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탄실이와 주영이

라다크,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한 아웃사이더의, 이야기 만들기에 대한 홀림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이 깎이’는 것을 읽어내는 것이 문학

특집을 기획하며 ①고양이 사냥의 추억 ②최초의 반려묘 까맹이부터 이백 살 사이보그 고양이까지 ③펫은 실전이다 ④해방촌의 반려종들을 위하여

텍스트에 대한 경의

자파(自派)의 탄생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우주이다

『반노』는 ‘인간’을 지키자는 처절한 투쟁기였다

하루 2천640번 금형을 드나든 손의 기록

아름다움에 다다르려는 맹렬한 노력

홍진에 묻힌 분내……

추운 날의 벗, 세한삼우(歲寒三友)

노을바다의 장엄

양요리루 의자에서 커피를 압음하니 문명개화 이 아닌가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제2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시 부문 수상작 리뷰-소설부문 수상작 리뷰-번역부문

얇아지는 장편, 환영할 일인가

①소각,저작 ②외경,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인가요

①30년의 끝 ②양들의 침묵

새(NEW)

거울의 미로

①녹색문명(綠色文明) 시대의 숲 ②새끼 ③재와 유리의 미래

소설답지 않은, 그래서 더 공감하는

이광수, 일본에서 크게 취하다

머릿속에 쌓인 문제를 풀 수 없을 때

불안과 행운 사이에서

엘리엇 업데이트하기

‘더듬더듬 먼 길’을 가는 시와 번역

경계없는 예술 향한 10년여의 노정

대산창작기금,대산세계문학총서

대학생 아시아 대장정 3차 리더십 캠프 및 아시아프론티어클럽(AFC) 발대식 개최

단편소설

①30년의 끝

한수산|소설가, 1946년생.
장편소설 『부초』 『해빙기의 아침』 『유민1.2.3』 『욕망의 거리』 『엘리아의 돌계단』 『이별 없는 아침』 『4백년의 약속』 『용서를
위하여』 『말 탄 자는 지나가다』 『군함도』 등

나카무라가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일본으로부터 받았을 때 처음 떠오른 것은 그와 내가 함께 했던 세월이었다. 처음 만난 것이 1990년 여름이었다. 그렇다면 올해로 27년이 되는구나. 그 시간의 틈새를 비집고 슬픔이 배어 올랐다.
그의 장례식은 문상객을 받지 않는 가족장으로 치러졌다고 했다. 일본의 전쟁책임과 가해자로서의 반성을 줄기차게 주장해 온 시민단체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를 이끌며 살아온 대학교수이자 시민운동가 나카무라 히데토시였다. 그런 그의 죽음이 언론을 통해서만 알려지고 장례는 오직 가족들만의 의례로 치러졌다는 것이었다.
지난해의 그 아쉬움 때문에 나카무라를 기리는 마음을 담아 시노부카이(偲ぶ會)라는 이름의 모임을 열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은 게 두 주일 전이었다. 시노부카이라면 우리말로 ‘추모의 모임’이라고나 해야 할까. 늘 연락을 도맡아 해 오던야마시타는 그 소식을 전하며, 조촐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아주 조촐한 모임입니다.
후쿠오카 공항 창밖으로는 햇살이 가득했다. 천천히 공항 밖으로 나왔다. 사월의 바람이 서늘하게 얼굴을 스치고,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차들이 줄을 지어 가득한 주차장을 둘러싸며 벚꽃이 한창이었다.
전에는 후쿠오카 공항을 내려 나가사키로 가려면 국제선 출구를 나와 다시 국내선 쪽으로 버스를 타고 가야했다. 거기서 다시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고 고속버스 정류장까지, 버스에서 버스로 기다리고 흔들리고……그게 싫어서 나는 늘 공항에서 지하철을 타고 역으로 나가 나가사키행 고속철도를 이용했었다. 그랬던 교통편이 국제선 출구를 나오면 바로 앞에서 나가사키 행 고속버스를 탈 수 있도록 변해 있었다.

얼마나 많이 이 길을 오갔던가. 무모하게 낭비한 세월이라고 스스로를 질책하기도 했었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니 나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묵묵히 신발끈을 조여 매기도 했었다. 소설 『군함도』를 써내기까지의 시간은 그렇게 이 길을 오가며 녹아내렸다.
주차장을 둘러싸고 있는 벚나무 행렬을 바라보았다. 사월의 햇살을 받고 있는 흰 꽃잎들이 햇살 때문에 더욱 희디희게 바라보였다. 승차장 앞에서 확성기를 어깨에 건 직원이 소리쳤다.
- 지금 나가사키행 버스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A15번에서 출발하겠습니다. 나가사키행 승객 여러분은 A15번에 줄을 서 주십시오.

나가사키, 그곳은 무엇보다도 작가인 내가 언젠가는 써낼 수 있으리라 다짐하며 긴 세월을 넘길 수 있었던 작품의 소재가 있는 무대였다. 쓰고 고치기를 거듭하던 시간의 신산함 따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이 새롭게 드러나는 자료들을 만나며 내 피를 끓게 하던 나가사키, 그리고 거기 국경을 넘은 우정이라고 믿었던 만남들이 있었다. 두 나라의 과거사를 뚫고 들어가는 한 줄기 빛 같은 만남이었다. 하라 목사를 비롯하여 ‘인권을 지키는 회’의 멤버들과의 교유가 그것이었다.
자료조사를 위해 처음 찾아갔던 여름, 인권모임을 주재하던 하라 목사의 집 서재에서 만난 나카무라는 이따금 긴 머리칼을 쓸어 올릴 뿐 별말이 없었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친다고 했다.
물도 없고 나무도 자라지 않는 무인도 하시마는 나가사키에서 승용차로 한 시간쯤 달리면 가 닿는 노모반도의 건너편에 떠 있는 섬이었다. 이 미터만 땅을 파면 석탄이 나오던 노천탄광 하시마에서 일본 최고의 발열량을 자랑하는 제철용석탄이 생산될 무렵, 일본은 전쟁으로 치닫는다. 무기생산을 위한 전쟁자원으로서의 석탄은 검은 다이아몬드라 불리고, 군수재벌 미쓰비시의 소유가 된 하시마탄광은 전쟁을 뒷받침하는 기간산업이 되어 있었다. 해저에서 파올려진 석탄 이외의 이물질을 해안에 매립하면서 섬의 크기도 축구장 세 배 크기로 늘어났다.
전기와 식수가 해저 케이블로 공급되고, 이직률이 심했던 광부와 그 가족들의 생활을 위해 좁은 터에는 하늘로 치솟는 고층아파트들이 세워졌다. 학교는 물론 병원까지 자리 잡았다.

