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탄실이와 주영이

라다크,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한 아웃사이더의, 이야기 만들기에 대한 홀림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이 깎이’는 것을 읽어내는 것이 문학

특집을 기획하며 ①고양이 사냥의 추억 ②최초의 반려묘 까맹이부터 이백 살 사이보그 고양이까지 ③펫은 실전이다 ④해방촌의 반려종들을 위하여

텍스트에 대한 경의

자파(自派)의 탄생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우주이다

『반노』는 ‘인간’을 지키자는 처절한 투쟁기였다

하루 2천640번 금형을 드나든 손의 기록

아름다움에 다다르려는 맹렬한 노력

홍진에 묻힌 분내……

추운 날의 벗, 세한삼우(歲寒三友)

노을바다의 장엄

양요리루 의자에서 커피를 압음하니 문명개화 이 아닌가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제2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시 부문 수상작 리뷰-소설부문 수상작 리뷰-번역부문

얇아지는 장편, 환영할 일인가

①소각,저작 ②외경,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인가요

①30년의 끝 ②양들의 침묵

새(NEW)

거울의 미로

①녹색문명(綠色文明) 시대의 숲 ②새끼 ③재와 유리의 미래

소설답지 않은, 그래서 더 공감하는

이광수, 일본에서 크게 취하다

머릿속에 쌓인 문제를 풀 수 없을 때

불안과 행운 사이에서

엘리엇 업데이트하기

‘더듬더듬 먼 길’을 가는 시와 번역

경계없는 예술 향한 10년여의 노정

대산창작기금,대산세계문학총서

대학생 아시아 대장정 3차 리더십 캠프 및 아시아프론티어클럽(AFC) 발대식 개최

글밭단상

③재와 유리의 미래

김연덕
시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3학년, 제1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문 수상자, 1995년생

이번 학기, 우리 학교 미술원에서 <기초 유리 캐스팅> 수업을 들었다. 조형예술과 전공 수업인 <유리 캐스팅>, <유리 블로잉>은 타원 타과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아 수강 인원이 금세 차는 편인데, 졸업을 1년 앞둔 나는 어 쩐지 운 좋게 수강 신청에 성공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불 앞에서 유리를 만지는 것은 겁이 나, 화 병이나 컵 같은 매끈한 유리를 만드는 블로잉 대신 주로 거친 질감의 공예품을 만드는 캐스팅 수업을 신청했다.
수업 첫 시간 선생님께서 샘플로 보여주셨던 조그맣고 투명하고 정교한 공예품들을 돌려보았을 때만 해도, 캐스팅 작업이라는 것이 내가 기대하고 상상했던 일들과 얼마나 다른 종류, 다른 성격의 작업이 될지 미처 알지 못했다.
조약돌 모양의 유리들을 겹겹이 채워 넣어 아름답고 신기한 결과물을 즉각적으로 볼 수 있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몰드(틀) 만들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유리 작업은 길고 고되기만 했다. 진흙으로 부조를 만들고, 물과 규석과 석고 가루를 섞은 석고물을 부 어 몰드를 만들고, 구석구석 눌어붙은 진흙을 빼낸 뒤, 스펀지로 몰드 안 진흙을 완전히 닦는 내내 유리는 거의 만져보지도 못했다. 진흙 대신 알지네이트나 실리콘으 로 몰드를 만들어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만들어낸 실리 콘 몰드에 왁스를 붓고, 왁스 아래 흙을 덧대 주입구를 만들고, 석고를 부어 최종 몰드를 만들고 나서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 과정들을 거쳐 무언가 나올 때면 더 이상 눈앞의 공예품이 놀랍거나 신기하지 않았는데, 앞의 과정이 길어서도 그렇지만, 후에 기나긴 연마의 과정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사 이사이 공기가 차거나 유리가 녹아 흘러 비죽 날카롭게 솟은 부분들을 매끈하게 깎아내야 했다.

왜 사랑이 지속되거나 끝나가는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쓰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뾰족하게 답할 수는 없지만, 쓸데없을 정도로 기나긴
과정, 진이 다 빠질 정도의 육체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상태나 장면들이 있는 것 같다.


투명한 유리 한 조각을 얻어내기 위해 온갖 무겁고 지저분한 재료들, 그러니까 별로 만지고 싶지 않았던 재료들을 만지고, 깎고,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얼마 전 「재와 사랑의 미래」연작을 썼다. 3월에 발표했던 「재와 사랑의 미래」에서는 지구 멸망 직전 별장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연인이, 4월에 발표했던 「재와 사랑의 미래」에서는 최면술을 통해 여름의 연인을 만나는 겨울의 연인이, 11월에 발표한 「재와 사랑의 미래」에서는 얼음산에 올 라 희박한 공기를 나누는 연인이 등장하는데, 세 편 모두 출력해 읽으면 7페이지가 넘어가는 장 시다. 왜 사랑이 지속되거나 끝나가는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쓰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뾰족 하게 답할 수는 없지만, 쓸데없을 정도로 기나긴 과정, 진이 다 빠질 정도의 육체적인 과정을 통 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상태나 장면들이 있는 것 같다. 가마에서 막 꺼낸 투명한 유리보다 손톱 사이에 낀 진흙과 석고, 주전자에서 강하게 피어오르던 왁스 냄새가 기억에 남듯, 유리 한 면을 연마하기 위해 몇 시간째 꼼짝 않고 서 있던 다리에 대한 감각을 잊을 수 없듯. 이것이 유리를 만지는 날것의 감각이라 믿으므로. 그것이 빠져있는 유리의 투명함에는 단단함도 시간도 사랑도 없 다.
종강까지 캐스팅 작업이 하나 더 남아있다. 아마 나는 거칠고 단순한 눈사람 두 개를 만들 것 같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지그시 바라보면 여기저기 연마한 자국이 보일 눈사람들, 진흙을 완전 히 닦아내지 못해 붉은 스크래치가 남기도 할 눈사람들을. 나만 아는 시간을 겪은 눈사람들을.
그렇게 유리 작업과 작별할 즈음, 네 번째 「재와 사랑의 미래」를 시작해보려 한다. 이번 「재와 사랑의 미래」에는 석고 덩어리나 실리콘 몰드, 공방 창문으로 보이던 나무들, 동그란 판이 물과 함 께 돌아가던 연마실이 등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