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무방과 들병이와 장삼이사들을 만나다-김유정의 실레이야기마을
지식산업의 중심, 출판의 안과 밖 해방 후 상업출판사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네 가지 전략 전집(全集), ‘모두’를 모아 읽게 해주려는 로망 순문학의 죽음과 이야기의 탄생
조선 재건에 헌신한 농사꾼 출신 영의정의 궤적-김육의 『잠곡유고』
문학의 풍경 자동차 이력서 진실은 반박당하기 쉽다 낙서의 기술
수상작 선정｜ 어둠 속에도 빛을 발한 2015 한국문학의 별들 제23회 대산문학상 수상자 인터뷰 수상작 리뷰 시 부문｜타국에서 촉발되는 혈연의식과 간절한 언어 수상작 리뷰 소설 부문｜나는 서 있어 이 이야기 앞에 수상작 리뷰 희곡 부문｜'딱 중간에 서는 인생' 의 연대기이자 현대사 수상작 리뷰 번역 부문｜제3세대 번역가의 탄생
문학현장
예컨대 이런 집이 있어.
상상하기 어려운 집. 당신 같은 사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하는 집.
상상할 수 없으므로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 집.
그 집에는 나나와 소라 자매가 살아. 아버지 금주 씨는 일찍이 공장의 기계에 상반신이 갈려 죽고 어머니 애자씨는 넋 놓고 살다가 지금은 요양원에 가 있어.
그리고 이웃이 있어. 이웃이 있지. 나나네 집과 데칼코마니 대칭을 이룰 만큼 똑같은 집의 나기. 나기의 아버지는 시장통에서 일하다 넘어져 죽었는데 몸 밑에 깔려 있던 사과가 따뜻했대. 순자 씨는 나기의 어머니야. 아, 엄청난 분량의 김치만두를 만들어. 그걸 빚어서 나나와 소라까지 먹여 키우지. 그리고는, 그만이야. 별 얘기는 없어. 그냥 그들이 애면글면 살아가는 얘기니까.
사는 데 온갖 힘을 다하는 것 같지도 않아. 애자 씨만 전심전력을 다해 살며 사랑하려 했지만 결국 저렇게 되고 말았잖아. 그래서 나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그 정도가 좋다고 해. 곧 태어날 자신의 아이와 아이 아빠에 대한 사랑도 딱 그 정도면 된다고. 애자 씨마저도 이제는 전심전력하지 않고, 할 수도 없지만, 그녀는 이런 말을 하네.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살아가려면 세계를 그런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좋다고. 희망? 희망 따위는 무슨? 무기력한 삶이나 살자는 것 같기도 해 그들의 태도는. 나한테는 그렇게 보이는 거야. 내가 누구냐면, 나는 저 앞에서 나나가 당신 같은 사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한 말 속의 ‘당신’이거든. 상상할 수 없으므로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나야. 그래서 그들의 삶에 썩 쓸 만한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고 그냥 허망할 뿐이지 그들이. 나나 소라가. 나기가. 애자 씨와 순자 씨가 다.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걸리는 게 있네. 쓸 만한 게 없는 게 아니라 그건 단지 나의 상상력 부족일 뿐이라는 거잖아. 그런가? 며칠 전 어딜 지나다 접한 글귀가 있었어. 그러나 그는 무력(無力)이라는 힘에 의해 더욱 위대했고, 어리석음이라는 지혜로 더욱 위대했으며, 미친 희망과, 자기를 증오하는 방식의 사랑을 통해 더욱 위대했다, 라는 글. 이것 역시 그래서 이상하게만 읽혔던 걸까. 내 상상력이 부족해서? 대체 그 상상력이란 게 뭘까? 나한테는 없는 건가 본데 그럼 이 나나 소라 나기 이야기는 나한테 필요 없는 건가. 아니, 볼 수가 없으니 필요해도 필요한 줄 모르는 것일 테지. 답답하다. 갑자기 답답해졌다 내가. 자기의 소원을 포기한다는 것은 위대한 행위이다. 그러나 자기의 소원을 버린 다음에도 그 소원을 간직한다는 것은 더 위대한 일이다. 한시적인 것을 버리고 난 후에도 계속 이것을 간직한다는 것은 더 위대한 일이다. 이런 말 앞에 선 나. 버리고도 계속한다는 것. 계속한다는 것. 버리면서 버리면서 계속한다는 이야기 앞에 서 있는, 청맹과니인 내가 슬프다. 덧없고 하찮지만 그 때문에 인간은 사랑스럽고,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간다는 나나의 말 앞에서 나는 내 상상의 문이 열리길 바랄 뿐이다. 그럴 뿐이야.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이지만 그래서 소중하다는 말이 확연하게 들리는 세계로, 나도, 들어설 수 있기를. 그래서 애자 씨의 넋 잃음, 순자 씨의 김치 만두, 요강 때문에 아이 아빠와 결별할 수밖에 없는 나나, 그리고 나기 오라버니의 지난한 동성애가 어떻게, 위대할 수 있는지를, 함께 느끼게 되기를. 바랄 수밖에. 이 이야기 앞에서. 내가 이 이야기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 이야기가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일지도 몰라. 너도 계속해보자며. 당신도 이 집에 들어와 계속하자고. 계속 살자고. 그래도 버티자고. 세계가 끝나는 순간이 오더라도, 필멸뿐이더라도 천천히 올 것이며, 그래서 아직은 있는 것 아니냐고. 계속하자. 계속하자고. 계속하자 계속하자. 양화대교 양화대교(자이언티의 노래 <양화대교>)의 리듬으로 나를 붙들고 있어 지금. 이 이야기가.