섬의 모습도 기이하게 변해갔다. 섬 안을 가득 채우며 포진한 아파트들은 군함의 몸체처럼 견고하게 바라보였고 맨 위에 치솟은 도리이(鳥居, 신사의 문)는 범선의 마스트 같았다. 석양을 등지고 떠 있는 섬의 모습이 그 무렵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진수를 마친 군함 ‘도사’와 너무도 닮아 있다는 신문보도가 있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하시마는 군함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광부인력의 부족 현상이 극심하던 전쟁 말기, 일본은 이 탄광섬 군함도로 조선의 젊은이들을 무자비하게 끌고 간다. 징용이라는 이름으로 끌려간 그들은 거의가 스무 살 안팎이었다. 그들이 겪어내야 했던 무자비한 강제노역의 참혹함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끝이 났다. 그리고, 조선 징용공들의 신음과 눈물이 밴 역사는 그 땅에 남아 바닷물에 씻기며 잊혀갔다. 경제대국으로 융성한 시대를 맞은 일본에서도 석탄의 시대는 가고, 군함도 또한 폐광과 함께 사람들이 떠나면서,빈 아파트들만 치솟은 폐허의 무인도로 되돌아갔다.
이 섬을 무대로 나는 10여 년이 넘는 취재와 집필과정을 거쳐서 『까마귀』라는 장편소설을 펴내게 된다. 나가사키에 대한 내 애정과 증오가 뒤엉킨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넘어설 수 있는 목숨은 없었다. 하라 목사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건강하지 않은 곳이 한 곳도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네. 그런 편지를 보내온 지정확하게 한 달 후였다. 밤늦게까지 젊은 조력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진뒤, 하라 목사는 혼자 잠이 든 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 소식을 정성 가득한 작은 글씨의 세로쓰기로 적어 보낸 사람이 나카무라 교수였다. 도쿄에 사는 자녀분들이 내려와 장례를 치렀고 따님이 유품을 챙겼다고 했다.
나가사키에 갈 때마다 내 숙소를 잡아 주시고, 아버지뻘이 되게 나이가 위였음에도 언제나 역 플랫폼까지 나와 꼿꼿하게 선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던 분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이 오면 부인을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살면서도 손수 마련한 저녁밥으로 이별을 달래주던 고마움을 회한으로 남긴 채였다.
『까마귀』 출간과 함께, 쪽마다 하라 목사의 손길이 묻어 있는 것만 같던 소설을 들고 나는 하라 목사가 떠나고 없는 나가사키를 찾았다. 역 건너편 언덕에는 어느새 ‘인권을 지키는 회’ 회원들이 힘을 합쳐 세운 ‘평화자료관’이 하라 목사의 뜻을 기리며 서 있었다. 하라 목사의 정신을 이어가는 기념관의 이사장이 나카무라였다.

기념관 안의 영정 앞에 책을 놓는 내 눈에 이슬이 맺혔다. 살아계셨으면 책을 보며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자료관에서 만난 ‘인권을 지키는 회’ 사람들은 저마다 그런 말을 했다. 저보다 더 기뻐하셨겠지요. 거짓 없이 내 마음이 그랬다.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지지부진한 내 소설을 안타까워하던 목소리가 영정 앞에선 나에게 어제처럼 울리고 있었다. 하라 목사가 보내 주는 수많은 자료에는 또 다른 애틋함이 서려 있었다. 복사된 자료는 손수 풀로 붙이고 노끈으로 묶여 책처럼 단정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우편물을 싸 보낸 봉투는 언제나 자신에게 온 다른 우편물의 봉투를 뒤집어서 재활용한 것이었다. 고마움을 넘어 내 가슴을 적시던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러, 『군함도』라는 이름으로 일본어판이 나왔을 때, 나는 도쿄에서의 기자간담회를 끝내자마자 나가사키로 내려갔다. 일본어판 『군함도』를 품고 찾아온 나를 나카무라 교수가 맞아주었다. 다음 날 우리는 배를 타고 군함도로 향했다.
내가 취재로 드나들 때는 건너편 포구에서 어부의 배를 빌려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었던 섬이었다. 그러나 섬의 환경은 많이 변해 있었다. 태풍이 올 때마다 쓰러져가는 아파트뿐, 위험을 안은 채 방치되어 있던 섬의 소유권을 미쓰비시가 나가사키시에 기증했던 것이다. 시의 공무원들은 섬에 출입금지의 입간판을 세우고, 관광지로서의 개발을 서두르며 상륙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다.
어렵게 상륙 허가를 받고 항구를 떠났지만 우리는 섬에 오를 수가 없었다. 거친 파도 때문이었다. 가늘게 뿌리는 빗발 속을 안개가 휘몰리며 섬을 감싸고 있었다. 가지고 간 일어판 『군함도』를 내 소설의 여주인공 금화가 일했던 유곽 자리에 바치며, 돌로 눌러놓고 오리라 생각했던 나였다. 상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삼십여 분을 일렁거리는 배 안에서 기다리며 나는 심한 뱃멀미에 구토를 느꼈다. 상륙을 포기하면서 나카무라가 말했다.
- 섬을 한 바퀴 돕시다. 천천히.
우리를 실은 배가 느리게 섬 주위를 돌고 있을 그때였다. 섬을 감싸며 휘돌아간 옹벽 위에 소설 속의 여주인공이 흰 치맛자락을 날리며 서 있었다. 그녀였다.
금화였다. 잘들 있어. 나는 이제 가. 오리나무는 십 리 밖에 있어도 오리나무고 고향목은 타향 땅에 서 있어도 고향나무야, 아 바람 속으로 안개가 짙구나. 밤안개가. 바다로 몸을 던져 자살한 그녀가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환영이었다. 고마워. 이제야 왔구나. 내 이야기를 써 줘서 고마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안개가 휘몰리던 섬 군함도. 가득한 안개 속에 내 주인공들이 서 있던 섬 군함도.

