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탄실이와 주영이

라다크,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한 아웃사이더의, 이야기 만들기에 대한 홀림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이 깎이’는 것을 읽어내는 것이 문학

특집을 기획하며 ①고양이 사냥의 추억 ②최초의 반려묘 까맹이부터 이백 살 사이보그 고양이까지 ③펫은 실전이다 ④해방촌의 반려종들을 위하여

텍스트에 대한 경의

자파(自派)의 탄생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우주이다

『반노』는 ‘인간’을 지키자는 처절한 투쟁기였다

하루 2천640번 금형을 드나든 손의 기록

아름다움에 다다르려는 맹렬한 노력

홍진에 묻힌 분내……

추운 날의 벗, 세한삼우(歲寒三友)

노을바다의 장엄

양요리루 의자에서 커피를 압음하니 문명개화 이 아닌가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제2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시 부문 수상작 리뷰-소설부문 수상작 리뷰-번역부문

얇아지는 장편, 환영할 일인가

①소각,저작 ②외경,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인가요

①30년의 끝 ②양들의 침묵

새(NEW)

거울의 미로

①녹색문명(綠色文明) 시대의 숲 ②새끼 ③재와 유리의 미래

소설답지 않은, 그래서 더 공감하는

이광수, 일본에서 크게 취하다

머릿속에 쌓인 문제를 풀 수 없을 때

불안과 행운 사이에서

엘리엇 업데이트하기

‘더듬더듬 먼 길’을 가는 시와 번역

경계없는 예술 향한 10년여의 노정

대산창작기금,대산세계문학총서

대학생 아시아 대장정 3차 리더십 캠프 및 아시아프론티어클럽(AFC) 발대식 개최

노트 위 패스포트

라다크,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글·사진 김태형 ㅣ 시인, 청색종이 출판사·책방 대표, 1971년생
시집 『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코끼리 주파수』
『고백이라는 장르』, 산문집 『이름이 없는 너를 부를 수 없는 나는』『아름다움에 병든 자』 『하루 맑음』 등


라다크,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판공초

전날, 레
지나가는 여행길에 골목이나 허름한 작은 식당에서 짜이 끓이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고 싶었다. 뜨거운 짜이 한 잔 받아들고, 그 맛을 기억해두었다가 저녁에 숙소에 들어가서 내가 끓인 짜이와 맛을 비교해보려고 했다. 인도에 다녀온 지 몇 년이 지나서인지 현지에 서 마신 짜이 맛이 기억나지 않았다.
차와 음식을 직접 요리하면서 낯선 땅에 조금이라 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오지 일수록 현지의 차를 많이 마시라는 이야기를 어디선 가 들은 적이 있다. 이제는 직접 현지의 차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런다고 조금이나마 현지인이 될 수 있 으려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는 여행이 아니라 또 다른 일상을 살아보고 싶었다.
인도 라다크에 도착한 첫날은 무조건 아무것도 하 지 않고 숙소에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짧은 여행 일 정 때문에 괜히 여기저기 둘러보겠다고 길을 나섰다 가는 고산증에 걸리기 쉽다. 해발고도 3천500미터쯤 되는 라다크 중심도시 레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고산증 때문에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고산증 은 지독한 숙취와 비슷하다고 한다. 참으로 견디기 힘 든 일이다. 그러니 숙소에서 주는 밥만 잘 챙겨 먹고 하루를 지내야 한다.
라다크에 도착한 다음 날 저녁에 하늘호수 판공초 로 떠나기 위해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음식재료를 샀

다. 원통형 부탄가스를 팔지 않아서 몇 군데 더 상점을 들러야 했다. 다행히도 부탄가스를 구할 수 있었다.
판공초에서 모닥불에 맥주닭을 만들기 위해 닭고기와 캔맥주도 샀다. 그리고 나는 식료품 가게에서 짜이를 만들 재료를 구했다.
“짜이 만들 때 들어가는 재료 주세요.”
중년의 인도인이 상점 주인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짜이요.”
그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티?”
“예스. 마살라 짜이. 마살라 티.”
조금 의외였다. 짜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티라고 했다. 마살라 티.
“카다멈, 밀크, 슈가……. 음…….”
또 뭐가 있을까.
“시나몬.”
그리고 또 뭐가 더 있을 것 같았다. 아, 정향.
“정향이 영어로 뭐지? 몰라?”
뒤에서 기다리던 일행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정향을 영어로 뭐라 하는지 알 턱이 있나. 상점 주인장은 오래된 철제 상자를 열어서 카다멈을 꺼냈다. 추를 단 작은 저울에 올려놓고 무게를 쟀다. 그리고 다른 철제상자를 꺼내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분명 정향이었다. 내가 집에서 짜이를 끓일 때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한 정향.
“이걸 뭐라고 부르나요?”
“클로브스.”
“클로브스?”
“L, O, V, E, S."
나는 주인장이 불러주는 스펠링을 하나하나 따라서 발음했다.
“러브스?”
“클로브스.”
옆에서 듣고 있던 한 사내가 다시 스펠링을 정정해주었다.
“C, L, O, V, E, S."
그러자 주인장이 자신이 C를 빼먹었다고 또 스펠링을 불러주었다. 옆에 있던 사내가 나보고 짜이를 만들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놀라워했다. 나도 내가 놀라웠다. 식재료를 사는 데 설레기까지 하다니!

