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탄실이와 주영이

라다크,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한 아웃사이더의, 이야기 만들기에 대한 홀림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이 깎이’는 것을 읽어내는 것이 문학

특집을 기획하며 ①고양이 사냥의 추억 ②최초의 반려묘 까맹이부터 이백 살 사이보그 고양이까지 ③펫은 실전이다 ④해방촌의 반려종들을 위하여

텍스트에 대한 경의

자파(自派)의 탄생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우주이다

『반노』는 ‘인간’을 지키자는 처절한 투쟁기였다

하루 2천640번 금형을 드나든 손의 기록

아름다움에 다다르려는 맹렬한 노력

홍진에 묻힌 분내……

추운 날의 벗, 세한삼우(歲寒三友)

노을바다의 장엄

양요리루 의자에서 커피를 압음하니 문명개화 이 아닌가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제2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시 부문 수상작 리뷰-소설부문 수상작 리뷰-번역부문

얇아지는 장편, 환영할 일인가

①소각,저작 ②외경,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인가요

①30년의 끝 ②양들의 침묵

새(NEW)

거울의 미로

①녹색문명(綠色文明) 시대의 숲 ②새끼 ③재와 유리의 미래

소설답지 않은, 그래서 더 공감하는

이광수, 일본에서 크게 취하다

머릿속에 쌓인 문제를 풀 수 없을 때

불안과 행운 사이에서

엘리엇 업데이트하기

‘더듬더듬 먼 길’을 가는 시와 번역

경계없는 예술 향한 10년여의 노정

대산창작기금,대산세계문학총서

대학생 아시아 대장정 3차 리더십 캠프 및 아시아프론티어클럽(AFC) 발대식 개최

기획특집

③펫은 실전이다

글 김상혁 ㅣ 시인, 1979년생
시집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 등

‘펫의,펫에 의한,펫을 위한’ 문학 3



1. 고양이 여섯 마리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일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낭만과는 거리가 멀 뿐더러 오히려 힘들고 더러 우며 짜증나는 일이기도 하다. 무얼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나 싶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키우는 여섯 마 리의 고양이가 집 안에서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약간만 적어보도록 하겠다. 고양이 앞에 붙는 번호는 나와 아내가 파악하는 저들끼리의 서열이다. 1번 고양이, 이름은 마리. 꼬리 끝이 말린 채로 태어나서 마리다. 이런저런 말썽이 거의 없는, 아주 조용한 녀석인데, 날 때부터 좀 약골인지 철마다 감기 한 번을 피하질 못한다. 증세가 심하면 약값이 깨지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가계에 부담될 만큼은 아니다. 만일 내가 새로 태어나, 운명의 장난으로 또다시 고양이를 키워야 한다면 주저 없이 마리를 데려올 것이다. 2번 고양이의 이름은 요다. 생김새는 그렇지 않은데 양쪽 귀 사이가 멀어서 영화 <스 타워즈>에 나오는 요다를 연상시킨다. 이제 얘부터가 골칫거리인데, 이 녀석은 우선 장이 약해서 설사가 잦다. 손님 몇 명 다녀갔다고 설사하고, 밖에서 시끄럽게 공사한다고 설사하고. 더우면 덥다고, 추 우면 춥다고, 해버린다. 나와 아내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우리 요다는 매일 설사다. 그래서 화 장실 치우는 게 몇 시간만 늦어도 집 안이 온통 딱 그런 냄새다. 냄새는 그렇다 쳐도, 다른 고양이들 이 요다가 방금 사용한 화장실을 쓰다가 발을 잘못 디딜 때가 있는데 그럼 정말로 난리가 난다. 거실 여기저기에 찍힌 귀여운 고양이 발자국들을 발견하고 처음엔 그걸 순진하게 초콜릿이나 화분흙이라 고 생각하기도 했다.
뒤부터는 서열이 좀 애매한데 하여튼. 3번 이름은 꼬지다. 처음 구조하고 잘 씻겨놓았더니 정말 꽃 처럼(?) 예뻤기 때문에 이름이 그리 붙었다. 아니, 정화조에서 구조한 탓에 꼬질꼬질해서 꼬지였을 수 도 있다. 이건 아내와 내 기억이 갈리기에 확언하기 어렵다. 이 녀석은 탈 없이 지내다가 한 번씩 크게 사고를 내는 유형인데, 가령, 한 이틀 소변을 못 보고 끙끙거리길래 병원 데려가서 사진을 찍었더니, 방광 문제는 기본이고, 언제 삼켰는지 뱃속에서 바늘이 발견되는 식이다.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의사는 방광 때문에 엑스레이를 찍어본 게 오히려 이 아이를 살렸다는 희소식을 전하였고, 그날 나는 꼬지의 행운에 감사하며 총 200만 원을 결제해야 했다. 그때 한 번 계산한 것만 그 금액이고, 그 후로도 꼬지 의 방광은 수시로 문제를 일으키며 내 지갑을 털어갔다. 더는 바늘이 나오진 않았다는 점이 다행이라 면 다행이지만. 4번 고양이는 오리다. 올~올~ 하고 울어서 오리다. 얘는 전반적으로 건강한 편인데도 유독 잇몸은 엉망이다. 수면 마취와 치석 제거 시술 2회 받고 30만 원쯤 썼다. 오리는 아내와 나의 팔 다리에 가장 많은 상처를 남기는 고양이이기도 하다. 다른 고양이와 달리 손톱 감추는 법을 잘 몰라 서 그렇다.
5번 고양이 소리는 꼭 이불에다 오줌을 싼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방금 전에도 글 쓰다 말 고 이불 하나를 빨래 바구니에 넣고 돌아왔다. 심할 땐 하루에 이불 세 장을 세탁기에 돌린 적도 있 다. 참, 너무 소리 지르듯 운다고 해서 이름이 소리가 된 것인데, 이 녀석이 가끔 낮잠 자는 아이 옆에 서 울면 큰 사달이 나기도 한다. 아마 아이 키우는 집은 알 것이다……. 부모의 어마어마한 노력에 의 하여 겨우 낮잠에 빠진, 민감하기 짝이 없는 영유아가 잠든 지 고작 30분 만에 깨버리는 사태가 무엇 을 의미하는지를. 마지막 6번은 물리다. 분명히 다 죽어가던 새끼 고양이었는데, 막상 구조하려고 손 을 뻗으니 나를 얼마나 세게 물었던지. 물리를 구조하던 그날 내 손가락엔 구멍 몇 개가 생겼다. 그렇 게 악착같이 무는 고양이라고 해서 이름도 물리가 됐다. 얘는 정말……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 겠다. 하여튼 지난 삼 년 간 우리 가족 중에 이 아이를 제대로 만져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리는 항 상 어딘가에 숨어서 떨고 있는 중이다. 어찌되었든 우리 집에 들였으니 치석 제거 한 번은 해주어야겠 다고, 언젠가 아내와 내가 얘를 안방으로 몰아서 운반용 케이지에 담으려 한 적이 있다. 이리저리 엄 청나게 도망 다니다가 끝내 우리와 같은 방에 갇히게 된 물리는 침대 위에 선 채로 줄줄 오줌을 싸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눈물도 함께 쏟으며, 케이지로 들어가기 직전까지 내 손등을 엉망으로 할퀴고 깨물었다. 게다가 물리는 변을 보고 나면 바닥에 엉덩이를 끄는 습관도 있다. 사람으로 치면 휴지 대 신 마룻바닥으로 엉덩이를 닦는다고 할까. 이른 아침 거실로 나갔을 때, 바닥에 붓질을 한 듯한 자국 이 여기저기 죽죽 그어져 있다면 그건 보나 마나 물리의 소행이다.