- 이 버스는 잠시 휴게소에 들르겠습니다. 십오 분 동안입니다.
기사의 탁한 목소리가 들리고, 나가사키행 버스가 휴게소로 들어섰다. 자동판매기가 늘어선 매점 안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승객들을 바라보며 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카무라를 추모하는 모임이 모레로 예정되어 있으니 내일은 군함도엘 다녀오기로 하자. 우리의 선조들이 강제노역에 처박혔던 섬, 입구가 봉인된 채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묻혀 있는 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둘러싸고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린 섬이 아니다. 다만 내가 쓴 소설의 무대를 찾아가는 것이다.

다시는 이 섬에 오는 일이 없으리라. 늘 그랬다. 찾아올 때는 기쁜 마음이 앞섰지만 돌아가면서는 같은 생각을 했었다. 아침 일찍 군함도로 가는 배에 오르면서 나는 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일 거라고.
매표소에서 승선장까지 가는 부두에는 가득히 ‘나가사키 -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군함도 - 2015년 세계문화유산!’같은 현수막이 줄지어 나부끼고 있다.
배에 올랐지만 전망이 좋은 2층은 이미 가득 찬 손님들로 좌석이 없다. 아래로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관광선이 나가사키 항구를 벗어나자, 선실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주변 경관을 비춰주면서 안내방송을 시작한다. 화면에 나가사키 조선소의 매머드 크레인과 건조 중인 대형 선박이 비춰지자 ‘이야!’, ‘스고이(굉장하다)’하는 탄성이 쏟아진다. 왼쪽 오른쪽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려가면서 비춰주는 영상에 따라 승객들의 시선도 왼쪽 오른쪽으로 바쁘게 오간다. 마치 테니스 경기를 보는 관중들 같다.
돈벌이가 빠질 리 없다. 군함도의 사진집을 팔러 다니고, 기념품을 팔러 다닌다. 선실 벽을 따라 군함도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주르르 걸려 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승객, 연간 10만인 돌파. 문화유산 붐을 타고 활기.
신문기사를 확대해 놓은 것이다. 지난번 왔을 때도 붙어 있었는데 바닷바람을 쐬어서일까. 이제는 누렇게 색이 변해 제목만 보인다.
내가 산 야마사 해운의 4,500엔짜리 승선권에는 시설사용료 300엔이 포함되어 있다. ‘메와쿠(迷惑) 요금’이라는 이것은, 관광선이 드나들며 인근지역 어민들의 고기잡이에 폐를 끼친다는 뜻에서 포구마을에 내는 돈이다. 우리말로 하자면 민폐요금이 된다. 일인당 300엔의 민폐요금이 10만 명이면 얼마인가. 작은 어촌으로서는 만만한 돈이 아니다. 세계문화유산이 관광자원이 되고, 인근 어민들에게도 자금줄이 되는구나 생각했는데, 저 기사도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군함도 관광객이 연간 30만 명에 육박했답니다. 어제 만난 야마시타는 그런 말을 전하여 씁쓸히 웃었다. 9할이 외지인과 외국인입니다. 세계문화유산의 위력입니다.
군함도가 가까워 온다. 태풍이 오면 4층 높이까지 치솟았다는 파도를 막아선 방조제가 휘돌아가고,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게 내 안에 자리 잡은 섬 안의 골목들이 떠오른다, 광부들이 드나들던 가파른 계단은 목숨계단이라고 불렸다고 했다. 취재길에는 맨 위에 돛대처럼 서 있던 신사의 도리이 앞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군함도는 그때의 군함도가 아니다. 서 있는 건물보다 무너진 잔해로 뒤덮인 공간이 더 많아진 섬이 잠자리가 벗어놓고 달아난 허물처럼 초라하다. 컨베이어벨트가 석탄을 나르던 탑도 무너져 보이지 않고 웅장하게 치솟았던 아파트들도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다. 텅 빈 건물들의 계단과 난간들이 조각조각 무너져 내리며 드러나던 음흉하고 살기어린 모습도 없다. 가슴이 지잉 울리며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장길수 씨. 그는 나를 위해 저 섬을 함께 걸었었다. 그는 열다섯 살에 이 섬으로 끌려온 소년 징용공이었다.

배를 내렸다. 와글거리는 행렬의 끝에 서서 천천히 따라 걸었다. 견학시설이라는 이름으로 찾아가는 장소는 세 곳, 참혹한 폐허로 변해가는 잔해들이다. 이 세 곳을 군함도 출신이라는 사람들이 맡아 해설을 한다.
관광객들이 다 허물어진 공동목욕탕 잔해를 보며 우르르 몰려가 사진을 찍는다. 유치원이 저 높은 아파트 옥상에 있었습니다. 섬에 땅이 모자라니 옥상에 세운 겁니다. 옥상유치원이 뭐가 우습다는 것인지 와아 웃어댄다. 여기엔 파친코도 있고 극장도 있었습니다. 또 뭐가 우습다는 것인지 더 크게 웃는다, 묘지 빼고는 없는 것이 없던 섬이 군함도입니다. 당연히 유곽도 있었습니다. 저 높은 쪽으로 건물 세 동이 유곽이었습니다. 소리를 죽여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바닥을 굴러다니는데 옆에 선 두 남자가 떠들고 있다. 유곽도 있겠다, 살만 했겠네. 조선여자도 있었다 그러더라구.
섬을 휘돌아가며 쌓아올린 방조제 너머에서는 바다가 넘실거렸다. 까르르까르르 웃어대며. 저마다 사진을 찍기 위해 휴대전화를 들고 오가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나는 방조제 쪽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거기 있었다. 방조제와 붙어 있는 바다로 통하는 커다란 구멍, 동굴이었다. 이 섬을 처음 찾아왔던 그때와 다름없이 파도가 칠 때마다 동굴 안으로는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접안시설이 없던 그때, 우리를 싣고 포구를 떠난 어부는 저 동굴 입구에 밧줄을 내려뜨리고 작은 어선을 대곤 했었다. 그때 나카무라의 소개로 처음 만난 장길수 씨와 나는 섬 안을 샅샅이 돌았었다. 1958년에 세워진 병원과 방파제 사이 격리병동 자리가 조선징용공들의 숙소가 있던 곳이라는 피해당사자의 증언은 귀중했다. 당시의 숙소는 지하실이 있는 2층 건물이었다고 했다. 폐광 후 섬을 빠져나가며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것인지. 우리가 찾아갔을 때는 녹슨 병원 비품들과 빈 링거 병이 키가 넘게 쌓여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 쓴 채였다.

