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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불가능성’이 남긴 여운들
글 최권행 ㅣ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1954년생
역서 『프란츠 파농 연구』 『파블로 네루다』 (공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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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역 고은 시집 『순간의 꽃』
고은 시인의 『순간의 꽃』은 시인이 한국어판 후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무당 기운’에 의지하여 마치 마른 땅에 ‘소나기’ 쏟아져 내리듯, 저절로 떠 오른 시들을 모아 놓고 있다. 불역판 뒤표지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프랑스나 유럽 독자에게는 일본의 ‘하이쿠’를 연상시킬 만한 짧은 길이의 통찰을 담은 것들이다. 그러나 하이쿠와 달리 이 시들은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세계에서 추월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사는 듯한 시인이, 절박하고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섬광처럼 길어 올린 것들이니 오히려 선시(禪詩)에 더 가깝다. 그의 시에는 ‘한반도’, ‘419’, ‘아우슈비츠’, ‘개마고원’이 나오는가 하면, 자식에게 점심을 배달하러 가는 가난한 아버지가 ‘헐렁한 바지’를 입고 나오기도 하고, ‘돈 벌러 간 빈 집’도 나오며, 노동의 끝에 소주를 마시는 ‘지아비와 아비’가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프랑스 독자들에게 고은의 시집이 서 있는 전통으로서의 선시를 소개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어쨌든 이 독특한 압축미의 선시를 프랑스어로 옮길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최적의 어휘 선택일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형식상의 간결함과 리듬도 핵심적인 요소들일 것이다.
시인의 말대로, 이것은 무당 기운에 의지한 것, 서양식으로는 뮤즈 신들이 불어넣어준 영감으로 쓰여진 시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산문성을 지우기 위해서 역자인 정예영과 로랑 짐머만이 기울인 노력은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다듬고 또 다듬는 작업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높은 완성도가 두 사람의 불역 시들에서 느껴진다.
적절한 어휘를 택하고 적지 않은 경우, 동사나 접속사를 생략하면서 명사구만을 통해 압축적으로 제시되는 표현 등은 원래 시의 숨결을 전혀 다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압축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어와 불어 두 개 언어에 능숙한 역자들에게만 가능한 작업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를 느끼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저 골목 오르막길 / 오순도순 / 거기 / 가난한 집의 행복이 정녕 행복이니라” 같은 시의 경우, ‘오순도순’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불역시집은 ‘harmonie’로 쓰고 있지만, ‘조화로움’ 정도로 오순도순의 느낌이 살아날 것인가? ‘겨울 잔설 경건하여라’의 경우, ‘Que la neige partout est calme’라고 옮겼지만, ‘calme’의 ‘고요함’과 경건함의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더하여 ‘반역의 필요성’이라고나 할까? 역자들이 좀 더 과감하게 번역했더라면 싶은 부분도 있었다. 예컨대 ‘초파일 밤 등불 아래 / 나는 그대를 보았네’에서 우리는 무수한 등불이 걸려 있는, 또 다른 세상의 환각 같은 분위기를 떠올리지만, 불역은 ‘sous la lampe’라고 표현함으로써 등불의 복수성에서 오는 분위기가 잘 전달되지 않는 듯하다. 한국어 표현에 충실한 번역이었지만, 그러나 한 걸음 더 나갈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꼭 이 다음에는 무명 치마를 입어야겠다 / 할머니의 길 / 어머니의 길 / 들밥 광주리 이고 어서어서 가야겠다’의 경우도 ‘이 다음’은 ‘(윤회의) 다음 생애’라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la prochaine fois’라고 그대로 옮기는 대신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시인의 시 중에는 더러 주석이 불가결한 경우도 있어 보인다. 예를 들어 “북한 개마고원 상공을 지나갈 때 / 함께 가는 친구에게 죄스러웠다 / 진실로 / 내가 탄 비행기가 떨어지기를 빌었다/ 왜 그랬는지 몰라 / 그 구름 속 고원이 / 억세게도 내 저승이었다”라는 시는 프랑스 독자에게 어떻게 읽힐까? 분단의 현실에서 그가 느끼는 아픔과 연결시키지 않고는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을것이고 심지어는 엉뚱하게 읽힐 수도 있지 않을까? 몇 편의 시가 그런 경우로서 좀 더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 졌으면 싶다.
선시풍의 이 시집은 다른 서정시들보다 더 쉽게 독자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 때문에 오히려, 원래 시집에 실려 있던 모든 시를 다 소개하기 보다는 프랑스 독자 입장에서 요령부득인 시들을 일부 덜어냈더라도 좋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정수 중의 정수를 전했다면 말이다. 양장본으로 어딘가 귀티를 낸 한국시집에 비해, 불역판 시집은 문고본처럼 수수한 앞표지부터 시 두 편을 싣고 시인의 세계를 정확히 해설한 간결한 글을 뒤표지에 담았다. 한 손에 들어오는 시집, 바다색의 가벼운 시집에 담긴 긴 여운의 짧은 시들…… 프랑스인들의 마음속으로 돛을 달고 흘러 들어갈 듯싶은 작은 돛단배가 떠오른다.
※불역 『순간의 꽃』은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을 받아 정예영, 로랑 짐머만의 공동번역으로 프랑스 시르셰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