 

2. 펫을 위한 문학은 없다
•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일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모르겠다, 얌전한 고양이 한두 마리 정도를 키 우는 건 아름다울지도. 이 글에 대한 청탁서에서 나는 “펫의, 펫에 의한, 펫을 위한 문학”이라는 구절 을 읽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펫의 문학’과 ‘펫을 위한 문학’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반 면, ‘펫에 의한 문학’이라는 말은 나의 글쓰기를 너무나도 정확히 설명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쩌 면 ‘개와 고양이의 문학’ 혹은 ‘개와 고양이를 위한 문학’이란 그들 존재와는 전혀 상관없는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나는 개를 지독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시, 고양이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작품과 마주치면 의심부터 든다. 펫과 함께 하는 나의 생활이 유독 고단하기 때문이기도 하 겠지만, 나는 펫의 문학 혹은 펫을 위한 문학이 근본적으로는, 펫을 어떤 이야기의 진실된 주인공으 로 세우지도 못하며, 펫을 존중받는 존재로서 다루지도 못한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로 지 은 문학 같은 것이 개나 고양이에게 유효한 방식으로 수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펫에 대한 일반 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홍보용 영상이나 계몽적인 의도를 가진 문학작품이 동물권에 관한 논의를 환기하는 데 유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대체로 이런저런 작품 속 동물들의 모습은 지나치게 이상화되 거나, 그렇게 미화되는 방식으로 대상화된다. 독자는 펫을 사랑하고 아끼는 작품 속 ‘나’의 모습에 감명을 받기도 할 것이다. 펫은 주인의 정서적인 안정감에 도움을 주며, 일상의 활력소가 되어주고, 또 한 조건 없이 인간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존재이기에, 도리어 우리가 동물을 통해 배우는 바가 적지 않다……. 같은 사고의 흐름이 내게는 얼마나 인간중심적으로 보이는지 모른다. 한해에 얼마나 많은 소동물이 길바닥에 버려지는지에 관해서는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는 서두에서 펫을 키우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하였으나, 실은 고양이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고양이들은 각자의 화장실을 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집에 놓을 수 있는 고양이 화 장실은 세 개뿐이다. 각자 입맛이 다르겠으나 사료는 지난 일 년 동안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으며, 서 로 성격이 죽도록 안 맞더라도 그들은 같은 사료 통에 머리를 집어넣은 채 같이 밥을 씹을 수밖에 없 기도 하다. 내가 하도 냉방기를 틀어서 감기에 걸리는 경우도 잦은 편이고, 특히 파주로 이사를 오는 과정에서 고양이들의 스트레스가 극심했다는 사실도 부인하기 어렵다. 고양이 여섯을 키우는 건 힘들 고 더러우며 짜증나는 일이라고 내 입장에서 말하기는 하였으나, 아내와 나의 생활에 필사적으로 적 응하려 노력하는 쪽은 오히려 그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이야말로, 이건 정말 힘들고 더러우며 짜 증나는 일이군, 하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고양이 말고 우리 집 강아지, 고양이 여섯에 비하여 조금 더 귀한 대접을 받는 김살구의 사정은 어떨까?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살구라는 이름이 붙었는 데. 그렇다면 살구의 문학, 살구를 위한 문학은 가능할까? 잔인하고 비위생적인 품종 교배의 결과로 살구는 어느 허름한 공장에서 귀엽고 깜찍한 상품으로 팔리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아내와 나는 왕십 리 쇼핑몰에서 데이트하는 중에 충동적으로 살구를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살구는 우리 아이보다, 고 양이 여섯 마리보다 훨씬 더 먼저 나와 함께 살기 시작하였다. 당시엔 펫숍에 진열된 강아지들이 그런 식으로 세상에 나온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얼마나 많은 개들이 유기되는지도 몰랐고. 어찌되었든 그날 살구는 말 못하는 노예처럼 팔려온 것이나 다름없다. 예쁘고 작은 장난감처럼, 좁디좁은 아파트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를 웃게 만들고 있었다.

