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탄실이와 주영이

라다크,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한 아웃사이더의, 이야기 만들기에 대한 홀림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이 깎이’는 것을 읽어내는 것이 문학

특집을 기획하며 ①고양이 사냥의 추억 ②최초의 반려묘 까맹이부터 이백 살 사이보그 고양이까지 ③펫은 실전이다 ④해방촌의 반려종들을 위하여

텍스트에 대한 경의

자파(自派)의 탄생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우주이다

『반노』는 ‘인간’을 지키자는 처절한 투쟁기였다

하루 2천640번 금형을 드나든 손의 기록

아름다움에 다다르려는 맹렬한 노력

홍진에 묻힌 분내……

추운 날의 벗, 세한삼우(歲寒三友)

노을바다의 장엄

양요리루 의자에서 커피를 압음하니 문명개화 이 아닌가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제2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시 부문 수상작 리뷰-소설부문 수상작 리뷰-번역부문

얇아지는 장편, 환영할 일인가

①소각,저작 ②외경,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인가요

①30년의 끝 ②양들의 침묵

새(NEW)

거울의 미로

①녹색문명(綠色文明) 시대의 숲 ②새끼 ③재와 유리의 미래

소설답지 않은, 그래서 더 공감하는

이광수, 일본에서 크게 취하다

머릿속에 쌓인 문제를 풀 수 없을 때

불안과 행운 사이에서

엘리엇 업데이트하기

‘더듬더듬 먼 길’을 가는 시와 번역

경계없는 예술 향한 10년여의 노정

대산창작기금,대산세계문학총서

대학생 아시아 대장정 3차 리더십 캠프 및 아시아프론티어클럽(AFC) 발대식 개최

문학현장

수상작 리뷰-소설부문

글 정과리 ㅣ 평론가,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58년생
저서 『문학, 존재의 변증법』 『존재의 변증법 2』 『스밈과 짜임』 『문명의 배꼽』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Un désir de littérature coréenne(불문) 등

소설부문

현실과 환상 사이의 허위단심,
훠어이 훠이

정의로운 사람이 종려나무처럼 쑥쑥 자란다
할지라도 나는 탄복하지 않는다.
그는 겨우 한
자리를 차지할 수만 있을 테니까
– 앙겔루스 실레시우스1)




조해진 소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리얼리즘과 판타지의 특별한 조 합이다. 그는 오늘날 한국 현실의 가장 문제적인 사항들에 바투 다가가 파헤친다. 그럼으로써 잊혔던 사실들을 일깨우고 감추어진 진실을 밝혀 낸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 현실의 사건들 속에 본질적인 의미를 부여 하려고 한다. 마치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삶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론을 암시한다는 듯한 표정을 조해진 소설의 물상들은 짓는다. 이 근원성의 표정 속에서 만물들은 조응한다. 인물은 별이 되고 나무가 된다. 그럼 으로써 인물들의 관계는 현실을 넘어 아득한 태고의 시간대에서부터 조 짐을 보였던 운명으로 현상한다. 그러나 신화적 사건들은 환몽의 우주 속으로 잠적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 안에 빗발같이 쏟아지는, 리얼리 티라는 이름의 소행성들의 잡석 더미에 부딪치며 만신창이가 되면서, 신 화적 화해의 불가능성을 거꾸로 보여준다.
리얼리즘은 환상화됨으로써 의미화의 극점으로 치닫고, 환상은 리얼 리티에 의해 의미 확립을 지연당하면서 여전히 지금, 이곳의 정체불명의 사건들로 출몰하며, 독자에게 의미 부여의 과제를 넘긴다.
『단순한 진심』2)에서 작가는 그 특유의 글쓰기를 더욱 밀고 나아간다. 작가는 그것이 소설가로서의 자신의 ‘단순한 진심’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작품들 사이의 변화는 소재적인 것을 제외하면 거의 눈 에 띄지 않는다. 여하튼 여기에는 세 개의 층위가 있다. 맨 아래에 입양아의 현실이 있다. 맨 위에는 과거의 입양아 ‘민주’가 의지(意志)하는 의미 세계가 있다. 그리고 가운데에 이 두 세계를 연결하려는 주인공의 집요한 행위들이 있다.
맨 아래층에선 입양아들의 기억과 현재가 밀고 당긴다. 주인공 민주의 기억과 여타 입양아들의 기 억. 이 기억들은 입양이라는 화두에 쬐어지는 얼키설킨 빛들과도 같다. 희한하게도 그것들은 서로 비 껴갈 뿐, 결코 공조하지 못한다. 이제 사회인이 된 모든 과거의 입양아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의 연결을 시도하거나 거부한다. 이 모습들은 입양이라는 사회적 현상의 독특한 면모를 전 하면서 그 기형성에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것은 무수히 많은 사회적 현상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 당사자들은 이 사건과 사회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적으로만 연결된다. 그렇기 때문 에 이것은 사회적 차원에서 토론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좀 더 나은 제도로 진화되는 길이 모색되 거나 혹은 폐지되지 못한다. 다만 그것은 필요에 의해서 거듭 되풀이될 뿐이다. 그리고 당사자에게는 오로지 개인적인 대응만이 가능할 것이다.
당연한 것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는 지구상 인간의 혈족 관계 체제, 즉 가족 제도 자체를 의문의 저울 속에 올려놓는다. 가족 제도가 유지되는 한, 이 비정상적인 ‘대책’도 하염없이 되 풀이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다른 ‘사적 공동체’의 형식을 꿈꾸어 볼 수는 없을 것인가? ‘사적 공 동체’가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왜 필요한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꼬투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조해진 소설에서 이 사태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곤란한 마음의 원인이 다. 넓게 보면 이는 개인 층위와 사회 층위의 항구적인 어긋남이라는 문제틀이 그의 소설의 기본이라 는 것을 알게 해준다. 바로 이 어긋남이 작가로 하여금 판타지를 도입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에게 더 큰 지평을 열어준 계기가 된다. 현실적 곤란은 우주적 해결을 모색케 한다.
물론 해결은 없다. 그런 게 있다면 그의 소설은 더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독자가 목격하는 것은 영원한 ‘미해결의 장’이다. 그 점에서 조해진은 1950년대의 작가 손창섭의 연장선상3)에 있다. 그러나 60년 전의 작가가 사회와 개인의 근원적인 어긋남으로부터 개인의 필연적인 타락을 보았다면, 그래서 인간 세계를 ‘인간동물원’으로 희화화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제 21세기의 작가는 그 어긋남을 신생의 계기로 바꾼다. 손창섭에게 남은 것이 ‘군소리’였다면, 조해진은 참소리를 발성하고 싶어 한다.
실로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늪을 허우적거리며 나아가는 인물의 행동은 ‘(탈)언어적’이다. 다시 말 해, 이 사이에 해결의 의지가 발생한다면, 비록 해결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 의지는 현실 이라는 ‘벽’을 깨뜨리는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자세를 취하는 순간, 현실은 그냥 무의 미의 덩어리가 아니라 거대한 상징의 그물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사회와 개인의 어긋남은 개인 을 그냥 방치하는 게 아니다. 사회는 그 개인을 ‘입양’이라는 지칭으로 찍어 누른다. 그 누름의 방식은 물론 사회마다 다르다. 선진사회일수록 그건 과거에 일회적으로 출현했다가 새 삶의 계기로 작용하곤 소멸된 흔적일 뿐이다. 후진사회일수록 그것은 하나의 낙인이 된다. 그러나 어느 사회에서든 그것은 당사자에게 가해졌던 불가해한 단절의 체험을 해소할 수 없으며, 그것을 오로지 특정한 언어들로 ‘합 리화’함으로써 ‘정당화’하고 그의 존재에 벌어졌던 생채기를 꿰매버린다. 흉터의 유무 혹은 모양만이 그 사회가 보유한 ‘기술’과 등급을 알려준다.
현실의 무게를 상징의 벽으로 느낀 존재는 벽을 허물기 위해 질료들의 형질과 쓰임새를 변환시키는 방식을 모색한다. 그 점에서 그 모색은 탈-언어적(탈-상징적)이며 동시에 언어적(기호적)이다. 그리고 이 작업이 가능하려면 수행자는 현실에 가장 밀착하는 자세로 현실 바깥으로 탈출해야 한다. 왜냐하 면 벽 바깥으로 넘어가는 담쟁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벽돌들과 모르타르의 화학적 성질의 변 화를 통해서 벽 자체가 세상을 건너가는 범선의 재료들로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이 벽돌들을 문자 그대로 돌더미로 이해한다면 이는 어찌 가능할 것인가? 도대체 어떤 화학변화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 러나 이 질문을 밀고 나가는 것만이 참으로 신생을 열 수 있는 것을). 그러한 사정을 가장 아름답게 묘사한 대목은 아마도, ‘민주’를 입양했던 무명의 영화감독 ‘앙리’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문단일 것이다.