손에 닿을 듯이 가까이 늘어선 아파트 숲을 거닐다가 나는 거리를 재기 위해 창살이 떨어져나간 건너편 아파트로 침을 뱉어 본 적이 있었다. 침을 뱉으면 옆아파트 베란다에 떨어질 정도로 건물과 건물은 붙어 있었다. 사다리를 놓고도 건너갈 수도 있게 빽빽이 들어찼던 건물들이 해마다 찾아오는 태풍에 무너져 내리거나 비바람을 맞으며 조각조각 부서져 내리는 폐허 속을 우리는 걸었던 것이다.
재일조선인이라고 해도 조총련계 사람들은 나와의 만남을 꺼려해서 ‘선생, 남조선에서 왔다면서 나 같은 사람을 만나도 괜찮습네까’하고 흉흉하게 묻기부터 하던 때였다.
내 눈길이 천천히 동굴 너머 방조제 위로 옮겨갔다. 장길수 씨와 나는 저 방조제 위에 나란히 앉아서 바다를 내다보았었다. 마치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기라도 하듯 갈매기가 날아와 우리들 옆을 맴돌고 있었다. 몇 번인가 몰라. 여그 와 앉아서. 바다로 뛰내리기만 하믄 된디, 그라믄 죽을 수가 있는디. 그런 생각을 했었제. 죽자, 죽어블자. 언제 끝날지도 모른디 버틸 힘이 있어야제. 일하는 것은 다 같이 힘든께 참을 만도 했어. 맞기도 오살나게 맞았제. 아파서 못 인나믄 꾀병 부린다고 때려. 나뿌닥이 푸렇게 피멍이 들도록 뚜들겨 맞기도 했는디 그것도 그래, 어짜겄어. 때리믄 때리는 대로 맞고 있어야제. 그 때 우리는 사람도 아니었은께. 내가 젤로 힘들었던 것이 뭔지 아요? 쌔 빠지게 일하는 것도, 뚜들겨 맞는 것도 아니었어. 배 곯는거. 배 곯는 것은 아무리 해도 질이 안 들어. 때만 되믄 배가 고프지, 암만 해도 질이 안 들어.

군함도 상륙증명서라는 이상한 종이 한 장씩을 받고 관광객들은 다시 배에 올랐다. 나가사키 항구로 돌아가기 전에 섬을 한 바퀴 돌고 난 관광선은 빠르게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육지, 노모반도의 포구를 바라보았다. 섬과 포구가 바라보이는 해안까지는 헤엄을 쳐도 건너갈 수 있겠다 생각할만큼 가까웠다. 그러나 이 섬을 둘러싸고 흐르는 해류의 특이함 때문에 나가사키로 들어오던 수많은 중국 상선이 좌초했다는 사실을 그때의 징용공들은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이기에, 어두운 막장에서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절규가 있기에, 바다로 뛰어든 징용공들은 눈앞의 육지를 바라보며 급류에 휩쓸렸고, 추격을 나온 광업소 수색선에서 내려치는 몽둥이에 맞으며 하나둘 물속으로 가라앉아 갈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장길수 씨는 심한 기침을 했었다, 군함도의 건너편, 노모반도의 해안에서 도로공사 중 유해가 발견될 때면 조선인일 수밖에 없다면서 뼛조각을 거두고 향을 올리던 나카무라였다. 일본은 화장을 하기 때문에 해안가까이에 매장된 유해는 탈출하다 맞아 죽은 조선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하라 목사도 장길수 씨도 세상을 떠나고 나카무라까지 떠나간 자리에 나 혼자남아 찾아온 나가사키, 내 반생을 뱀처럼 휘감고 있는 나가사키를 생각하자니 사랑으로 엮였던 삶의 고리들도 세월과 함께 사라져 가고 끝내는 슬픔으로만 남는가 싶었다. 멀리 조그맣게 사라져가는 군함도를 바라보았다. 숲처럼 가득했던 아파트들은 찾아올 때마다 더 시커멓게 색깔이 변해 갔다. 태풍이 휩쓸고 가면 그때마다 하나 둘 허물어지면서 듬성듬성 빈터가 늘어나는 군함도가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웅크린 채 흐릿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을 알리는 징 소리가 둔중하게 울리고. 군함도와 나 사이를 가르며 검코 커다란 막이 아주 느리고 느리게 바다 한가운데로 내려오고 있었다.