3. 펫에 의한 문학 혹은 대상화의 문제
• 나의 삶은 개와 고양이에 의하여 철저히 휘둘리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닐에 고양이 똥을 담 아 버리고, 매일 아침마다 고양이 화장실을 닦고 소독한다. 고양이는 자기 털을 스스로 핥으며 몸 관 리를 하기 때문에 구토가 잦은 동물이기도 하다. 책상 위에 놓아둔 책을 펼쳤는데 페이지 수십 장이 토사물로 인하여 서로 잘 붙어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린이집 다녀온 아들 점심 먹이려고 고깃국 을 그릇에 담아두면 고양이털이 떠 있다. 우유를 마시려고 책상 위에 두면 고양이털이 떠 있다. 커피 에도, 술잔 위에도 떠 있다. 물론 콧속에도 들어간다. 아침에 방심하고 마루로 나오면 가끔 똥도 밟고 토도 밟는다. 어쩌다 아이가 밟거나 만지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펫에 의한 문학이라……. 문학은 생활에서 나오고, 나의 생활은 펫에게 휘둘리니까, 결과적으로 나의 문학은 펫에 의하여 휘둘리고 있다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개나 고양이를 일반적이고 일회적인 소재로 다룬 작품—그것조차 몇 편 되지도 않지만—들을 제외 하면, 실제로 내가 키우는 개나 고양이를 염두에 두고 쓴 시는 지금껏 딱 세 편이다. 한 편은 완전히 실패여서 시집에 실리지 못했고, 두 번째는 상당한 분량의 작품 안에서 아주 짧게만 언급된 수준이 다. 「하지만 내일은 꼭 운이 나쁘지」란 제목이었다. 그나마 세 번째 시가 가까스로 남이 읽을 만한 수 준을 어느 정도 맞추었다고 생각한다. 정말 가까스로 그렇다. 이는 「내가 잘 모르는 강아지」라는 제목 으로, 여러 시인들이 공동 필자로 참여한, 개에 관한 기획 시집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아침달, 2019) 에 실렸다. 아래 일부를 옮긴다.

내가 잘 모르는 강아지는
집 안 차가운 돌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는다
노트를 펼치고 멋진 생각을 꼼꼼히 적는다

(중략)

그러면서 내가 잘 모르는 강아지는
그가 지나쳐버린 봄날에서 계속 멀어졌다
어쩌다 머리 꼭대기에 떨어져 말라가는 배롱나무 꽃잎도 모르고

언젠가 적어둔 멋진 생각이 되기까지
언젠가 지팡이 짚고 서야 할 노견이 되기까지
내가 잘 모르는 내 강아지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개를 키우고 있다. 고양이에 대한 마음도 다르지 않다. 나는 나의 개에 관하여 시를 쓰면서도 “잘 모르는 강아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정말로 잘 모르니까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집 안 차가운 돌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는” 정도로 살구를 묘사해본 것이다. 잘모르니까, 인간처럼 취급하는 게 내 상상력의 최대치인 것이다. 개와 고양이에게 필요한 것이 문학일까? 뭐, 필요할 수도 있지. 하지만 문학보다는 법. 좋은 문학보다는 좋은 법. 이렇게 거듭 생각할 수밖에 없긴 하다. 나의 문학은 펫을 위하지는 못하고, 펫을 잘 대하지도 못하고, 그저 휘둘리면서, 그렇게 휘둘리는 방식으로 경계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글이 펫을, 어떤 당신을, 내가 잘 모르는 타자를 때리거나 가두고 있지는 않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