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탄실이와 주영이

라다크,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한 아웃사이더의, 이야기 만들기에 대한 홀림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이 깎이’는 것을 읽어내는 것이 문학

특집을 기획하며 ①고양이 사냥의 추억 ②최초의 반려묘 까맹이부터 이백 살 사이보그 고양이까지 ③펫은 실전이다 ④해방촌의 반려종들을 위하여

텍스트에 대한 경의

자파(自派)의 탄생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우주이다

『반노』는 ‘인간’을 지키자는 처절한 투쟁기였다

하루 2천640번 금형을 드나든 손의 기록

아름다움에 다다르려는 맹렬한 노력

홍진에 묻힌 분내……

추운 날의 벗, 세한삼우(歲寒三友)

노을바다의 장엄

양요리루 의자에서 커피를 압음하니 문명개화 이 아닌가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제2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시 부문 수상작 리뷰-소설부문 수상작 리뷰-번역부문

얇아지는 장편, 환영할 일인가

①소각,저작 ②외경,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인가요

①30년의 끝 ②양들의 침묵

새(NEW)

거울의 미로

①녹색문명(綠色文明) 시대의 숲 ②새끼 ③재와 유리의 미래

소설답지 않은, 그래서 더 공감하는

이광수, 일본에서 크게 취하다

머릿속에 쌓인 문제를 풀 수 없을 때

불안과 행운 사이에서

엘리엇 업데이트하기

‘더듬더듬 먼 길’을 가는 시와 번역

경계없는 예술 향한 10년여의 노정

대산창작기금,대산세계문학총서

대학생 아시아 대장정 3차 리더십 캠프 및 아시아프론티어클럽(AFC) 발대식 개최

유령작가 X

거울의 미로

편집자 주 ㅣ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창작과 감상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필자에게 복면을 씌운다. 유령작가의 정보는 작가의 희망 여부에 따라 다음 호에 공개한다.

카프카는 이야기를 멈출 곳을 찾을 수 없어 꿈속에서도 글을 썼던 작가였다. 그는 이야기꾼의 요령을 가지지 못했다. 그의 장편들이 모두 미완성으로 남겨진 것 은 단지 그에게 시간이 부족했고 건강이 받쳐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근본 적으로 이야기는 끝이 없는 것이고, 어느 누구에게나 삶은 끝나게 되어 있다. 무한 한 이야기의 숲속에 통나무집을 지은 이야기꾼이라면, 오늘은 이름 모를 나무열매 와 쓸모없는 나뭇가지 몇 개를 주웠으니 이제 늦은 저녁식사를 하러 서둘러 발길 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삶의 식탁과 침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무한 속에서 유한의 형식을 찾아내지 못하면, 삶의 발걸음은 이야기보다 먼저 쓰러지고 끝없는 이야기의 유령만이 남아 영원히 떠돌게 된다.

손거울 두 개만 가지면 우리는 누구나 무한의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거울의 무한에 갇힌다는 것은 영겁회귀의 지옥에 빠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거울을 화장실처럼 쉽게 들락거리는 일상의 감각으로 그것이 정녕 지옥의 맛인지 천국의 맛인지 감별할 순 없을 것이다. 맛보고 싶은가? 나는 이런 혼잣말을 할 때면 온몸 이 뱀의 혀처럼 부드러워진다.

나는 거울 제작자다. 17세기 베니스의 거울 수공업자처럼 비밀스러운 기술로 유리를 거울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완벽한 공산품이 도달할 수 없는 고독한 수 공예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체호프의 단편 중에 「굽은 거울」이라는 이야기를 읽어 보면, 거기엔 신적인 경지에 다다랐던 어느 거울 제작자의 이야기가 완전히 누락되 어 있다.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는 말이 이 경우에 정확히 해당된다. 그러나 바로 그 지워진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내 야망을 발견했다.

단편소설의 위대한 아버지로 불리는 체호프의 이 소설은 특히 콩트처럼 짧은 길 이가 특징적이고, 짧은 이야기의 본질이 요약이 아니라 압축과 침묵, 그리고 메아 리임을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체호프는 이야기를 멈출 줄 알았다. 이야기는 거 울의 비밀을 알게 된 남편의 탄성에서 멈춘다. 독자들은 이미 모두 알고 있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는 한 인물이 문제적인 것은 그는 이야기 속에 사는 자이고, 거울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살갗을 가진 아내의 것이며, 그는 거울 속의 여자가 내뿜는 매혹의 빛에 꽁꽁 묶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겁이 많았던 그가 뒤늦게, 아아, 너무 늦게 거울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미녀와 야수’가 사는 성이었다. 만약 체호프가 조금 더 이야기의 힘에 끌려들어가서 더 깊은 숲의 어둠에 잠겼다면?

이야기가 길어지기 시작하면…… 이야기의 사슬은 검은 머리카락처럼 꼬이고 빠 지고 흩어지고 가늘어진다.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많은 머리카락을 길바닥에 떨 어뜨렸나. 더 이상 어디로도 걸어갈 힘이 없어져 나의 여행은 이제 멈춘 줄 알았는 데, 어느새 지평선 너머의 사람들과 연결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재처럼 희고, 죽은 벌레처럼 푸석한 머리카락 한 올을 나는 의외의 장소에서 물음표처럼 줍게 되는 것이다. 그가 여길 지나갔다?

