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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섭의 도일 그리고 불귀
글 정철훈 ㅣ 시인, 소설가, 문학저널리스트. 1959년생
시집 『빛나는 단도』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소설 『인간의 악보』 『카인의 정원』 『소설 김알렉산드라』, 산문집 『내가 만난 손창섭』 『뒤집어져야 문학이다』 등
손창섭 ㅣ 소설가. 1922~2010년
소설 「비 오는 날」 「생활적」 「사연기」 「미해결의 장」 「혈서」 「잉여인간」 「낙서족」 「유실몽」 등
2009년 2월 15일 일요일 오전 11시, 도쿄 인근 요세시(淸淑市) 바이옌(梅園) 요양병원.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올라간 4층 입원실 명패엔 ‘上野昌涉(우에노 마사루)’라고 적혀 있었다. 일본인 부인의 성 ‘上野(우에노)’를 딴 손창섭의 일본식 이름이었다. 그는 얇은 이불 홑청을 덮고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간호사가 눈가의 묽은 눈곱을 닦아주자 인기척을 느낀 그는 실눈을 떠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의 상체를 안아 일으키는 짧은 순간에 체온이 느껴졌다. 그건 식어가는 체온이었다. 손과 등짝을 문지르자 그는 “이따이(아프다), 이따이(아프다)”를 연거푸 발음했다. 아픔을 느낀다는 게 이토록 살아 있음의 조건으로 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지난 시대의 파경(破鏡)이 그의 몸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급성 폐기종에 노인성 치매까지 겹쳐 거의 말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동공 뒤에서 넘어오는 또 하나의 시선으로 자신을 찾아온 낯선 방문객을 알아보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한때 펜을 야무지게 잡았을 손은 힘없이 풀린 채 창백했다. 쥐어보니 뼈가 바스러질 것 같았다. 바스러지는 속성. 그게 문학의 속성이자 언어의 속성일지도 모른다.
마침 가져간 『20세기 한국소설 손창섭 편』을 꺼내 거기 수록된 손창섭 자신의 사진을 보여 주자 눈에 총기가 돌았다. 책장을 넘겨 백지에 사인을 부탁하며 손에 펜을 쥐어주었다. 백지에 펜을 갖다 댄 채로 시간은 흘러갔다. 동행한 우에노 여사가 답답한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인을 해보세요. 사인을.” 펜이 천천히 움직였다. “손창섭 200九.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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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만에 써본 한글이었을까. 손으로는 한글을 쓰고 입으로는 일어를 말해야 하는 이중언어구사자로 살아온 손창섭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2009’도 아니고 ‘200九’로 쓰면서 아라비아 숫자와 한자를 혼동하고 있었다. 이 혼동이야말로 그가 살아온 혼돈의 시대를 대변하는 상징 코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퍼런 심줄이 불거져 나온 그의 깡마른 손이 쥐고 있는 건 펜이 아니라 구원의 도구처럼 느껴졌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 게 자신의 뜻은 아니라는 듯 그는 분명 ‘손창섭’이라고 한글로 또박또박 적었다. 우에노 여사가 다시 “사인을 하세요”라며 귀에 대고 외치자 손창섭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난 사인이 없는 사람이외다.”
사인이 없는 사람. 그게 손창섭이었다. 우에노 여사는 남편의 손을 꼭 감싸 쥐며 말했다. “아마, 이 지상에 쓴 마지막 이름일 것입니다.”
손창섭은 누군가. 장용학, 오상원, 이범선 등과 함께 전후문학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그는 일찍이 단편 「신의 희작」(1961)에서 “껄렁껄렁한 시나 소설이나 평론 줄을 끄적거린다고 해서 그게 뭐 대단한 것처럼 우쭐대는 선민의식. 말하자면 문화적인 것 일체와 문화인이라는 유별난 족속 전부가 싫은 것이다”라며 이 땅의 시인과 소설가 들의 선민의식을 냉소하며 전후 세대의 깊은 환멸을 드러낸 작가가 아니던가.
