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탄실이와 주영이

라다크,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한 아웃사이더의, 이야기 만들기에 대한 홀림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이 깎이’는 것을 읽어내는 것이 문학

특집을 기획하며 ①고양이 사냥의 추억 ②최초의 반려묘 까맹이부터 이백 살 사이보그 고양이까지 ③펫은 실전이다 ④해방촌의 반려종들을 위하여

텍스트에 대한 경의

자파(自派)의 탄생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우주이다

『반노』는 ‘인간’을 지키자는 처절한 투쟁기였다

하루 2천640번 금형을 드나든 손의 기록

아름다움에 다다르려는 맹렬한 노력

홍진에 묻힌 분내……

추운 날의 벗, 세한삼우(歲寒三友)

노을바다의 장엄

양요리루 의자에서 커피를 압음하니 문명개화 이 아닌가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제2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시 부문 수상작 리뷰-소설부문 수상작 리뷰-번역부문

얇아지는 장편, 환영할 일인가

①소각,저작 ②외경,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인가요

①30년의 끝 ②양들의 침묵

새(NEW)

거울의 미로

①녹색문명(綠色文明) 시대의 숲 ②새끼 ③재와 유리의 미래

소설답지 않은, 그래서 더 공감하는

이광수, 일본에서 크게 취하다

머릿속에 쌓인 문제를 풀 수 없을 때

불안과 행운 사이에서

엘리엇 업데이트하기

‘더듬더듬 먼 길’을 가는 시와 번역

경계없는 예술 향한 10년여의 노정

대산창작기금,대산세계문학총서

대학생 아시아 대장정 3차 리더십 캠프 및 아시아프론티어클럽(AFC) 발대식 개최

번역서 리뷰

‘더듬더듬 먼 길’을 가는 시와 번역

영역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글 정은귀 ㅣ 번역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1969년생
역서 『Fifteen Seconds Without Sorrow』 『Ah, Mouthless Things』 『Bari’s Love Song』, 산문집 『바람이 부는 시간』 등


2006년 제14회 대산문학상 수상작인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이 영어의 옷을 입었다. 우리 시를 꾸준히 번역하여 50권이 넘는 번역시집을 펴낸 성실한 번역가 안선재가 수잔 황과 함께 공을 들 여 ‘Liking in Silence’(White Pine, 2019)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판 되었다. 이번 영역 시집은 『가만히 좋아하는』 총 67편에서 4편을 뺀 63 편의 시 외에 시인의 최근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창비, 2015)의 21편 을 포함, 총 84편을 묶었는데 대개 영미권에서 시집이 30~50편이 묶이 는 걸 생각하면 제법 묵직한 무게다.
『어린 당나귀 곁에서』의 첫 시 「달팽이」에서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 래오래” 가는 달팽이 이야기가 나온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처럼 /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 더듬더듬 / 먼 길을” 가는 달팽이. 시인의 시집 두 권과 번역시집을 나란 히 읽으면서 더듬더듬 먼 길을 가는 시의 길과 번역의 길을 생각해본다. 1987년에 나온 시인의 첫 시집 『밤 에 쓰는 편지』에서 두 번째 시집으로 나아가기까지 19년, 두 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에서 세 번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로 건너오기까지 9년이 걸린 시인의 이력은 지금까지 달팽이처럼 느리게 걸어온 길인 듯싶다. 그 뚜렷한 시차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시의 길은 ‘항심’으로 우리 나날의 생을 어루만지는 어떤 ‘애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겸손하고 곡진한 말로 시의 길을 만들어가 는 그 단단한 여정이 자못 독자의 마음을 겸허하게 하는데, 두 시집이 영어라는 다른 언어의 다리를 건넌 것은 비교적 날렵한 동작으로 이루어졌다 싶어서 번역에 공들였을 역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번역은 단순히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갈아타는 작업이 아니다. 번역가는 시의 최종 해설자이며 시를 가장 잘 보는 비평가여야 한다. 우리 정서가 깊이 녹아든 시어에 의뭉스런 독백이나 대화체, 다채로 운 시의 결들이 도드라지는 김사인의 시는 우리말에 익숙하지 않은 역자라면 의미를 곰곰이 헤아려 야 하는 번역 작업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실과 상상의 다른 층위를 넘나들면서 우리말의 결을 도탑게 어루만지는 시인의 시는 ‘지금 여기’의 호흡이라 할 수 있는데, 영어로 옮겨진 이후에도 그 결 이 비교적 생생하게 살아있다.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말대로 번역이 단순한 원작의 죽음 후 에 오는 “후생”(afterlife)이 아니라 원작을 “살아남게”(fortleben) 하는 일이라면 “지속적인 삶”(ongoing life)을 살게 하는 번역의 과제는 이 시집에서 충분히 잘 달성되었다고 본다.
역자들의 충실한 노력에 박수를 아낌없이 보내면서도 아쉬움이 영 없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아 쉬움은 대개 시의 리듬에 관한 것. 우리말의 일상적인 구어를 맛깔스럽게 잘 살려 쓰는 시인일수록 번역가로서는 곤혹스러운 숙제에 직면하기 마련인데, 김사인의 경우가 그러하다. 원작에서 우리말 의 리듬을 살려 의도적으로 반복된 구절이 번역에서 생략된 것이라든가,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시인 이 풀어쓴 구절들이 다소는 날렵하고 편안한 영어로 옮겨진 대목들은 시의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독성을 내세워 매끈하게 의미의 옷을 입히는 것보다 불편한 리듬을 불편하게 가지 고 가는 번역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지 다시금 고민하게 한다. 번역에서 제외된 「윤중호 죽다」와 같 은 시는 한글 ‘죽다’를 시적으로 변용한 시라서 영어로 옮기는 데 번역의 한계를 가장 실감하게 하기 에 빠졌으리라고 짐작되는데, 시간이 된다면 영어로 이러한 음의 변용이 어떻게 가능할지 실험하는 번역을 해보고 싶어진다.
어떤 시상식에서 번역가 안선재는 번역은 “그냥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몰라. 번역은 신비야.
이것 정말 아름다워하면서 하면 되는 것이야”라는 말로 모국인 영국에서 떠나와 한국 사람이 된 그 가 낯설고 특이한 그만의 우리말 리듬으로 말할 때, 시인도 번역가도 결국 “더듬더듬 먼 길”을 가 는 여정 안에서 언제 만날지 모르는 그 아름다운 미래형의 신비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자라는 생각 을 했다. 오늘날 세계문학의 지형 안에서 한국시는 여전히 좁은 길 위에 있다. 그간 우렁찬 목소리 의 고은으로 대표되던 한국시에 최근에는 김혜순이나 김이듬 등 과감하고 문제적인 여성 시인들의 목소리가 도드라져 의미 있는 성취를 거두었다면, 이번에 간곡하고도 낮은 응시로 생의 젖은 자리 와 작은 기쁨들을 모두 어르고 품는 김사인의 시가 번역됨으로써 세계문학 지형도 안에서 우리 시 의 폭이 더 넓어지리란 기대가 있다. 하루하루를 더듬으며 걷는 달팽이처럼 낮고 누추한 길 위에 선 ‘지금 여기’의 호흡이 한국을 건너 다른 세계에 도달하게 되어 기쁘다. 번역만이 가능하게 해주는 그 건너감을 통해 시인의 시가 더 많은 독자들을 만나기를 희망한다.


※ 영역 『Liking in Silence (가만히 좋아하는)』은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을 받아 안선재·수잔 황 번역으로 2019년 미국 화이트파인프레스에서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