다음 날, 창라
세상에서 세 번째로 높다는 창라를 향해 가는 길이었다. 일행 중 볼일이 급한 이가 있어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마침 인가가 있어서 화장실을 이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집주인은 외부인의 접근을 거부했다. 한 50미터쯤은 될까. 그쯤 멀찍이 떨어져서 있는데 집주인은 몹시 경계하며 손사래를 쳤다. 고함까지 치는 듯했다.
꽤 화가 난 듯이 외부인을 꺼리는 게 분명했다.
왜 라다키들이 외부인의 접근을 기피하는지 느낌만으로 알 수 있었다. 온갖 여행자들이 모이는 레에서는 느낄 수 없었지만, 현지인이 사는 마을을 지나가면서야 비로소 현실을 마주 할 수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고, 도로가 깔리고, 돈이 들어오면서 라다키들의 삶은 위협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스마트폰과 카메라와 온갖 새로운 문명을 접한 아이들은 둘러봐야 보릿대밖에 없는 척박한 땅에서 벗어나려고 할 것이다. 문명은 주변의 모든 것을 도시로 끌어들인다.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더 넓은 인근 지역을 파괴하게 된다.

라다크 중심도시 레와 은하수

 

라다크 마을들은 외지인의 발걸음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 자체가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단 한순간의 손사래만으로도, 멀찍이 떨어져 다급하게 거부하는 목소리만으로도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서지 말자. 괜한 에피소드 하나쯤 챙기려고 불쑥 그들의 삶에 끼어들지 말자. 나는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다. 이곳에 책임을 다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일행들은 가는 길 내내 여행자의 자세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창라를 향해 가는 길은 고원의 굽잇길을 돌고 돌아서야 갈 수 있는 험로였다. 차창 밖은 그대로 허공이었다.

“심장이 쫄깃해지네요.”
돌아오는 차량을 만나는 경우에는 길을 비켜주느라 절벽 가까이 차를 붙일 수밖에 없다. 멀리 보이는 설산과 초록의 계곡을 건너다보지 않고는 가파른 절벽 길을 오르지 못할 것이다. 이런 길에서 차량이 절벽으로 굴러 떨어져 여러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숱하게 들어왔다. 고원의 산맥은 계곡 사이로 흘러내린 눈 녹은 물줄기가 작은 내를 이루어 초록으로 가득했다. 그 사이사이에 모여 있는 마을이 보였다. 그러나 저 아름다운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초록의 계곡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아야 한다.
다가서는 그때 모든 것은 슬픔 속에 사라지고야 말리라. 내가 그렇고, 또 저이들이 그러할 것이다.
수많은 길 중에 어느 한 곳에 나는 서 있었다. ‘라다크(Ladakh)’는 여러 개의 길이라는 뜻이다. 길의 복수형이 라다크다. 아래로는 히말라야와 위로는 카라코람산맥이 가로막힌 라다크는 고립된 곳이 아니라 여러 개의 길이 모이고 뻗어나가는 곳이다. 고원의 가파른 산자락을 타고 수많은 길이 이어져 있다. 길 아닌 곳조차도 누군가 길을 만들어 갔으리라. 소금가마니를 실었을까. 잘 빻은 보릿가루를 짊어졌을까. 눈이 크고 순한 짐승의 잔등에 짐을 싣고 어느 설산을 넘어가던 오래된 길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으리라. 수줍은 아내의 손가락에 끼워줄 은가락지를 만들기 위해 말린 살구 한 포대를 들고 깊은 마을의 대장간을 찾아 들어갔으리라. 그 길에 살구꽃이 한창 흩날렸으리라.
내가 가는 길이 라다크다. 여러 개의 길, 그 가운데 어느 한 길 위에 나는 있다. 5천미터를 훌쩍 넘는 창라의 높은 하늘에서부터 내려가는 길이 구불구불 보였다. 사람이 지나가는 길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처음이었다. 이 높은 곳에서 숨이 가쁘지 않았다. 심장이 뛰지 않았다. 바람으로 경전을 읽고 있는 타르초와 룽다가 높은 하늘을 조금 더 가까이 붙들고 있었다. 아름답다는 생각뿐이었다. 창라 위에 모인 사람들조차 고요했다. 내려가는 길이 보여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판공초
창라를 넘어서 도착한 판공초는 시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듯했다. 멀리서 보이기 시작하는 호수의 빛깔은 도저히 이 지상에서 찾을 수 없는 경이로운 푸른빛으로 찬란했다. 3천200미터급의 도시 레에서도 희박한 산소 때문에 숨이 가쁘고 간간이 두통에 시달렸는데, 무려 5천600미터나 되는 고개를 넘어 4천200미터에 이르는 호수에 도착했으니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고산지대에 큰 무리 없이 적응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몰려들자 이쯤 되면 라면 하나 끓여야 한다고 다들 나를 바라보았다.
“딱 지금이야.”