그 젊은 부부가 가계의 위험한 전설로 전해지던 문제의 거울을 발견한 것은 조 상들의 초상화로 사방의 벽이 장식되어 있는 널찍하고 휑뎅그렁한 방에서였다. 그 방은 40년 후, 그러니까 1948년 어느 여름날 오후 어린 자손들이 농구팀을 꾸려 경기장으로 써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은 크기였다. 한때는 이곳에도 피아노 선율 이 흐르고, 백 개의 촛불이 꽂힌 생크림 케이크 같은 샹들리에 아래 한껏 멋을 부 린 귀부인들과 신사들이 따스한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 꽃잎처럼 서로를 스 치며 춤을 추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멋쟁이들의 살은 진흙이 되었고 하 얀 뼈는 음침한 이야기만 흘러나오는 악귀의 피리가 되었다. 증조할머니의 전설이 서려 있는 성을 찾은 젊은 부부가 무거운 성문을 힘겹게 열어젖혔을 때, 이들을 맞 아 소란을 피운 것은 이 성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새끼를 낳고 새끼의 새끼를 치며 개체수를 불려가던 검은 쥐떼였다. ‘굽은 거울’은 오랫동안 이 쥐들의 무한번식을 어지럽게 반사하고 있었을 것이다.
증조할머니는 이 굽은 거울에 얼굴을 한 번 비춰본 그날 그 시각 이후로 남은 인 생을 거울에 사로잡혀 살았으며,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광기로 받아들여져 미친 피의 유전에 대한 불안을 자손들의 심장에 남기게 되었다. 성문을 열고, 자신감과 여유가 느껴지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조상들의 미로를 아내에게 안내하며 걸었던 이 남자도 알고 보면, 집안의 모든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불안의 심지가 그 내면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다만 조상들의 사이렌이, 그 오래된 두려움의 불꽃이 뒤늦게 남자를 휘감았을 뿐이다. 어떤 경우엔 조금 늦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어진다. 남자는 전설을 망각했고, 거울을 무시했다. 상상력 또한 빈약했다. 거울 안에 깃들어 있는 거울 제작자의 놀라운 공력과 좋은 의도를, 그리고 언제나 의도와는 무관하 게 펼쳐지는 사태들을 그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조심성을 잃었고, 그래서, 박물관에만 오면 아는 척하길 좋아하는 관광객처럼 스스로 나서서 심약한 아내를 이 전설의 거울 앞에 데려다놓고 만 것이다.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판 것이 다. 거울을 한번 힐끗 들여다보는 것 같았던 그녀가 갑자기 졸도를 하는 일이 벌어 지자, 그제서야 남자의 머릿속에서는 맹렬하게 사이렌이 울렸다. 내 어둠의 조상인 증조할머니. 거울을 안고 죽어갔던 그 노파의 공허한 눈동자. 거울의 메아리. 그녀 의 혼잣말들. 아무도 그 혼잣말들의 안개를 헤치고 거울의 유령으로부터 그녀를 빼낼 수 없었다. 미친 노파는 죽었으나, 거울의 유령은 노파와 함께 죽지 않았다.

노파의 혼잣말은 멈췄으나, 끝없는 이야기의 유령은 언제나 더 할 말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울은 오랜 세월을 기다리고 기다렸고, 마침내 내 아내를 발견 했다. 거울이 나의 아내를 선택했다. 아아, 내가 거울에게 아내를 갖다 바친 꼴이 었다. 거울아, 대체 이 여자에게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두려움이 그의 영혼을 점령하자, 그는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었다. 그는 거울과 아내 사이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고, 마음이 초조 하여 일단 아내를 거울로부터 떼어놓기 바빴으며,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이 요 물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까만 생쥐들의 성에 봉인되기만을 바랐다. 정말이지, 쓸모 없고 더럽기만 한 짐승이야. 그렇게나 오랜 시간을 줬는데 거울 하나 갉아먹지 못 하다니.
그러나 얼마 후 정신을 차린 아내가 애타게 찾기 시작한 것은 거울, 오로지 거울뿐이었다. 거울을 가져다줘요. 제발 나의 거울을 가져다줘요. 할머님의 거울을…….
모든 사물을 왜곡시켜버리는, 남자에겐 단지 괴상한 형상만을 뽑아내어 사람을 기분 나쁘게 키득키득 놀려대는, 이 거울의 고르지 못한 표면은 노인의 떨리는 손 바닥처럼 어지러운 주름과 굴곡을 가지고 있었다. 이륙하는 비행기에서 마지막으 로 본 고국의 땅덩어리 같았다. 남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거울을 떠 났으나, 아내는 향수병에 걸린 듯 거울을 찾았고 거울 때문에 거의 죽어가고 있었 다. 어쩔 수 없었다, 거울을 아내에게 가져다 바칠 밖에. 그래서 거울은 아내와 함 께 봉인되었다. 그는 거울과 함께 아내를 잃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그가 마침내 아내 뒤에 서서 그녀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발견하기까지. 그러니까 10년 만에 그는 아내를 비추는 거울을 들여다본 것이다.
이 굽은 거울이 10년 동안 내 아내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보게 된 것이다. 거 울은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물임에 틀림없었다. 거울의 존재 이유는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거울은 사랑에 빠진 연인의 눈동자였다. 광기 어린 거 울의 눈동자가 10년을 지칠 줄 모르고 바라보았던 것은, 아내의 모습을 왜곡시키 고 왜곡시켜 미의 이데아에 이르는 마지막 계단에 올라선 아내의 표상이었다.
거울은 아내의 연인이었고, 그는 아내를 버린 남자였다. 거울은 아내를 행복하게 만들었고, 그는 아내를 불행하게 했다. 아니다, 그는 아내에게 불행의 얼룩을 묻 힐 수 있을 만큼의 의미도 이미 없어진 존재였다. 그는 잊혔다. 그러니까, 10년 동 안 아내를 잊은 것이 아니라, 아내에게 잊힌 것이었다. 굽은 거울은 아내의 지극한 아름다움 뒤에 일그러지고 비틀어진 그의 초상을 냉담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내 뒤에 서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 구도가 그의 마음에 들었을까? 그는 이제 자신 에게 완전히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음을 직감하면서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걸 느꼈다.
아내가 비명을 질렀다.