문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진위는 아예 내팽개쳐진 채 뒤엉킨 싸움이었다. 일본이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시도하면서부터의 일이었다. 서양에서 비서양 세계로 기술 이전이 되면서 일본의 전통문화와 융합을 이룬 것들로 1850년대부터 1910년까지의 자산을 묶은 것이라고 했다. 8개현에 걸쳐 23개나 되는 구성자산에는 내 소설의 무대 군함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쪽에서는 강제징용과 강제노동이 자행된 과거사를 내세우며 세계유산 등재에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이 인류의 추악한 역사가 배어 있는 곳도 지정한다는 사실조차 정부는 몰랐던 것일까. 인간이 인간을 팔고 사던 노예시장에서부터 심지어 남아프리카의 만델라가 오랫동안 수형생활을 한 감옥까지, 인류가 되풀이 하지 말아야할 교훈으로써 등재되어 있지 않은가.
시기적으로 1910년까지라고 못 박음으로써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역사를 피해가려는 일본의 술수는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또한 군함도에는 1910년 이전의 건축물이 없고, 지하에는 그 시대의 산업유산으로서의 흔적인 유구(遺構)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본은 세계와 인류를 향해 속이려 들었다.
신문사의 의뢰로 일본의 현장 분위기를 살펴보는 르포기사를 쓰기 위해 떠났던 나가사키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예상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격앙되어 있을 뿐, 한 나라는 없는 것도 있다고 하고, 한 나라는 되는 것을 안 된다고 하는 싸움의 어디에도 이성이 설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군함도를 다녀오던 날, 하오의 햇살이 비껴드는 기념관 3층 회의실에서 나는 나카무라가 내려주는 녹차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 하시마는 사라지고 없더군요. 그 자리에 군칸지마(軍艦島)가 있을 뿐.
일본 신문들이 뽑아내고 있는 기사 제목부터가 그랬다. 이제까지는 섬의 정식 명칭인 하시마를 적고 괄호 안에 ‘일명 군함도’라고 적었었다. 그것이 어느새 군함도가 앞에 적히고 괄호 열고 ‘하시마’로 변해 있었다.
- 나가사키는, 만약 한국이 반대해서 유산 등록이 실패한다면 전쟁이라도 해야 한다는, 그런 험악한 분위기입니다.
- 왜 그토록 목을 맵니까.
- 관광객을 모을 수 있다는 돈벌이, 그런 것도 있지만 자존심이랄까. 한국이 반대해서 안 된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겁니다.
- 일본 언론은 군함도가 자격미달이라는 지적도 하지 않습니까. 1910년이나 산업유산의 유구나 어느 것에도 군함도는 해당사항이 없지 않습니까.
- 군함도보다 더 문제는 쇼카손주쿠(松下村塾)입니다.
그리고 그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모르는, 처음 듣는 인물이었다. 나카무라가 전에 없이 격앙된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일본이 신청한 23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리스트에는 쇼카손주쿠라는 조그마한 건물이 있다. 조슈(長州, 지금의 야마구치현)의 하급무사 출신으로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진 요시다 쇼인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사설학원, 주쿠(塾)이다. 다다미 8장의 방 한 칸으로 시작한 학원에서 요시다는 1년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여기에서 훗날 메이지 유신의 총아들이 나온다.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가 바로 그 막내격인 사람이다. 막부타도(倒幕)를 도모하던 그는 끝내 참수형을 받고 죽었다. 겨우 29세로 생을 마감한 그의 시신은 벌거벗겨진 채 나무통에 넣어 매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처형된 후 폐쇄되었던 ‘쇼카손주쿠’는 1922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입구에는 ‘메이지 유신의 태동지’라는 입석이 세워지게 된다.
- 아베 총리는 요시다를 가장 존경한다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자신의 선거구에 있는 이 사적지를 유네스코 유산에까지 등재시키려는 겁니다.
나카무라가 들고 와 보여준 ‘요시다 쇼인의 침략사상’이라는 자료에는, 자신의 책 『유수록(幽囚録)』에서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오키나와를 일본영토화하며, 이씨조선의 일본 속국화, 만주 대만 필리핀을 영유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 이 사설학원이 산업유산일 수는 없습니다. 그의 사상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창밖의 햇빛이 잦아들며 회의실 안이 어둑어둑해졌다. 전직 여교사라는 자원봉사자가 올라와 자신은 퇴근하니까 문단속을 부탁한다면서 열쇠 꾸러미를 놓고 갔다. 기념관은 그렇게 회원들의 자원봉사로 유지되는 있었다.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이면서도 군수산업의 최대기지였다는 과거는 등 뒤로 하고 인류역사의 두 번째의 피폭지라는 사실을 내세워 온 도시가 나가사키였다. 이도시에 올 때마다 내가 분노했던 것도 전쟁 피해자로서의 변신이었고 평화의 발신지라는 이 도시가 전개하는 캐치프레이즈였다. 그런 나가사키에서 일본의 전쟁책임, 가해자로서의 반성과 피해보상을 줄기차게 주장해 온 기념관이었다.
천천히 일어서서 창문을 닫고 있는 나카무라에게 내가 물었다.
- 기념관에 우익들의 위협은 없습니까?
- 이따금 골목 앞까지 확성기를 단 우익들의 선전차가 온 적은 있지만 더 무슨 짓은 안 하고 돌아갑니다.
그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소리없이 웃었다.
- 우리의 힘은 미약하지요. 그러나, 일 퍼센트라도 반대의견이 존재한다는 것.
아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책임을 다하고,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권력과의 대척점에 존재하니까요, 우리는.
나카무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의 불을 껐다. 밖의 가로등 불빛이 어두운 회의실 안으로 새어들었다. 좁은 계단을 내가 먼저 내려온 후 나카무라가 불을 끄면서 뒤따라 내려왔다. 기념관 문을 닫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둘 다 말이 없었다. 그림자가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는 가로등 밑을 걸었다. 어두운 골목 안에서 고양이가 울고 있었다.
비탈길의 꺾이고 또 꺾이는 긴 계단을 내려와 길가에 섰을 때였다. 걸음을 멈추며 내가 말을 꺼냈다.
- 어때요?
한잔 할까요, 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 한잔 하지 않을래요?
역으로 향하는 길모퉁이에 푸른 이자카야 간판이 바라보였다. 2f라는 글씨와 함께.

