 뒤 설렁탕 집에 데려가 주셨다. 너무 긴장한 나는 박 선생님이 사용하고 옆에 놓은 소금 그릇을 감히 당겨오지 못해, 맨 설렁탕을 먹는 둥 마는둥 진땀만 뺐는데, 그걸 주시하신 선생님은 한참 뒤에 “저런 숙맥이니 시는 곧잘 쓰겠다”는 첫인상을 일러주셨다. 시인들은 지는 것이야말로 이기는 길이라고 믿는 숙맥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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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중에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즉 일본인과 일본인의 양육방식에 관한 책을 읽고, 어머니의 지는 게 이기는 거라던 철학을 더 신봉하게 되었다. 60, 70, 80년대는 우리것을 ‘짚새기, 코리언 타임, 엽전……’ 등으로 자조 폄하했다. 바로 그때 나는 우리 민속 특히 우리 선조들의 육아방식, 유아교육과 아동심리요법 등의 연구에 30년을 보냈다. 신라 박씨들이라면서 연구실로 쳐들어와 협박할 때도, 우리 여조들과, 자장가 아동놀이와 노래 부녀자들 노래와 양육, 교육, 훈육 자료를 모아 서구 학설로 타당성을 제시하는 책과 논문을 썼고, 시 창작의 재산이라고 고무되었다. 시집 『알고(考)』는 그래서 나왔다. 낡고 오래된 것들이 풍기는 인생의 부스러기, 재능 있고 똑똑한 이들이 앞서 달려가 좋은 것 다 가져가고도, 남겨진 것들, 버려진 것들, 흘린 줄도 모르게 흘린 것들은 있더라. 그것들이 보인 내 눈과, 주워든 내 손은, 지는 게 이기는 거란 바로 이렇지 하고 기뻐지더라. 문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받아야 하던 푸대접과 괄시를무시하는 숙맥이 되고 싶더라.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에서, 성모자상 성화를 밟고 가면, 신자들도 신부 자신도 사형은 면해준다는 판결에 괴로워하는 로드리고 신부의 귀에 들린 듯한 목소리, “나를 밟고 지나가거라 나는 짓밟히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는 대목도 기억되곤 했다. 말인 시(詩)가 말씀인 신(神)과 약간이라도 비슷하다면 바로 이런 수모도 당해야 하는데……. 생각도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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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서 시는 내과적, 여성적, 모성적이고 궁극적으로 연가(戀歌) 또는 애가(哀歌)인 듯, 사랑을 노래해도 사랑의 완성인 이별 노래가 되고, 삶을 노래해도 죽음 노래가 되어버리고. 또한 죽음을 써도 삶의 의지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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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내가 제일 무섭다. 방심해서 타성(惰性)이 생겨버릴까봐. 우리말의 모순어법, 반어 기법을 다양 다채롭게 시도하고, 거꾸로 쓰고 싶다. 거꾸로의 로꾸거로서, 거꾸로 살아온 것을 회복하고 싶다. 삶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을 알기에 더욱 로꾸거로 시도하고 싶다. 모든 위대한 선배 시인들의 작품이 다 내 시의 스승이면서도, 그 모두가 무시되는 오만방자한 나만의 작품, 궤도이탈의 소행성, 계통발생과 개체발생을 스스로 단절해버린 천상천하 유아독존식 작품을 써야 하는데…… 침묵에서 수다떨기까지, 편편이 독불장군식의 유일무이로 쓸 수 있다면 행운일텐데, 불운이란 원하는 만큼 못 쓰는 것이고, 시인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원하는 만큼 노력도 못해 늘 불행하다. 아직도 모국어 ‘하늘’의 ‘ㅎ’과 ‘ㄹ’ 의 무한확장의 울림과 ‘꽃’의 응축집약의 음감에 황홀하다. 쓸모없어서 더 호사스런 시인이라 황홀해지기도 한다. 나 같은 게 시(詩)말고 어디의 무엇으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으랴하여 저절로 감사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