대표작 「잉여인간」은 1964년 유현목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낙양의 지가를 끌어올렸고 『세월이 가면』(<대구일보> 1959)을 필두로 『부부』(<동아일보> 1962), 『인간교실』(<경향신문> 1963), 『결혼의 의미』(<영남일보> 1964), 『이성연구』(<서울신문> 1965), 『길』(<동아일보> 1968), 『삼부녀(三父女)』(『주간 여성』 1969) 등 신문 연재소설로 인기를 구가하던 그가 1973년 12월 말 돌연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한 작가가 모국어의 땅인 조국을 떠나 아내의 나라로 이주를 결정하기까지엔 말로는 다할 수 없이 복잡한 개인 상황과 시대적 배경이 숨어 있을 수밖에 없다.
유종호에 따르면 손창섭의 도일은 1968년 1월 북한 무장공비일당이 청와대 뒷산까지 잠입한 ‘김신조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이다. 남한 정세의 불안과 적화(赤禍)에 대한 불안이 그를 도일케 했다는 것이다.
김신조 사건 직후인 1968년 월간 《중앙》 5월호에 발표한 단편 「청사에 빛나리: 계백의 처」는 계백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새로운 해석을 가하고 있는 작품이다. 왕조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미화되어 온 황산벌의 결사대장 계백은 부인 보미의 입을 통해 오히려 망국을 재촉한 졸장부로 드러난다.
“장군, 이 나라, 이 백성들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내버려둔 사람이 누구시오? (중략) 일찍이 나라를 건질 선책엔 목숨을 걸려 않으시고 망국의 위기에 닥뜨려서야 무고한 장정과 가족까지 희생시켜서 청사에 이름을 남기려 하시니 그러고도 떳떳하시오?”(「청사에 빛나리」에서) 유종호의 지적대로 김신조 사건의 파장은 손창섭의 실존 자체를 뒤흔든 중차대한 문제일 수 있다. 해방 직후 황해도 어느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어느 날, 학생들 앞에서 몇 마디 한 것이 당국에 걸려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상황에서 급거 남하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한 손창섭에게 김신조 사건으로 인한 위기의식은 도일을 결심케 한 계기일 수 있다. 하지만 시국 인식이라는 거대담론과는 별도로 그의 도일은 생각보다 작은 이유에서 촉발되었을 수도 있다.
1922년 평양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손창섭은 3남 1녀 가운데 막내이다. 손창익 손창환 손정숙 손창섭, 이렇게 사 남매 가운데 막내인 것이다. 손창환의 외손녀 김유림에 따르면 손창환은 1970년대 초 흑석동에 살고 있는 손창섭을 찾아갔다가 제수가 일본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손창섭에게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친일파나, 일본인이라면 질색을 하던 손창환이 자신을 기피하고 있음을 눈치 챈 우에노 여사도 그런 시아주버니를 상당히 꺼려한 나머지 급기야 형제간에 간극이 벌어졌으며 손창환은 그 길로 부산 집으로 내려와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다. 이후 손창섭은 이 상황을 풀기 위해 여러 차례 편지도 내고 자신의 소설책도 보냈지만 형제간의 의절은 회복되지 않았다. 우에노 여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먼저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손창섭은 흑석동 집을 처분하고 비자문제가 해결되기까지 평양 무성공업학교 제자인 노윤기 씨의 구리시 과수원에 방을 얻어 1년여를 기거했던 것이다.
형제간의 의절이라는 남모르는 아픔을 뒤로 하고 아내의 뒤를 쫓아 일본으로 건너간 손창섭의 가슴엔 환멸이라는 단어가 새겨졌을 것이다. 그에게 조국이나 고향 혹은 형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돌아가지 않음. 손창섭은 2010년 6월 23일 도쿄 무사시노 다이병원에서 숨을 거둠으로써 자신의 불귀를 완성한다.
그는 왜 스스로 불귀의 운명을 선택했을까. 이런 질문을 앞에 두고 병상의 그에게서 직접 해명을 들은 바가 없다. 그래서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손창섭은 빈손으로 일본에 왔다고 한다. 자신이 쓴 책은 물론 작품이 수록된 전집도 집안에 들여놓지 않았으니 그에겐 문학도 책도 외부였다. 다만 자기 안으로 귀환했을 뿐, 그가 평생 찾아 헤맨 것은 지상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