- 저기, 보이는 이자카야……
- 좋네요. 저기.
술집 이름이 ‘아지사이’였다. 수국(水菊)이 일본말로는 아지사이였다. 장마철 비에 젖은 돌계단과 그 너머로 푸른 꽃잎을 내려뜨리고 있는 수국은 그동안 나가사키를 오가며 내가 좋아했던 이 도시의 속살이기도 했다. 계단을 올라 술집 안에 들어와 앉으며 내가 말했다.
- 나카무라 선생은 변함없이 오유와리(お湯割り)시죠?
늘 그래왔다. 그는 소주였고 나는 일본술이었다. 그는 소주에 따듯한 물을 섞어 마시는 오유와리를 즐겼고 나는 여행을 할 때는 그곳의 술을 마신다는 습관대로 일본술을 마셨었다. 그리고 우리는 늘 자신의 잔에 자신이 따라 마셨다. 상대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권하지 않는 것도 우리들의 우정이 만들어낸 규칙이었다.
- 이제 귀국하면, 기사 쓰느라 바쁘겠군요.
- 우선 건강검진을 받아야 합니다. 예약을 하고 왔어요. 난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건강검진을 해요.
내가 잔을 비우며 웃었다. 그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 나는 정기검진 같은 건 안 합니다. 어차피 병이 든 건데 미리 안다고 무엇이 달라집니까. 오늘이냐 내일이냐. 어차피 죽기는 죽는 거지요.
- 그렇게 말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지요. 자살.
종업원이 접시 위에 놓인 소나무로 만든 잔에 세 번째로 술을 부어주고 갔을 때 나카무라도 세 잔째의 오유와리를 시켰다. 새 술이 나왔을 때였다. 맛을 보기 위해 입술을 적시듯 술을 마시고 난 나카무라가, 이상하기 짝이 없는 발음으로 시를 읊조렸다. 내가 물었다.
- 무슨 소립니까.
그가 이번에는 영어로 말했다.
- Sing your death song and die like a hero going home.
네 죽음을 노래하라, 집으로 돌아가는 영웅처럼. 인디언 추장 테쿰세의 시였다. 나는 소나무 향기를 풍기는 나무잔에 담겨 있는 술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불문학 교수라는 걸 나는 늘 잊고 지냈었다. 일본의 전쟁책임, 가해자의 책임. 우리사이에 놓인 다리는 그런 한일과거사였다. 외국어로 시를 읊조리는 불문학자와 소설가 사이에 놓인 다리가 아니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인생을 살라고 했던 테쿰세는 쇼니족 추장으로 그 이름은 먹이를 움켜쥔 푸마라는 뜻이라고 했다. 서부의 황야에서 꺄꺄 소리치며 바람을 가르며 말을 달린다면 그런 말을 할 수도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영웅이라니. 우리는 저녁이면 파김치가 된 몸을 지하철에서 부대끼며 집으로 돌아가는 도시인들이 아닌가.
늘 하던 대로, 술을 끝내며 우리는 저녁으로 오차즈케를 먹었다. 밥 위에 여러 가지 양념을 얹고 녹차물에 부어서 먹는 오차즈케를 일본인들은 흔히 고향의 맛, 어머니의 맛이라고 했다. ‘오차즈케의 맛’이라는 영화가 있을 정도로 일본인들에게는 사랑받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교토의 풍습 중에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그만 좀 가 주세요 하고 싶을 때 '오차즈케라도 내올까요'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야말로 맛이 확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술집을 나온 우리는 노면전차가 소리도 요란하게 지나가는 밤거리를 걸었다.
나는 호텔 로비에 나카무라를 잠깐 머물게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를 위해 늘 준비하는 선물이 안동소주였다.
들고 내려온 안동소주를 받으며 그는 말했다.
- 고맙습니다. 이런 선물을 받으면, 갑자기 행복해집니다.
호텔 앞에서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나를 향해 그는 두 번이나 몸을 돌려 손을 흔들었다. 그 밤이 나카무라와의 마지막이었다.

추도회는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였다. 나가사키역을 뒤로 하고 언덕길을 걸었다. 오죽하면 지명까지 니시자카(西阪.서쪽 비탈)일까 싶게 언제 걸어도 이 길은 가팔랐다. 이어지고 이어지던 계단이 끝나며 골목길 저편에 평화기념관이 바라보였다.
낯익은 얼굴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3층 회의실로 올라갔다. 앉을 자리가 없어 늦게 온 사람들은 뒤쪽으로 서야 할 정도로 참석자가 들어차면서 추도회가 시작되었다. 대부분이 하라 목사 시절부터 그와 함께 시민운동을 해 온 회원들이었다.
추모 문집을 발간하기까지의 현황보고를 시작으로 참석자들은 마이크를 돌려가며 나카무라와의 지난날을, 그가 살아온 삶의 가치를 이야기했다. 이따금 눈물로 말문이 막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흐느끼는 소리도 낮게 회의실 안을 퍼져나갔다.

‘인권을 지키는 회’가 이루어낸 가장 큰 업적이라면 나가사키에서 피폭당한 조선인의 숫자를 밝혀낸 것이리라. 나가사키시에서 공식적으로 펴낸 최초의 피폭보고서에는 조선인 사망자가 몇 백 명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몇 백 명을 2만 명으로 밝혀낸 것이 회원들과 함께 바친 하라 목사의 땀과 눈물이었다. 그들은 먼저 나가사키시를 바둑판 모양으로 세분하여 번호를 매겼다. 그리고 번호를 따라 주민들을 찾아가 면담하는 일을 진행했다. 이 동네에 조선인이 살았는지, 살았다면 몇 명이나 살았는지를 녹음하고 사진에 담는 일이 이어졌다. 특히 징용공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밥집과 숙소, 한바(飯場) 혹은 나가야(長屋)에 탐문의 초점이 맞춰졌다.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의 원자폭탄이 폭발한 지상 503m±10m의 직하지점直下地點)을 폭심지(爆心地, ground zero)라고 한다. 징용공들의 주거지와 노역장소가 폭심지로부터 얼마나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지를 계상하여 사망, 중상 등으로 분류, 피해자의 숫자를 추정한 것이 하라 목사가 택한 방식이었다. 사망 약2만, 부상자 1만이라는 가공할 숫자가 밝혀지게 되는 과정이었다. 허위와 날조가 들어설 틈을 막아서서 하라 목사가 앞에서 끌고 나카무라가 옆에 서서 도우며 회원들이 십여 년 동안 일궈낸 쾌거였다.
방석을 깔고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쇼카손주쿠의 부당성을 열띤 목소리로 들려주던 나카무라의 마지막 목소리가 어제처럼 선연해서, 그와 보낸 삼십 년 가까운 만남들이 불쑥불쑥 일어서는 느낌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한일 신시대의 개막을 외쳐온 두 나라였다. 그러나 무엇이 달라졌는가. 한일관계는 흔들의자 같았다. 앞뒤로 흔들리고는 있지만 한 걸음도 앞으로는 나아가지 못하는 흔들의자, 그러나 믿었었다. 두 나라의 사람과 사람이, 우정과 우정이 풀뿌리처럼 얽히면서 그 흔들의자를 조금씩은 앞으로 끌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믿었었다.
내가 이야기할 차례가 왔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는 짧게 우리들이 만난 30여 년의 시간만을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 군함도 취재를 위해 처음 나가사키로 왔던 그해 여름, 하라 목사님 댁에서 나카무라 선생을 만났습니다. 그날 그는 별로 말이 없었습니다. 이야기는 거의 목사님 혼자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말은 목사님이 다 했다고 하자 사람들이 낮게 웃었다. 남이 말할 사이도 없이 혼자 이야기를 해대던 목사님이 아니었던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 그 후 삼십 년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 우리들 사이에 흘러갔습니다. 국경을 넘어선 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우정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가 부족합니다.
당의정처럼 우리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우정으로 감싼 존경의 마음이 있었던게 아니었나, 그래서 우리들의 만남이 아름답지 않았던가 생각이 듭니다. 그를 만났다는 것이 그래서 더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몇 가지 그와의 즐거웠던 이야기를 하면서 나도 목이 메어갔다.
- 어쩐지 지금 여기 서니까 추억은 나눠 가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추억이란 그때 그 장소였기에 있을 수 있었던 아주 개인적인 감동이기에 혼자 간직해야만 보석처럼 빛나는 게 아닌가 싶고, 이야기를 하는 순간 빛을 잃을 것만같고…… 지금 저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리고 오차즈케 이야기를 했다.
- 그날도 우리는 늘 그랬듯이 술을 마시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차즈케를 먹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사람이 죽는 것을 두고 돌아가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제 나와 마지막 오차즈케를 먹고 먼 길을 돌아갔습니다. 그랬기에 오늘 여기 서서 작은 약속을 하나 합니다. 이제부터는 오차즈케를 먹지 않으리라는 약속입니
다. 오차즈케를 먹지 않으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겨우 이것이 제가 선생과의 추억에 바치는 약속입니다.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추도회가 끝나고 나는 나카무라 부인과 함께 그의 집으로 향했다. 불단 앞에 향을 올리고 싶다는 나에게 부인은 자신이 타고 온 승용차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 아. 그렇지 않아도 집으로 모실까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시내 한복판 번화가 안에 그의 집은 자리하고 있었다. 부인의 안내를 받으며 거실 불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추도회가 열리는 날이어서인가. 그가 웃고 있는 커다란 사진 옆으로는 화려하게 꽃바구니까지 불단 주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천천히 불을 붙여 향을 올리고 나서 부인에게 부탁했다.
- 술잔을 하나 주시겠습니까. 서울에서 오며 선생이 늘 좋아하시던 한국술을 가지고 왔는데 한잔 올리고 싶습니다.
- 아 술입니까. 좋아하시겠네요. 더군다나 한국술이면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나는 가방을 열고 가지고 온 안동소주를 꺼냈다. 묘소를 찾아가 비석에 부어주려고 준비해 온 술이었다. 서울에서 올 때마다 가지고 오던, 그가 행복해진다던 술이었다,

