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탄실이와 주영이

라다크,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한 아웃사이더의, 이야기 만들기에 대한 홀림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이 깎이’는 것을 읽어내는 것이 문학

특집을 기획하며 ①고양이 사냥의 추억 ②최초의 반려묘 까맹이부터 이백 살 사이보그 고양이까지 ③펫은 실전이다 ④해방촌의 반려종들을 위하여

텍스트에 대한 경의

자파(自派)의 탄생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우주이다

『반노』는 ‘인간’을 지키자는 처절한 투쟁기였다

하루 2천640번 금형을 드나든 손의 기록

아름다움에 다다르려는 맹렬한 노력

홍진에 묻힌 분내……

추운 날의 벗, 세한삼우(歲寒三友)

노을바다의 장엄

양요리루 의자에서 커피를 압음하니 문명개화 이 아닌가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제2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시 부문 수상작 리뷰-소설부문 수상작 리뷰-번역부문

얇아지는 장편, 환영할 일인가

①소각,저작 ②외경,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인가요

①30년의 끝 ②양들의 침묵

새(NEW)

거울의 미로

①녹색문명(綠色文明) 시대의 숲 ②새끼 ③재와 유리의 미래

소설답지 않은, 그래서 더 공감하는

이광수, 일본에서 크게 취하다

머릿속에 쌓인 문제를 풀 수 없을 때

불안과 행운 사이에서

엘리엇 업데이트하기

‘더듬더듬 먼 길’을 가는 시와 번역

경계없는 예술 향한 10년여의 노정

대산창작기금,대산세계문학총서

대학생 아시아 대장정 3차 리더십 캠프 및 아시아프론티어클럽(AFC) 발대식 개최

우리문학의 순간들

이광수, 일본에서 크게 취하다

글 김남일 ㅣ 소설가, 1957년생
장편소설 『청년일기』 『국경』 『천재토끼 차상문』, 소설집 『일과 밥과 자유』 『천하무적』 『세상의 어떤 아침』 『산을 내려가는 법』,
산문집 『책』 『수원을 걷는 것은 화성을 걷는 것이다』 등

1942년 11월 1일,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는 도쿄역에 도착하자마 자 곧바로 황거를 찾아 요배했다. 때마침 가을비가 갠 저녁 어스름, 이야말로 맑음과 어둠이란 이름에 가까운 황혼이었다.1)
“보잘것없는 신하 가야마 미쓰로, 삼가 성수(聖壽)의 만세를 빕니 다.”
활처럼 깊게 허리를 접어 절하는 순간, 그는 가슴 벅찬 감격에 젖 었다.
스스로 제2의 고향이라 부르는 도쿄였다. 일진회의 장학금을 받고 처음 도일했을 때가 열네 살이었다. 그때 이후로 몇 차례나 도쿄 땅 을 밟는 셈이지만 이날처럼 뜨거운 감개를 느낀 적은 없었다.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일본 학생들이 보내던 경멸의 눈초리 때문에라도 도 쿄가 좋을 것은 하나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그들을 피해 골목골목으 로만 다니곤 했다.

- 석탄 백탄 타는 데는 / 연기만 퍼벌석 나건만 / 우리네 가슴 타는 덴 / 연기도 재도 없네


동포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사발가」가 유행할 때였다. 그 역시 노래 끝 에 후렴으로 “에야라 난다 듸야라, 네가 내 사랑이라”하는 데 이르러서는 저도 몰래 주르륵 눈물을 쏟는 때가 많았다.2) 그러나 그는 잘 참았고 잘 버텼다. 뛰어난 벗들도 만나고 공부도 잘 마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도쿄 에서 그는 다가가면 늘 무엇인가 미끈둥하고 빠져나가는 이물감을 완전히 떨궈버리지는 못했다. 물론 메이지학원 시절의 시로가네 교정만큼은 수시 로 외로움을 타던 조선의 고아 소년에게 큰 위안이었다. 특히 이맘때 가을 이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던 은행나무들이 멀리서 보기만 해도 한없이 부푸는 꿈을 안겨주었다. 사실 “대일본제국을 애호하시옵소서. 이토 히로 부미 공 같은 인물을 보내주시옵소서”하는, 일본인 목사가 이끄는 기도에 크게 충격을 받은 곳도 바로 거기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지난 시절의 그 모든 ‘이광수’가 아니라 성을 새로 만 들고 이름도 바꾸어 ‘가야마 미쓰로’로서 처음 황도(皇都)를 밟은 것이었다.
‘나는 이제 오직 천황의 신민일진저, 내 자손도 대대손손 천황의 신민으로 살리라.’
그랬다. 그는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은 아니지만, 한 발짝이라도 더 천황 의 신민답고 싶은 충심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가야마 미쓰로인가. 혹 ‘가야마’ 는 우리 민족의 영산 중 하나인 묘향산(妙香山)에서 그 ‘향산’을 따온 것인가.
천만에, 아니었다.