스크린에 영사되는 빛의 움직임과는 상관없이 배우가 스크린의 바깥으로 사라지는 단절의 순간에 그의 심장은 뛰었다. 그는, 혹은 그녀는 어디로 갔는가. 대체 어디에서 시나리오에는 없는 미정(未定)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앙리는 스크린의 바깥에서 작동하고 있을 또 다른 이야기 에 마음이 뺏겨 있었다. 스크린과 평행을 이루며 존재하지만 증명되지는 않는 상상의 영역, 카메라의 욕망이 은닉된 공간이자 영원히 미완으로 남는 곳, 마치 선택되지 못한 우리의 가능한 또 다른 생애처 럼……. 극장을 나왔을 때, 앙리는 이제 영화를 모르던 시절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4)

독자는 이제 이 책의 인물들이 왜 이렇게 이름 바꾸기-잇기 놀이에 열중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으 리라. 그것은 바로 현실 질료들의 형질 변환을 통해서 신생의 지평을 열고자 하는 노력의 수행을 그 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 노력은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서 발생해, 현실, 판타지, 행동(언어)의 세 차 원으로 동시에 반향하는 것이니, 현실의 층위에서는 먼지로부터 생명을 만들어내고, 언어의 차원에 서는 맹목으로부터 의미를 뽑아내며, 의미의 차원에서는 암흑으로부터 빛을 태어나게 하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을 아우르게 되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 거대한 우주가 자라나는 과정과 같은 모양새이다.
그 점에서 보면 ‘민주’가 뱃속에 품은 아이의 이름을 ‘우주’로 정한 것은 세 차원의 동시적 진행을 위 해 필수적인 절차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니, 이 작은 결단으로부터 출발하여 현실로부터 우주로 향한 온갖 몸짓들이 개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자는 그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내내 우울하고 도 상쾌할 것이라, 그 우울과 상쾌의 동시적 감각으로 저 벽을 널뛰며 훠어이 훠이 넘어가리라.


1) Angelus Silesius, Le voyageur chérubinique, traduit par Maël Renouard, Payot et Rivages, 2004, p.127.
2) 조해진, 『단순한 진심』, 민음사, 2019

3) 손창섭의 「미해결의 장 : 군소리의 의미」, 『현대문학』 1955년 6월호
4) 『단순한 진심』, 55~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