- 죄송합니다. 집에 술을 마시는 사람이 없어서. 이거라도 괜찮을까요.
부인이 가지고 온 잔은 키 크고 둥근 와인잔이었다. 그를 위해 잔에 가득 술을 따랐다. 서로 마주앉아 술을 마시면서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미즈와리도 아니었다. 자신의 잔에 스스로 따라마시던 자작도 아니었다. 와인잔에 하얗게 넘실거리는 소주를 바라보자니, 처음으로 아쉬움이 하나 떠올랐다. 왜 우리는 그다지도, 과거사 옆으로 한 걸음도 비켜서지 못했을까. 과거사 이외에 우리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그의 대학교가 옛 미쓰비시 병기창 자리였기 때문에 후문 옆 담에는 미쓰비시병기의 다이아몬드 세 개가 그려진 표지석이 있었다. 그것을 보러 학교를 찾아갔다가 연구실에 들른 적도 있으면서 그때도 우리의 이야기는 과거사 안에 갇혀 있었다. 담에 파묻혀서 겨우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있는 표지석 앞에서 함께 사진을 찍으며 그는 말했었다. 전쟁의 흔적을 다 지워서 이제 나가사키에는 전쟁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게 없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부인에게 인사를 하고 현관으로 향하던 내가 조금 주저하면서 물었다.
- 선생이 쓰시던 서재는 다 치우셨나요? 어떻게 사셨는지 그 자취라도 보고 싶어서요.
일본여자들에게는 우리와는 다른 정서가 있나보다 생각한 건 세상을 떠난 어느 작가의 집을 찾아간 탐방기사를 읽으면서였다. 놀랍게도 고인이 된 지 몇 년이 된 작가의 집에는 그의 서재가 살아있을 때와 다름없이 보존되어 있더라고 했다. 마치 조금 전까지 글을 쓰다가 잠시 산책을 나간 듯이 만년필과 안경이 놓여있는 책상 위에는 생화 한 송이까지 꽂혀 있어서 작가의 체취까지 느껴지는 듯했다고.
그 작가의 집을 상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인이 안내해 준 나카무라의 서재에는 책상과 의자만 창을 향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서가가 텅 비어 있어서 적막하기까지 했다.
- 책을 다 치웠습니다. 집에는 읽을 사람이 없는 책들이라.
부인의 말을 들으며 무언가 훅 하고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추도회에서도 내내 느낀 것이기도 했다. 이 부인과 가족들은 나카무라가 평생을 해 온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나 거기 관련된 활동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하는 일, 아버지가 하는 일에 선을 긋고, 거기까지만 하시고 우리를 끌어들이지는 마십시오 하며 산 가족들은 아닐까. 그 생각에 믿음을 더한 것은 인권을 지키는 회의 회원들 누구도 나카무라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 오랜 세월을 함께 시민운동을 한 사람들이 운동의 리더였던 사람이 어디 묻혀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인가. 비석에 부어 주려던 안동 소주를 가지고 그의 집 불단을 찾은 것도 그래서였다. 가해자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는 일은 아버지 하나로 끝나는 일이다. 가족과는 관계시키지 말아 달라. 가족들만으로 장례를 치르게 된 것도 거기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도 했었다.

아침 바다는 잔잔했다. 호텔 창밖으로 펼쳐진 나가사키 앞 바다를 내다보며 나는 아침을 먹었다. 연어구이와 된장국이 있는 일본 아침밥이었다. 손님이 없이 한가한 식당에서 커피 한 잔을 놓고 앉았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간단히 짐을 정리했다. 취재차 드나들 때는 어떤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거리에서 받은 광고지부터 저녁을 먹었던 식당의 주문서 심지어는 종이로 된 술집메뉴판까지 챙겨가곤 했었다. 식당의 주문서는 음식 이름이 자세히 적혀 있어서 일본음식에 대해 쓰는 데 도움이 되었다. 술집 메뉴판은 어느 계절에는 어느 고장의 술이 일본인들에게 명주로 통한다는 정보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입고 갈 겉옷만을 남겨놓고 가방을 챙기고 났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인권을 지키는 회의 회원들에게는 한 사람씩 전화를 걸어 고마웠다는 인사말을 했었다. 올 전화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수화기를 들자 들려온 건, 모시모시 하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뜻밖에도 나카무라의 부인이었다.
- 아, 벌써 호텔을 나가셨으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아직 계시는군요.
- 예약한 후쿠오카행 버스가 열한 시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신가요?
- 저 지금 호텔 로비에 와 있습니다.
나를 만나기 위해서 호텔 로비라니. 시계를 보면서 내가 말했다.
- 지금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서울-후쿠오카 항공편은 늘 한국여행객으로 넘쳐나는 노선이었다. 면세점에서부터 탑승구 앞까지 한국인으로 붐볐다. 그 혼잡이 싫어서 조금은 일찍 공항으로 나갈 생각이었기에 시간은 넉넉했다. 서둘러 방을 나섰다.