- 지금으로부터 2천 6백년 진무 천황께옵서 어즉위를 하신 곳이 가시하라(橿原)인데 이곳에 있는 산이 가구야마(香久山)입니다. 뜻깊은 이 산 이름을 씨로 삼아 ‘향산’이라고 한 것인데 그 밑에다 ‘광수’ 의 ‘광’자를 붙이고 ‘수’자는 내지식의 ‘랑’으로 고치어 ‘향산광랑’이라고 한 것입니다.3)

이제 그는 그 뜻깊은 새 이름으로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조선 대표단은 다섯이었다. 유진오와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 박영희)가 함께했다. 《경성일보》 학예부장 데라이 에 이, 경성제대 교수 가라시마 다케시도 조선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중국, 만주, 몽골, 대만에서도 각기 대표단을 보냈다.
대회 첫날, 그는 「동아정신의 수립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이런 요지의 연설을 했다.
“전 세계에 자비를 설한 성자는 석가이고 공자입니다. 그러나 이 자비를 참으로 실행하는 쪽은 천 황 한 분을 제외하면 달리 없습니다.”
“우리들은 천황을 보좌하다 죽어야 합니다.”
“나는 이 자기를 완전히 버리고 자기를 송두리째 바치는 정신이야말로 대동아정신의 기본이 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레와 같은,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다. “황군이 피로써 씻어낸 동아에 진정 정명의 대동아 문화 를 수립코자 함”이라는 대회의 취지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발언이었다. ‘동아’의 다른 지역에서 온 대 표들은 비교불가였다. 그는 말과 혼이 완벽하게 일치된, 이제 곧 완성될 ‘팔굉일우’ 대일본제국의 첫 번째 신민이기를 자청했다.
가야마 미쓰로는 이렇게 대회 첫날부터 단연 우뚝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11월 7일, 도쿄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난 뒤에야 홀가분하게 뒤풀이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내로라 하는 일본의 작가들이 그의 곁으로 몰렸다. 이날 밤 그는 특히 소설가 하야시 후사오로부터 끈질긴 권유를 받았다. 그는 나프(일본 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맹장이었지만 전향한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꼭 취해주게. 취한 ‘이광수’를 보여주게.”
하야시의 말뜻을 그는 잘 알 수 있었다. 나도 해봐서 알지만 전향이 어디 하루 이틀의 허튼 변장 술이던가, 이런 뜻이겠다. 게다가 언젠가 “조선의 작가는 전향해도 돌아갈 고향이 없다”고 공언한 하 야시가 아닌가. 가야마는 “그렇다면야” 하는 심정으로 권하는 족족 마셨다. 그래서 취기가 도는 상태 에서 떠들어 마침내 하야시의 주문대로 앞뒤를 알지 못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다른 방도는 없었다.
일체 분별을 다 내려놓는 날이 곧 깨닫는 날이다. “사일난제오(斜日亂啼烏), 사일난제오”, 그는 잠결에 도 이렇게 중얼거렸을지 모른다. 실은, 석양에 어지럽게 우짖던 까마귀 같던 제 울음도 더는 들을 수 없었다.4)
오사카를 거쳐 나라에 간 것은 11월 10일이었다.
거기서도 도쿄의 밤이 재연되었다. 다만 이번에는 대회의 주관자이기도 한 가와카미 데쓰타로가 총대를 메고 나섰다. 일본문학을 대표하는 잡지 『문학계』를 이끌었던 평론가로서, 가야마보다는 열 살이나 어렸다.
“마셔, 마셔.”
가야마는 가와카미가 권하는 대로 대여섯 잔을 연거푸 마셨다. 가야마란 자식, 어서 취해 속내를 드러내 보라는 투였다. 너는 누구냐? 네가 일본인 가야마 미쓰로란 말이냐? 그렇다면 조선인 춘원 이광수란 자는 어디 갔느냐? 대만 대표로 온 일본 작가 하마다 하야오가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 의 눈에는 서먹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다. 가야마는 일본 작가들 사이에서 덫에 갇힌 짐승처럼 일방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었다.
“반도 작가의 괴로움이라고? 그래, 그걸 내세워 어쩌자는 건가? 문학의 괴로움이란, 가야마, 그런 따위가 아니다.”
하마다가 슬쩍 보니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눈물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훗날 김윤식 교수는 이 장면을 여러 각도로 분석했다. 그러면서 특히 그곳이 바로 일본의 옛 도읍 나라였다는 사실에 주목, 그날 가와카미의 알량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술에 취하면 취할수록 가야 마 미쓰로는 가면을 벗고 조선인 이광수가 되었노라 했다. 그것도 식민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에 불 교와 문명을 전해준 백제인 이광수가 되어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거라고 해석했다.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면 진정한 승자는 가면을 쓴 이광수가 되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 장면을 몰랐을 때보다 백배나 더 가슴이 비릿한 건 어쩐 일인가!
내 귀엔 조선인 후배 학도들에게 “공부야 언제나 못하랴 / 다른 일이야 있다가 하지마는 / 전쟁은 당장이로세”하며 전장에 나가기를 독려하던 그의 목소리만 더 쟁쟁 울릴 뿐이니…….


1) 이 글은 김윤식, 『일제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서울대학교출판부, 2003)에 크게 기댔다.

2) 이광수, 『나의 고백』(1949).
3) 「지도적 제씨의 선씨(選氏) 고심담」, 《매일신보》 1940년 1월 5일자.
4) 이광수, 소설 「난제오」(1940)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