판공초 가는 길, 계곡 마을

 

그 하늘호수에서 잔물결에 놓인 돌 하나를 누군가 주워들었다. 나는 빈 물결,
내 손 하나뿐인 사람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등 뒤로 해가 기울었다. 푸른 호수가 어둠을 받아들여 고요히 어둠으로 차오를
때였다. 호수 건너 높은 설산 위로 만월이 떠오르고 있었다.
내 손에 누군가 돌 하나를 쥐여 주었다.


그랬다. 그때였다. 숨 좀 쉴 만하니 온몸이 평안해지고 나른해졌다. 뜨거운 국물에 꼬들꼬들한 면발을 흡입해줄 때였다. 고산증 때문에 판공초에 도착하자마자 실신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심장이 멈추고, 피가 온몸에 제대로 돌지 않아 사경을 헤매면서 레까지 다시 실려 왔다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다행히도 누구 하나 이상 증세를 보이지 않았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라면 하나 못 끓이는 사람은 없다. 아니, 모두들 라면이라면 제각각 자신만만한 조리법을 갖고 있다. 라면을 끓여온 지가 어느 세월이던가.
“형, 텐트 좀 걷고 해요. 안에서 숨이 차는 것 같아. 불이 산소 다 태워버리잖아.”

“괜찮아. 이 정도로 뭘.”
그러나 망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라면을 끓이고야 말았다. 맹탕이었다. 일부러 이렇게 끓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최악이었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낯선 도구를 이용해 조리를 하다 보면 가장 잘하는 음식도 망치기 마련이다. 여행 중에 티스푼을 잃어버리고 나서 차 한 잔 타는 것도 쉽지 않을 때였다.
그래도 나는 믿었다. 여행이 아니라 나는 내 삶을 살고 있다고. 낯선 것이 아니라 이게 내 일상이라고. 다잃은 자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믿게 된다.
라면이나 끓이려고 판공초까지 오지는 않았다. 실은 라면이라도 끓이지 않았으면 잔물결로 밀려드는 온갖 상념들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라면만 끓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호숫가를 따라 조금 걸었다. 야크 무리가 돌밭의 풀을 뜯고 있었다. 잔물결이 말갛게 치고, 저 호수 건너산맥은 믿음직스러웠다. 그 앞에 낮게 앉아 있으니 하늘도 호수도 서로 구분이 없었다. 그 자락에서 잔물결에 손길을 내어주는 내가 있어 하늘이고 호수로 다시 돌아가고들 있었다. 그 하늘호수에서 잔물결에 놓인 돌 하나를 누군가 주워들었다. 나는 빈 물결, 내 손 하나뿐인 사람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등 뒤로 해가 기울었다. 푸른 호수가 어둠을 받아들여 고요히 어둠으로 차오를 때였다. 호수 건너 높은 설산 위로 만월이 떠오르고 있었다. 내 손에 누군가 돌 하나를 쥐여 주었다.
밤새 만월이 지나가고 나자 판공초 위에 샛별이 하나 가만히 남았다. 나도 남았다. 그리고 시 한 편이 남았다. 판공초도 나도 시 한 편도 가만히 그 자리에 남아들 있었다.

잔물결 하나 없이 고요할 수는 없다
삼엽충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삼엽충을 생각했을까
누군가 가만히 오래된 물결에 손을 내밀다 말고
돌을 고른다
나는 빈 물결만 바라보고 있다
지금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다

달이 떠오르기 전에 잠시
어둠이 펼쳐지겠지
며칠은 내내 그랬으니까
유라크 나무 사이의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사내가

곧 달이 뜰 거라고 말했으니까
어젯밤 옥상 위에서
오래된 밤을 바라보았으니까
누가 나를 꿈꾸기를

작은 돌들이 물결에 떠오르다 말고 가라앉았다
지금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뿐
젖은 돌은 젖은 돌이 되려 하고
줄기러기는 줄기러기로 떠나갔다
오늘밤에는 뭘 할 수 있을까

옷소매가 길어 손등을 덮었다
자주 팔뚝을 쓸어 올려 설산 너머 팔이 길어져도
긴 옷소매가 흘러내려 이내 손등을 가렸다
두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만 나를 에운다

혼자였다면 죽은 사람이었을 거라고
누가 모닥불을 피운다
내가 아는 말로 나는 가까스로 말할 수 있을 뿐
다 지우고 나자 내 손에 돌 하나 쥐어 있었다

- 김태형,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