필자 주 : 진한 글씨 부분은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 인용하였고, 기운 글씨 부분은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에서 인용하였다
수상작 리뷰 소설 부문｜나는 서 있어 이 이야기 앞에
글 구효서 ㅣ 소설가. 1957년생
소설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늪을 건너는 법』 『비밀의 문』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등
황정은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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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이런 집이 있어.
상상하기 어려운 집. 당신 같은 사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하는 집.
상상할 수 없으므로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 집.
그 집에는 나나와 소라 자매가 살아. 아버지 금주 씨는 일찍이 공장의 기계에 상반신이 갈려 죽고 어머니 애자씨는 넋 놓고 살다가 지금은 요양원에 가 있어.
그리고 이웃이 있어. 이웃이 있지. 나나네 집과 데칼코마니 대칭을 이룰 만큼 똑같은 집의 나기. 나기의 아버지는 시장통에서 일하다 넘어져 죽었는데 몸 밑에 깔려 있던 사과가 따뜻했대. 순자 씨는 나기의 어머니야. 아, 엄청난 분량의 김치만두를 만들어. 그걸 빚어서 나나와 소라까지 먹여 키우지. 그리고는, 그만이야. 별 얘기는 없어. 그냥 그들이 애면글면 살아가는 얘기니까.
사는 데 온갖 힘을 다하는 것 같지도 않아. 애자 씨만 전심전력을 다해 살며 사랑하려 했지만 결국 저렇게 되고 말았잖아. 그래서 나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그 정도가 좋다고 해. 곧 태어날 자신의 아이와 아이 아빠에 대한 사랑도 딱 그 정도면 된다고. 애자 씨마저도 이제는 전심전력하지 않고, 할 수도 없지만, 그녀는 이런 말을 하네.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살아가려면 세계를 그런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좋다고. 희망? 희망 따위는 무슨? 무기력한 삶이나 살자는 것 같기도 해 그들의 태도는. 나한테는 그렇게 보이는 거야. 내가 누구냐면, 나는 저 앞에서 나나가 당신 같은 사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한 말 속의 ‘당신’이거든. 상상할 수 없으므로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나야. 그래서 그들의 삶에 썩 쓸 만한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고 그냥 허망할 뿐이지 그들이. 나나 소라가. 나기가. 애자 씨와 순자 씨가 다.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걸리는 게 있네. 쓸 만한 게 없는 게 아니라 그건 단지 나의 상상력 부족일 뿐이라는 거잖아. 그런가? 며칠 전 어딜 지나다 접한 글귀가 있었어. 그러나 그는 무력(無力)이라는 힘에 의해 더욱 위대했고, 어리석음이라는 지혜로 더욱 위대했으며, 미친 희망과, 자기를 증오하는 방식의 사랑을 통해 더욱 위대했다, 라는 글. 이것 역시 그래서 이상하게만 읽혔던 걸까. 내 상상력이 부족해서? 대체 그 상상력이란 게 뭘까? 나한테는 없는 건가 본데 그럼 이 나나 소라 나기 이야기는 나한테 필요 없는 건가. 아니, 볼 수가 없으니 필요해도 필요한 줄 모르는 것일 테지. 답답하다. 갑자기 답답해졌다 내가. 자기의 소원을 포기한다는 것은 위대한 행위이다. 그러나 자기의 소원을 버린 다음에도 그 소원을 간직한다는 것은 더 위대한 일이다. 한시적인 것을 버리고 난 후에도 계속 이것을 간직한다는 것은 더 위대한 일이다. 이런 말 앞에 선 나. 버리고도 계속한다는 것. 계속한다는 것. 버리면서 버리면서 계속한다는 이야기 앞에 서 있는, 청맹과니인 내가 슬프다. 덧없고 하찮지만 그 때문에 인간은 사랑스럽고,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간다는 나나의 말 앞에서 나는 내 상상의 문이 열리길 바랄 뿐이다. 그럴 뿐이야.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이지만 그래서 소중하다는 말이 확연하게 들리는 세계로, 나도, 들어설 수 있기를. 그래서 애자 씨의 넋 잃음, 순자 씨의 김치 만두, 요강 때문에 아이 아빠와 결별할 수밖에 없는 나나, 그리고 나기 오라버니의 지난한 동성애가 어떻게, 위대할 수 있는지를, 함께 느끼게 되기를. 바랄 수밖에. 이 이야기 앞에서. 내가 이 이야기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 이야기가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일지도 몰라. 너도 계속해보자며. 당신도 이 집에 들어와 계속하자고. 계속 살자고. 그래도 버티자고. 세계가 끝나는 순간이 오더라도, 필멸뿐이더라도 천천히 올 것이며, 그래서 아직은 있는 것 아니냐고. 계속하자. 계속하자고. 계속하자 계속하자. 양화대교 양화대교(자이언티의 노래 <양화대교>)의 리듬으로 나를 붙들고 있어 지금. 이 이야기가.
필자 주 : 진한 글씨 부분은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 인용하였고, 기운 글씨 부분은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에서 인용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