거울에 깊이 연루된 삶은 대부분 비극적인 파탄을 맞이한다.
그해 8월이 가고, 짧은 가을이 가고, 긴 겨울이 찾아왔다.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었고, 한나절을 내린 눈이 세상을 하얗게 지우고 눈멀게 만들고 있었다.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 벌어지기 좋은 고요함 같은 것이 그 안에 깃들어 있었다.

그날도 남자는 여자 뒤에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누르고 누른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와 거울 속으로 뛰어들었다. 불쑥, 어떤 예고나 조짐도 없이.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겨났을까. 바위를 들어 올려 괴물에게 던지는 헤라클레스의 힘으로 그는 자신을 거울에게 내던졌다. 거울은 박살이 났다. 거울의 날카로운 파편 이 그의 전신에 꽂혔다. 거울 속에서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려고 애쓰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처럼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거울 조각들이 다양한 각도로 빛을 난반 사하는 그의 바디(body)는 잠든 이를 괴롭히는 밤의 괴물체 같았고, 또 어찌 보면 잔혹한 예술작품 같기도 했다.
그의 아름다운 아내는 거울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그는 다시 한 번 아내를 잃었고, 사라진 아내가 남긴 낯선 여인이 칼처럼 기다란 거울 조각을 쥐고 그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핏방울이 뚝, 뚝, 뚝, 떨어졌다. 거울의 반짝이는 칼날은 정확히 그의 푸른 눈동자를 노리고 있었다.

굽은 거울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울 제작자의 탐구와 열정과 기술, 그리고 다른 그 무엇보다도 긴 시간이 오롯이 바쳐져 필연에 도달하게 된 사물이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아름다움을 대상의 속성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굽은 거울의 제작자들에게 아름다움이란 대상을 감각하는 차원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개념으로부터 우리는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몸을 움직여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감각하는 예민한 감각기계를 제작하고자 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거울은 살아있는 한 개의 눈동자였다. 호기심에 가득 찬 눈, 욕망에 이글거리는 눈, 노여움으로 폭발하는 눈, 슬픔에 젖은 눈, 사랑하는 사람을 하염없이 어루만지는 눈……. 이 중에서 우리는 사랑에 빠진 눈동자를 만들고 싶었다. 영원히 변 치 않는 사랑을 만들고 싶었다.
거울에 유독 집착했던 몇몇 독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계를 거울로 도배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할 수만 있었다면 모든 인민들의 눈알을 뽑아 굽은 거울로 바꿔 끼웠을 것이다. 못할 일도 없고, 할 수 없는 일도 없다고 믿는 것, 그것이 그들을 잔인하게 만드는 내적 속성이므로, 우리 굽은 거울 제작자들은 은밀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사랑을 지켜갔다. 우리는 권력에 우리의 사랑을 내 어주지 않았다. 어느 날 동네 골목길에서 납치되어 독재자 앞으로 붙들려갔던 어떤 한 거울 제작자는 그 행방도 생사도 알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한 명의 굽은 거울 비밀조합원이 실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절대 권력자는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던 경호대장의 총에 맞아 암살되었다. 탕, 탕, 두 발의 총성이 울렸으나, 사실 한 발이면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세상 사람들은 인형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 듯이 자신의 심장 고동소리에 어리둥절하였다.

우리의 사랑은 안전한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랑을 주었으나, 당신은 눈이 멀었구나. 그러나 나의 사랑은 그치지 않으니, 나는 오늘도 이 세상에 하나뿐인 거울을 만든다. 같은 사람이 없듯이 같은 거울도 없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끝을 모른다.
어느 날 아침 벌레로 깨어난 남자의 침대 맞은편에도 거울이 하나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