오랜 만남이었다 해도 나카무라의 집엘 찾아가거나 부인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들의 시간이 사사롭고 개인적인 만남이 아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남편을 바꿔 주던 부인의 전화 속 빠르고 밝은 목소리만은 늘 기억했다. 그리고 딱 한 번 나카무라로부터 부인과 셋이서 저녁을 먹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가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기념일을 맞아 조선인 피폭자 추도비 앞에서 연례행사인 아침집회가 있을 때였다. 아내가 당신이 준 선물을 너무 좋아했다면서 저녁을 함께 먹자는 것이었다. 내 선물은 일본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던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였다. 그러나 그날 저녁 부인의 직장에서 무슨 사고가 났다면서 결국 그 약속도 우리 둘만의 술자리로 끝나고 말았었다.
로비에 앉아 있던 부인이 일어서며 나를 맞았다.
- 죄송합니다. 이렇게 갑자기.
- 아닙니다. 한 번 더 뵙게 되니, 좋네요.
부인이 손을 가슴에 얹으며 말했다.
- 시간에 댈 수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호텔에서 나가셨으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차를 시키고 났을 때였다. 부인이 천으로 싼 작은 상자를 조심스레 탁자에 올려놓더니 내 앞으로 한 뼘쯤 밀어놓으면서 말했다.
-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마음의 선물입니다.
-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요. 나카무라 선생 추도회에 올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저는 나가사키에 오는 그것만으로도 늘 선물입니다. 잘 받겠습니다.
부인이 무릎에 놓고 있던 가방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자리를 고쳐앉았다.
- 시간이 없으시니 이 말씀부터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끝을 흐린 부인이 봉투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 한 번 봐 주시겠습니까. 나카무라의 호적입니다.
느닷없이 호적이라니. 우리는 아직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 한국에서 태어났다니요, 나카무라 선생이?
- 네. 그렇습니다. 나카무라의 유골은 항아리를 나눠서 일부는 가족묘에 넣고 일부는 집에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유품을 정리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유골을 조금이라도 나눠서 그가 태어난 곳에 묻어 주고 싶습니다.

- 그러니까 나카무라 선생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말씀인가요, 한국에서?
나는 똑같은 말을 다시 또 묻고 있었다. 부인이 나에게 건네준 봉투를 가리켰다. 나는 봉투를 받아든 채, 아직 열어보지 않고 있었다.
- 거기, 출생지 주소도 다 적혀 있습니다.
봉투 안의 종이를 꺼냈다. COPY. 複寫(복사). 바닥에 흐릿하고 크게 워터마크가 찍힌 종이에는 돋보기를 쓰지 않고는 읽을 수 없이 작은 글자들이 세로쓰기로 적혀 있었다. 작은 칸에 글씨를 써넣은 전형적인 공문서였다. 부인이 다시 한번 같은 말을 했다.
- 유골의 일부라도 그곳에 뿌리고 싶습니다. 나카무라의 누님께서 특히 그걸 원하십니다.
- 잠깐요, 부인께서는 그러니까 부인께서도, 처음 이 사실을, 나카무라가 한국 출생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까. 그가 죽고 나서야 알게 된 겁니까?
- 아니지요. 물론, 결혼하며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습니다.
- 저는 몰랐습니다. 나카무라 선생은 자기가 한국 출생이라는 말을 나에게 한 적이 없습니다.
잠시 말이 끊겼다. 부인이 말했다.
- 부탁드립니다. 서울로 돌아가시면, 그 주소지가 어디인지,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아보고 연락주시면 제가 한국으로 가도록하겠습니다.
무언가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지만, 무엇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인지조차 혼란스러웠다. 호적초본을 읽어 보고 싶었지만, 나는 호텔방을 나오며 돋보기를 가지고 오지 않아 그 글자들을 읽을 수가 없었다. 흐릿하게 뭉개져서 어른거리는 호적초본의 깨알같이 작은 글씨가 무슨 배신의 표지처럼 섬뜩하게 내려다보였다.
떠나야 할 나를 위한 배려이기나 한 듯이 부인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호적초본이 든 봉투를 든 채 나는 호텔 앞까지 그녀를 따라 나왔다.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한 그녀가 말했다.
-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조심해 가시고요, 그리고…… 앞으로도 오차즈케는 드시도록 하세요.
부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돌아섰다. 오차즈케, 오차즈케라니. 혼자 되뇌며 천천히 걸었다. 방으로 들어와서 돋보기를 걸친 나는 햇살이 비쳐드는 창가로 가섰다. 호적초본을 꺼내, 그 작은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헤이세이(平成) 6년 법무성령으로 새로 만들어진 개제원호적(改製原戶籍)이라는 서류였다. 쇼와(昭和) 14년 10월 26일, 나카무라의 출생지는 경기도 한성부 봉래정 3정목 62번지였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국가기록원 사이트나 일제강점기 한국주소 자료를 검색한다면 그곳이 어디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노트북을 펼지는 대신 어깨에 메고, 작은 기내용 가방을 끌며 방을 나섰다.

후쿠오카로 가는 버스 창밖으로는 어느 새 지기 시작하는 벚꽃들이 바람이불 때마다 물보라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나에게는 벚꽃이고 나카무라에게는 사쿠라였다. 그 꽃이 지고 있다. 마치 나카무라와 나 사이의 삼십 년이 그렇게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때로는 버림받고 우롱당하고 끝내는 잊혀야 하는 군함도, 엊그제 멀리 사라져가는 군함도를 바라보며 느꼈던 그 망각의 막, 나와 군함도 사이를 가르며 바다 한가운데로 내려오던 그 검고 커다란 막이 나카무라와 나 사이에도 아주 느리게 내려오고 있었다.